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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Oct 30. 2024

6755호실 (18)

기억 9- 흔들림

쌀 창고였던 작업실에서의 네 번째 여름이 지나고 있었다. 여름은 해마다 더위를 저축해 놓는 듯 조금씩 더 더워졌지만 이 해는 비가 많았고 심지어 저온현상이 생기기도 했다. 

그날도 썩 덥지는 않았기에 밍은 에어컨을 켜지 않은 채 선풍기만 돌리고 있었다. 작업실을 빙 둘러서 여덟 개의 이젤이 세워져 있었다. 그중에는 한 동안 쉬었던 젠과 수, 그리고 국이의 것도 함께 있었다. 국이의 캔버스를 유심히 보던 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도 국이의 캔버스를 내려다보니 원피스를 입은 여인의 전신초상이었다. 여인의 원피스는 여름날 등나무에 매달린 등꽃처럼 푸른빛을 살짝 띤 연보랏빛이었다. 여인은 나무에 기대어서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자세였다. 얼굴은 드러나지 않은 채 뒷모습만 간결한 선으로 터치하고 채색한 그림이었다. 


“다들 알아서 한다니까. 가르치지 않아도.”

밍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습기를 머금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벌써 와 있었네. 내가 늦은 건 아닌 것 같고.”

수였다. 흰색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수는 중학생 같았다. 


“내가 좀 빨랐어요. 선배가 어떤 사람인데 늦어 늦긴, 말이 안 되지.”

수는 역시 빈손이 아니고 아이스커피를 종이캐리어에 담아가지고 왔다. 근처에 있는 커피숍의 고양이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그 커피 집은 왜 고양이를 그렸을까 나의 궁금증이었지만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오늘은 연 안 만드세요?”


“오늘은 아니지. 밍이 나를 불렀는데 긴장하고 와야지.”

두 사람은 아이스커피를 테이블에 놓고 바깥을 향해 앉았다. 두 사람이 있을 때는 보통 마주 보는 게 일반적인 풍경이었는데 남달랐다. 그렇다고 바깥에 특별한 광경이 펼쳐진 것도 아니었다. 개 두 마리가 서로 냄새를 맡으며 천천히 지나고 있을 뿐이었다. 주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웃의 개들이 마실 나온 모양이었다. 


“에어컨 틀까요?”

밍이 일어서며 물었다. 아니, 괜찮은데.


“국이가 그린 인물화 보셨어요? 화풍은 샤갈 느낌인데 훨씬 심플한.”


“그리던 그림을 가져온 것 같았어. 처음부터 여기서 그린 건 아닌데.”


“국이도 선배처럼 어디서 배웠나? 크으”


“그런 것 같진 않았어. 섬에서도 수채화는 꾸준히 했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저 그림은 아크릴 아냐?”


“아니, 과슈네요. 그건 그렇고, 선배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밍은 시선을 테이블에 떨어뜨리고는 한참을 침묵하다 아무도 없는 듯 허공에 대고 이야기했다.


“선배가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은 안 하는데. 그래도 어딘가 마음을 풀어놓기는 해야지 그렇잖으면 일을 낼 것 같더라고요.”


“딸 얘기야?”

밍은 고개를 저었다.

 

“남편?”

밍은 또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수는 질문을 멈추고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저 밍이 시작하기를 기다릴 작정인 듯했다. 

한참 만에 밍은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끌어 수의 맞은편에 앉았다. 유리창을 지고 앉은 밍의 얼굴은 역광이어서 자세한 표정 읽기가 내 자리에서는 어려웠다. 밍은 어둡고 수는 등지고 앉았으니 사실 내가 볼 수 있는 표정은 없었다. 그래도 나는 그들의 대화와 표정을 읽어내려고 애썼다. 딱히 내가 할 다른 일도 없었다. 무엇보다 밍의 고민이 궁금했다. 


“어떤 남자를 알게 되었어요.”

수의 약한 한숨이 내게 닿았다.


“어이없죠? 그럴 거라니까. 아이, 얘길 해, 말아?”

밍이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는 신음하듯 내뱉은 말이 무심했다.


“계속해. 충분히 말해 봐.”


“선배는 딱 교회오빠 스타일이어서 나도 고민 많이 했어요. 그런데 우리 딸 얘기를 처음 들은 사람도 선배고 그때 보여줬던 공감이 많이 고마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밍은 다시 고개를 들고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나도 안심이 되었다. 밍이 흥분하거나 화를 내면 정말 무섭기 때문이다. 


