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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Nov 06. 2024

6755호실 (19)

향수(鄕愁)

9월에 접어들었지만 여름의 끝자락은 길었다. 아니, 끝도 아닌 듯 매일 더웠다. 더위가 나날이 진화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이란 예보가 날마다 사람들을 세뇌시켰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전처럼 더위나 추위는 견디는 것이란 개념이 없었다. 젊은이들은 본래 참을성이 없다고 하면서 노인들도 똑같이 못 참았다. 이유는 그들이 늙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내가 볼 때는 비슷했다. 그래도 여전히 더운 거리를 지나서 사람들은 작업실로 모였다. 수요일이었고 이들이 다 모이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았듯 역시 수가 결석이었다.

      

코발트빛 원피스를 입은 젠이 들어섰을 때 난 좀 놀랐다. 원피스는 거의 입지 않는 사람인데 이 더위에 저렇게 실루엣이 드러나는 불편한 원피스가 웬일일까 싶었다. 젠의 여름 복장은 주로 아슬아슬하게 짧게 자른 청바지와 민소매 상의였다. 


‘내가 이렇게 입고 다녀도 되나 싶다가도 무슨 상관이야? 내 몸이고 내 인생인데.’

얼마 전 젠이 율에게 했던 이야기가 기억나면서 원피스는 더욱 이상하게 보였다. 그러나 까무잡잡한 젠의 피부에 눈부시게 순전한 파란 원피스는 꽤 잘 어울렸다. 아마 젠이 거리를 걸어왔다면 지나는 사람들이 한 번씩은 돌아볼 만한 쨍한 파란색이었다. 젠은 목이 유난히 길어서 여름이고 겨울이고 스카프를 감고 다녔는데 오늘은 다홍색 줄무늬가 들어간 아이보리 스카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긴 목이 도드라졌다. 나는 젠이 좀 더 야위었다고 느꼈다. 

뒤이어 들어온 율과 싱, 그리고 국일이 수고했다며 젠을 위로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젠의 시어머니 장례를 두고 하는 얘기였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아방가르드 해도 젠 복장은 죽인다. 그치? 상주 복장으로 말야.”

국일이 엄지를 척 내밀며 유쾌하게 젠을 치켜세웠다. 익숙하지 않은 복장을 과감하게 입어치운 젠에게 보내는 국일의 응원인 것을 나는 알아차렸다. 젠은 국일에게 똑같이 응대하며 살짝 웃었다. 


“시어머니 장례 치르고 나니까 완전 숙제 하나 한 것 같죠? 결혼한 친구들이 그러던데. 양가 부모님 장례가 끝나야 일이 끝나는 거라고,”

율이 사들고 온 빙수를 각자의 컵에 나누며 무심히 말했다. 


“너는 그걸 사들고 오니? 배달시키면 편한데. 고맙긴 하다만 네가 고생이다.”

국일이 나서서 율의 빙수 나누기를 도왔다. 


“그런데 뜻밖이긴 하다. 젠이 저런 색 옷을 입은 적이 있었나 싶어서. 밍이라면 모를까.” 

 국일과 율의 손동작을 지켜보던 싱이 젠을 바라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다리를 꼬고 앉아 이야기를 듣던 젠이 다리를 바꿔 꼬며 웃었다. 하긴 그들이나 나나 젠의 무채색 복장에 익숙했기에 오늘의 파격적인 옷, 특히 색상은 화제가 될 만했다. 


“무슨 이유가 있는 거죠? 젠이 그냥 이런 형광파랑을 입고 다닐 사람이 아닌 건 다 아는데. 이실직고해요. 마지막 발악 그런 뻔한 얘기 말고.”

빙수를 다 나눈 율이 자신의 컵에서 부서진 얼음을 숟가락으로 퍼 들고 감격하듯 외쳤다. 


“역시 빙수는 눈꽃이라야 돼. 옛날에는 수정이었는데.” 

율의 감격을 지그시 바라보던 젠이 웃으며 자신의 컵을 들여다봤다. 


“나는 이전 것이 더 좋더라고. 요즘 눈꽃인가 꽃눈인가는 그냥 미숫가루 같아. 뭐라고 할까 임팩트가 없이 그냥 차가운 밀가루 같단 말이지.”

젠의 말은 언제나 느리고 톤이 일정했다. 그래서 율의 말에 반박을 한 것인지 아닌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이런 젠의 말투는 그녀의 무기였다. 어떤 논쟁에서도 지지 않았고 시끄럽게 떠들던 사람들도 어느새 젠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그런 마법 같은 능력이었다. 


