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고 있었다. 눈발이 흩날리는 밖을 보니 별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눈은 금방 그쳤고 바닥을 슬쩍 덮었다가 곧바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래도 망설이는 마음이 남아서 집에서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그 이후에 생각하자. 나갈지는.
결국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시각에 빈손으로 공원에 갔다.
아침인지 점심인지 모를 빵 한 조각을 커피에 적셔 먹은 속이 헛헛했으나 시장기는 아니었다.
이젠 뭘 먹었는지, 뭘 먹고 싶은지도 모르겠네.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무렵 그랬었다. 뭘 먹어도 맛을 모르겠다. 그만 애써라.
내 나이가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닌데 싶은 생각에 슬쩍 웃음이 나왔다.
아니긴 뭐가 아냐. 증상이 비슷하면 그 나이지.
머리를 흔들어서 정신을 가다듬고 운동 기구 있는 곳을 바라봤다.
처음보다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운동 중이었다. 할아버지들이 너덧 분, 할머니가 서너 분인데 부부들은 아닌 듯했다. 그러나 서로 간에 알고 있다는 친밀감이 그들을 연결하고 있었다. 한동안 운동과 잡담으로 산만하고 편안하던 그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다지 젊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운동하는 무리의 노인들처럼 늙지는 않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여자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이보다 미묘한 것은 그녀의 몸매였다. 깡마른 몸이긴 했는데 긴 다리와 팔에 비해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는 마치 인형을 보는 것 같았다. 상체와 하체의 비율도 좋아서 키만 좀 더 컸다면 아마도 모델인 줄 알았을 것이다.
학교에 다니면서 여러 명의 누드모델을 봐왔고 그렸지만 이런 몸매는 없었다. 소위 탤런트나 영화배우들이라면 이런 몸매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의 등장은 분위기를 완전히 흔들었다.
할아버지들 중 가장 건장한 분이 여자에게 다가와 무어라고 묻더니 운동기구 사용법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의자에 앉아 양쪽의 손잡이를 들어 올리는 기구였다. 아마도 옆에 무게를 다는 추가 있을 텐데 여자는 그냥 빈 손잡이를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간 했다.
그러자 좀 떨어진 곳에서 덤벨을 하던 할아버지가 다가와 참견을 했다. 저게 무슨 운동이야.
“이제 이틀 째래. 아직 힘이 없어서 그래. 한 개도 들지를 못해요.”
바람에 묻혀 들리는 소리는 대강 그랬다.
여자는 몇 번 팔운동을 하다가는 끝났는지 내려간다고 허리 굽혀 인사를 했다. 몸에 쫙 붙는 타이즈와 피부처럼 얇은 나일론 상의를 입은 여자는 흡사 랩으로 몸을 감은 듯했다. 나도 여자에게서 이상하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천상 여자네요.”
이제 막 노인에 들어선 듯한 비교적 젊은 할머니가 여자의 뒷모습을 보고 얘기했다. 그 얘긴 정말 예쁘다는 다른 표현인 것을 나를 포함한 주변의 노인들은 알고 있었다.
여자는 잠시 후 되돌아왔는데 벗어둔 겉옷을 가지러 온 것이다. 여자는 좀 전의 할아버지에게서 재색의 털로 덮인 짧은 코트를 건네받았다. 털옷을 걸친 여자는 마치 한 마리 가젤 같았는데 여전히 구십 도의 인사를 하곤 자리를 떴다. 그 사이에 여자가 있던 자리에는 모든 운동하던 노인들이 모였다.
“국민학교 사 학년 정도나 될 것 같이 힘이 없어. 골다공증 때문에 허리 운동은 못한대.”
좀 전에 여자를 지도했던 할아버지가 으스대며 말했다. 그가 말하는 ‘국민학교’에 웃음이 났다. 그렇지 그 세대지.
모든 할아버지와 모인 할머니들이 여자를 바라보다가 다시 자기 운동 자리로 돌아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그들은 여자가 시야에서 사라지기까지 그렇게 있었다. 나도 여전히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지만 노인들이 알아챌 정도는 아니었다.
“만화에 나오는 공주 같네. 어떻게 저렇게 여릿여릿할까?”
한 할머니가 내게 다가오며 말을 건넸다.
“정말 예쁘네요.”
나의 대답에 다른 할머니가 약간 콧소리로 흥흥거리며 중얼거렸다.
“예쁘기만 하면 뭐 하누? 기운이 있어야지. 약하디 약하게 생겼잖어. 그런 몸에 밍크는 걸쳐야 겨울을 나긴 하겠네만.”
할머니의 말에 말없이 웃음으로 대답하고 자리를 떴다.
아마도 내일부터는 운동기구가 있는 이곳에 새로운 활력이 일어날 것이다. 여자가 계속 온다면.
만일 그렇다면 나도 계속 와서 여자를 보고 싶었다.
<안목의 정욕>
숲에서 새가 울었다. 까마귀도 까치도 아닌.
아니, 뭐 그렇게까지. 무슨 정욕은. 딴마음먹은 것도 아닌데.