“어느 날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내 시야에 그 사람이 들어오더라고요. 선배처럼 미남도 아냐. 키도 나보다 조금 클까 말까 하고. 미술 평론하는 사람이에요. 그렇다고 평론이 날카롭거나 매력적인 것도 아니고, 그래서 돈을 많이 버는 사람도 아닌데 그냥 자석처럼 끌렸어요.”

수가 고개를 들어 밍을 바라보았다. 수의 눈빛에 어린 연민은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내 나이가 이삼십 대도 아니고 곧 오십을 바라보는데 이게 무슨 일일까요? 더욱이 둘 다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고. 내가 미친 게 아닐까요? 어디 멀리 도망이라도 가야 할 것 같아.”

밍의 한숨에 땅이 꺼질 것 같았다. 

유리창 밖에는 양산을 쓴 두 세 사람의 부인들이 지나고 있었다. 날은 맑았고 작업실은 소등 상태였으니 안이 보일 리 없건만 그들은 유심히 들여다보는 자세로 지나갔다. 그리고 오토바이가 굉음을 내며 그들 곁을 스쳤다. 깜짝 놀란 그들은 서로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어머낫!


“그런데 며칠 전에 그 사람이 그러는 거야. 이혼하겠다고.”

수의 눈썹이 살짝 위로 밀렸다. 눈을 치켜뜨고 사람을 주시할 때 나타나는 수의 표정이었다. 


“아이는? 그쪽에 아이는 없어?”


“없어.”


“너는?”

무슨 뜻이냐며 밍이 눈으로 물었다. 수가 밍을 너라고 부르는 것을 나는 처음 들었다. 

그러나 수의 아리송한 질문을 알아들은 듯 밍은 눈을 내리깔고 말이 없었다. 


“내 얘기가 네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만.”

수의 말에 밍은 아무 기대도 없다는 듯 힘없이 눈을 들었다. 


“알았어요. 무슨 얘기하려는 지. 내가 미친년이지. 이게 말이 돼? 그런데 정말 너무너무 그 사람이 그립고 보고 싶고 같이 있고 싶은 거야. 그 심정 이해가 돼요? 아니지, 선배는 아냐. 바른생활 사나이가 어떻게 이해를 하겠어. 아유, 내가 무슨 꼴이지 이게.”

밍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듯이 헝클었다. 그러나 결이 부드럽고 찰랑이는 밍의 머리카락은 바로 제자리를 잡았다. 수는 목이 잠긴 듯 큼큼 소리를 내기도 하고 침을 소리 나게 꿀꺽 삼키기도 하며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가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니 탄식의 호흡이었다.


“내가 마흔을 넘어서던 겨울, 아마 첫 전시회를 마치고 난 직후였을 거야. 그 여자를 만났어. 네 말대로 그냥 내게 한 존재가 쓰윽 들어온 거야. 너처럼 감당할 수 없는 회오리바람 속에서 1년을 지냈어. 정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게 되더라. 진정한 사랑을 이제 찾은 것 같고 목숨까지 걸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지. 이성의 완전한 마비였어. 그러니 그냥 끝까지 가보자라는 마음이었지.”

밍이 입을 벌리고 멍한 눈으로 수를 바라보았다. 마치 믿을 수 없는 어떤 존재를 보는 듯 한 눈길에 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놀란 것은 밍뿐만 아니었다. 나도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지 초침을 놓칠 뻔했다. 그러면서 오래전 전시장에서 본 밍크코트여자 모습이 떠올랐다. 밍도 아마 그러지 않았을까? 그러나 밍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놀라서 말이 막혔는지도 모른다.


“하루하루를 줄타기하는 긴장감에 살면서도 포기가 안 되더라. 아마 집사람도 눈치를 챘던 것 같아. 그런데도 나를 다그치지 않고 관망하는 느낌이었어. 그것도 견디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지. 차라리 이혼을 요구하거나 나를 내쳐주길 바랐어.”

밍은 여전히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몸에 이상이 온 거야. 내가 간이 안 좋아도 나름 관리를 잘했다고 했는데 심각하게 나빠지더라고. 피를 토하기 시작하는데 죽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어. 아내가 강력하게 요구해서 결국 중국행을 택할 수밖에 없었어. 알지? 중국에서 생체 간이식이 성행하던 때였고 마치 관광하듯 환자들을 모아서 데려가는 브로커가 있었지. 하여튼 낯선 곳에서 간을 이식받고 여럿이 누워 있는데, 살았다는 느낌보다는 비참하기가 이를 데 없더라고. 돈 몇 푼에 생사를 가늠할 수도 없는 선택을 해야 했던 공여자 때문이었어. 그리고 돈으로 생명을 연장해 보겠다는 나의 태도가 얼마나 비열하던지.”