“정말 잘 어울리네. 원색이 잘 어울릴 거란 생각은 했는데 왜 맨날 허여멀건 하거나 시커먼 것만 입고 다녔지? 그림에 쓰는 색과 입는 옷의 색이 너무 달라서 하는 얘기임.” 

국일의 말에 젠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건 말이 안 된다. 그럼 그대는 주로 소나무 색만 입어야 하고 율은 아동복 코너에서 옷을 골라야지. 안 그래?” 

젠의 말에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그냥 하는 소리지. 싱이 또 중얼거렸는데 싱의 목은 괜찮았다가 안 좋았다가를 반복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거의 회복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아마 주의하느라 그런가 보다고 나는 스스로 생각했다. 


“이상하게 시어머니가 가시고 난 후 좀 힘들더라고. 난 시어머니를 너무 안 좋아했기 때문에 별다른 감정이 생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노환으로 일 년을 누워 계시는 동안 요양병원에 거의 출근하다시피 했잖아. 이틀에 한 번꼴로. 그게 빨리 끝나길 얼마나 기다렸는데.”

싱과 국일, 율은 빙수 컵을 내려놓고 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들 모두 젠의 간병스토리를 알고 있었고 그렇게 병상에 붙들려 있어야 하는 젠을 안타까워했다. 


“심지어 그런 생각까지 했었어. 구십이 넘은 노인네의 잉여인생을 내가 이렇게 몸 바쳐 돌봐야 하는 건 너무 소모적인 일이 아닐까. 신은 왜 인간을 이렇게 오랫동안 살게 만들었나? 적어도 병에서 회복될 기미가 없으면 데려가야지. 그렇다고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는 나라도 아니고. 하여간 내가 별 생각을 다 했다니까.”

젠의 말은 여전히 느렸지만 가끔씩 아주 가늘게 떨렸다. 기운이 빠져서 저런 걸까.


“젠은 할 만큼 했지. 뭘 더 어떻게 할 수 있어? 난 우리 엄마라도 그렇게 못할 것 같아. 정말 대단해. 젠 아저씨는 말할 필요도 없는 효자고.”

아직 생존해 계시는 친정엄마를 생각했는지 국일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눈빛은 아련했다. 

언젠가 국일은 자신이 고향에 가지 못하는 게 아니라 가지 않는 거란 얘길 한 적이 있었다. 그건 전적으로 맞는 얘기였다. 작업실의 사람들은 전쟁 이후 세대라서 고향이 북한일 리도 없고 내가 알기로는 외국도 아니었다. 


‘게으른 거지. 어쩌면 가고 싶지 않은지도 몰라. 내 삶에 몰두하느라.’

국일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자기의 고향이나 뿌리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너무 바쁜 인생이어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강원도를 다녀온 이후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바빠서가 아니라 애정이 없는 거야. 자신의 과거나 과거를 공유하는 인물과 공간에 대해서. 

     

“차라리 남편은 담담하더라고. 돌아가신 날 몸부림치며 울었다고 해. 내가. 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왜 그랬을까가 궁금했을 뿐.”

젠은 잔잔히 말하면서도 울컥하는 듯 소리가 잠깐 멎었다. 내가 볼 땐 아픔을 가진 슬픔이었다.

율이 젠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친정엄마 돌아가셨을 때 보다 더 힘들었어. 여러 가지가 자꾸 생각나는 거야. 시어머니와 관련된 모든 일들이 마치 모여 있다가 와! 하고 터지는 것 같더라고. 그 일들이 좋은 일들은 아니었거든. 나를 화가 나게 하고 지치게 하던 일들이었어. 그런데 요양병원에 계시던 시간 동안 시어머니가 나를 보면 활짝 웃으시는 거야. 보호사들이 할머니 이중인격자라고 놀렸어. 평소에 뗑깡 부리다가도 내가 가면 아이처럼 웃는다고. 그런데 난 그 웃음에 조차 내 마음을 내드리지 못했어. 그냥 치매가 시작되나 보다 그랬지.” 


“그건 젠이 유난한 시집살이 아닌 시집살이를 해서 그럴 거야. 젠의 시부모님은 고향에서 올라오시면 주로 젠의 집에 거주하셨잖아.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그거 쉬운 일 아니지. 그리고 아기 낳으라고 은근히 압력도 있었고.”