초소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리는데 토끼 한 마리가 의자 밑에 앉아 있었다. 옆에 양배추가 있는 것으로 봐서 아마 관리인도 초소에 있을 것이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토끼는 움직이지 않았다. 실핏줄이 비치는 긴 귀를 움직여서 소리를 듣는 태도도 없었다. 희고 몽실한 털로 감싸인 둥그런 뒤태가 얼마나 포근해 보이는지 손을 대보고 싶었다.
“털을 가진 포유류는 만지고 싶지 않아? 인간이 모피를 좋아하는 게 털이 없어서일 거야. 남의 털이라도 가지고 싶어 해. 맞지?”
아버지가 토끼털 조끼를 엄마에게 사 주던 날 여준이 내게 한 말이었다. 나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지만 아마도 여준에겐 그 조끼가 맘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엄마는 마치 여준의 말이라도 들린 듯 거의 조끼를 입지 않았고 옷장에 걸어두었다. 이유는 뚱뚱해 보인다는 것이었는데 그게 아니라도 엄마는 뚱뚱했다. 그렇게 하릴없이 걸려 있는 털조끼는 내가 안방에 들어갈 때마다 만져보고 얼굴을 대보는 애착물건이 되었다. 그 부드러움과 따스함은 어느 옷에서도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엄마가 털조끼를 내게 입으라고 했지만 입고 싶은 옷은 아니었다. 그냥 만지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대상이 내겐 동물의 털이었다.
“글쎄, 이유야 어떻든 털은 너무 매혹적이야.”
내가 행복한 표정으로 말을 하면 여준은 싱긋 웃으며 내 속을 뒤집었다.
“그런데 치명적인 악을 같이 갖고 있잖아. 그 털의 임자는 목숨을 잃었을 테니.”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지만 대개는 그랬기에 난 대답할 말을 못 찾았다.
“보기에 좋으니까 죽여서라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은 게 인간인가 봐. 입을 것이 없는 수렵 시대도 아닌데 여전히 그래.”
하긴 죽어버린 딱정벌레나 참새같이 하찮은 것도 정성스럽게 묻어주는 여준이었기에 내가 여준의 감성을 이해하긴 어려웠다. 그런데 이미 죽어서 털옷이 된 토끼를 조상하거나 다시 살릴 수도 없는 상황에 여준은 왜 저렇게 예민할까 하는 생각에 괘씸했다.
그때 내 머리에 느닷없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나님도 양을 잡아서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타락한 인간에게 입혔잖아. 그게 의복의 역사 아닐까?”
그때 내가 한 실수는 여준이 나보다 훨씬 더 영적으로 예민하단 것을 간과한 것이었다. 여준은 까르륵 대며 너무 웃어버린 나머지 배 아픈 시늉까지 해댔다.
“숙, 하나님이 그 양가죽을 자기가 입은 건 아니잖아. 네 말대로 죽게 생긴 인간에게 입힌 거지. 그건 생명에 관한 문제야. 그런데 우리가 털옷 입으려고 밍크 잡아 껍질 벗기는 거랑 같아? 지금이 뭐 원시시대여서 추위를 견딜 옷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문익점 선생님이 목화씨도 구해 줬는데. 그저 탐욕일 뿐이야. 난 그렇게 생각해.”
여준이 하는 말은 모두 맞는 것 같아서 난 아무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기가 죽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더욱이 말이 시작되면 좀처럼 끝나질 않아 난 대개 자리를 피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준의 말대로 나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남는 일이었으니까.
그래 너 잘났다.
여준과의 대화에서 언제나 내가 최종적으로 하는 혼잣말이었다.
“요즘 같은 때 누가 진짜 밍크를 입고 아녀? 아까 그 여편네도 생각이 없네. 하여간 이쁜 것들은.”
어느새 운동을 끝내고 내려가던 두 명의 할머니 중 하나가 씩씩거렸다. 그 비난의 소리는 분명 아까 그 인형을 겨냥한 말이었다.
“그런데 아까 그 여자가 입은 밍크는 좀 달라 보이던데. 사람이 예뻐서 그런가. 하여간 늙기에 아까운 몸이더이다.”
“이쁜 것들은 늙는 게 억울할 거야. 누굴 홀리려고 저렇게 요란하게 입고 다녀? 산에 오면서 무슨 밍크야, 밍크는.”
그들의 이야기와 여준의 이야기가 뒤섞이며 과연 나는 왜 털이 좋을까를 생각했다.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내게는 코트든 소품이든 털 제품은 없었다. 살 능력은 남편의 벌이로 충분했으나 어쩐지 살 수 없었던 것은 언제나 여준이 가로막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면서도 늘 내 머릿속은 한 번도 하지 못한 변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뭔가를 좋아하면 갖고 싶은 것은 당연하잖아. 특히 생명이 떠나 이미 제품화된 것인데. 그게 그렇게 비난받을 일일까.
아까의 까마귀인지 아닌지 한 마리가 저음으로 울며 날아 올라갔다.
<그게 욕심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