수는 느리고 낮은 소리로 읊듯이 얘기했다. 밍은 차마 못 듣겠다는 듯 얼굴을 가렸다가 눈을 가렸다가 했다. 


“그래서 칠 년의 시간이 필요했었네요.”

밍의 말소리는 신음에 가까웠다.


“아니, 몸 회복은 1년이면 충분했어. 망가진 영혼을 수리하는 데 너무 오래 걸린 거야. 지금도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데 참 간사한 게 간 이식 사건은 죽음도 불사하겠다던 사랑 따위를 안중에도 없게 만들더라고. 내가 온 정신을 쏟아 몰입했던 그 여자는 마치 녹아버린 눈처럼 어떤 흔적도 없었어. 내 인간성의 밑바닥을 본 거지.”      

수의 깊은 한숨에 밍은 흠칫하며 뒤로 몸을 뺐다. 그 바람에 의자가 삐걱거렸고 수는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렇게 온전한 정신이 들면서 가장 나를 괴롭힌 게 뭔지 알아? 아들이었어. 그때 2학년이었던 아들. 아이를 제대로 마주하질 못하겠더라고. 나의 오점이 아이에게 옮겨질 듯한 두려움에 매일매일 절망 했어. 그 시점이야. 나와 가족 대신 상대방을 배신하기로 한 결정이. 배신의 결과로 얻은 건 내가 얼마나 비열하고 부정직하고 부정한 놈인지 철저히 알게 된 거고. ”

수가 아들 얘기를 하자 멍하니 듣기만 하던 밍이 갑자기 훌쩍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차츰 어깨가 흔들릴 정도로 심하게 울었다. 밍은 왜 저렇게 우는 걸까. 밍의 딸은 사실 자신이 낳은 것도 아닌 남편의 아이라고 들었는데도 그 감정은 수와 똑같은 걸까? 

밍의 울음이 그치기를 수는 한참 동안 기다렸다. 

티슈 한 통을 다 풀어서 눈물과 콧물을 닦은 밍은 이상하리만치 정돈돼 보였다. 


“그게 끝이었어. 이상한 것은 이제 기억하기도 싫은 나의 치부가 되어버린 사건이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내가 가장 고치고 싶은 부분이고. 그때의 1년을 삭제하고 싶어. 당시에는 사랑이라고 굳게 믿었던 일이 수치가 되는 것. 너무 부끄럽고 처참해서 내가 왜 그랬었는지를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일. 난 네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길 바라. 물론 선택은 네 몫이지만.”

천천히 말하며 밍을 바라보는 수의 눈가가 촉촉했다.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이 범벅이 된 수의 눈빛은 너무 슬펐다. 밍은 다시 테이블에 엎드려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붉게 물들기 시작한 하늘이 반대쪽 건물에 반사되어 작업실에 붉은빛을 뿌렸다. 잔광은 약했고 안까지 닿지 못했다. 


“먼저 갈까? 더 있을래?”

수의 물음에 밍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는 가만히 일어나 밍의 등을 가볍게 쓰다듬고는 밖으로 나섰다. 수의 그림자가 작업실 창에 드리워지다가 사라졌다. 


나는 너무나 뜻밖의 고백을 듣고 얼이 빠진 것 같았는데 현실은 밍이 엎드려 있는 작업실이었다. 사람들은 정말 알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또 들었다. 수가 그랬다니 세상에. 누가 그 말을 믿어줄 수 있을까. 나도 못 믿겠는데. 그런데 밍은 믿는 것이 분명했다. 

한참을 엎드려 있던 밍은 잠이라도 들었는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이런 충격적인 말을 들었는데 잠들 리가 없지. 나는 걱정이 되어서 밍을 깨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럴 때 다른 사람이라도 와 주면 고마울 텐데. 수로 인해 무너진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 나와 똑같이 밍도 그런 중일까? 

거의 두 시간을 엎드린 채 있던 밍이 얼굴을 든 시각은 여름 하늘이 어둑해질 무렵이었다. 


밍은 일어나 싱크대로 가서 얼굴을 깨끗이 씻고는 머리를 단단히 뒤로 묶었다. 거울 앞에서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하던 밍은 다시 한번 수돗물로 얼굴을 탁탁 두드리고는 눈을 감고 한참 있었다. 그런 밍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싱크대를 떠나 테이블 앞에 바로 선 밍은 이전의 밍이었다. 멋지고 카리스마 넘치는 나의 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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