싱이 차분하게 젠을 위로했다. 싱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기론 젠이 일부러 아기를 안 가지려고 한 게 아닌데.

  

“그런데 어느 날인가 내가 외출하고 돌아왔는데 시부모님이 와 계신 거야. 물론 남편이 모시고 온 거지만. 그날 내가 이 원피스를 입었었거든. 시어머니의 눈이 환해지면서 ‘너 참 예쁘다. 그렇게 좀 입고 다녀라.’ 그러셨어. 그때 나는 무슨 일인지 심통이 나서 바로 옷을 벗고 갈아입었지. 그 이후로 이 원피스를 입지 않았어. 그런데 요양병원으로 어머니를 뵈러 갈 때마다 어머니는 그 환한 눈으로 나를 보고 웃었던 거야. 나는 여전히 시커면 색을 입고 갔었지만 어머니는 빛나는 어떤 색을 보고 계신 느낌이었어. 그래서 돌아가시기 육 개월쯤 전에 날이 제법 쌀쌀했지만 이 원피스를 입고 갔지. 그 눈빛을 잊을 수 없어. 한없이 기뻐하고 만족해하며 나의 온몸을 눈으로 만끽하시던 그때를. 그러나 그뿐이었어. 난 여전히 죽음에서 멀리 있는 듯 보이는 시어머니를 견디기가 쉽지 않았지.”  

이야기를 이어가던 젠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러더니 가볍게 자신의 이마를 톡톡 쳤다. 두통이라도 온 것일까. 난 젠의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표정을 살피지 않았는데 아래로 내리뜬 젠의 눈 밑에는 짙은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다. 가엾은 젠. 너무 많이 피곤하구나.


“내가 힘든 건 그거였어. 살아계실 땐 그냥 부담스럽고 불편하기만 하던 분이 왜 환한 웃음으로 살아나는 것일까? 난 왜 쓸데없는 기억을 붙들고 놓지 않는 것일까? 심지어 왜 슬픈 것일까? 내 인격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국일이 손을 뻗어 젠의 손을 잡았다. 희고 여윈 국일의 손과 까뭇하나 역시 여윈 젠의 손은 일종의 경이로움을 자아냈다. 한 장의 사진이라도 남기고 싶은 광경이었다. 


“젠. 그건 시간의 선물이야. 사람들은 애증이라고 얘기하지만 난 젠이 시어머니와 같이 겪어냈던 시간의 결정이라고 생각돼.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젠과 함께 했던 분 아닐까? 젠의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으니 그럴 거야. 난 그게 존재도 없이 희미한 흔적만 있는 향수(鄕愁)와 아주 비슷하다고 생각해.” 

국일의 말에 싱과 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국어 선생이고 시인이구나.


“향수(鄕愁)라는 게 그렇잖아. 늘 생각나는 것도 아니고 잊히는 것도 아니면서 때때로 몸 서리게 그리움을 동반하는 그런 것. 그러니 괴로워하지 마. 젠이 슬픈 건 너무 당연한 거고 그건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기도 하니.”


“국일은 대단해. 어떻게 그렇게 딱 맞는 얘길 할까?”

율이 결국 소리 내어 감탄했다.


“그래, 어쨌든 가신 시어머니를 생각하고 그 불편한 원피스를 입고 온 젠은 얼마나 스윗한 며느리야. 존경해.”

싱이 웃음기 없이 하는 말에 젠이 웃었다.


“그대는 목소리나 빨리 찾아 노래하셔. 스윗은 무슨.”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젠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졌다. 


잠시 후 젠은 잠을 자러 사무실로 들어갔다. 소파에 누운 젠의 실루엣은 야윈 탓인지 원피스 탓인지 많이 도드라졌다. 두루마리 휴지를 머리 밑에 베고 잠든 젠은 언제 일어날지 모를 듯 깊은 수면으로 들어갔다. 

남아있는 세 여자는 일단 각자의 이젤 앞에 앉았다. 언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혹은 시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나 싶게 이젤 앞에서 정중했다. 그러나 그림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내가 볼 때에 그림을 그리기에는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다. 다만 각자의 그림을 들여다보고 각각 생각에 잠겼다. 무슨 생각 중일까.

젠은 언제쯤 다시 짧은 청바지에 민소매 티를 입고 나타날까. 장례식에 왔다던 밍과 참은 잘 지내고 있는 걸까. 나의 궁금증은 젠의 고른 호흡소리와 함께 점점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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