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1. 당신의 시간

by 안개인듯

요양원에서 연락이 왔다.

남편이 나를 찾는다며 올 수 있느냐고 했다.

정기적으로 요양원을 찾는 나에게 처음으로 하는 요청이었다.

전화를 받았을 때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나쁜 일일까.

그러나 내 질문에 직원은 별 일은 없고 다만 찾는다는 얘기뿐이었다.

섬망 환자의 요청을 그대로 보호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맞는지 망설이는 게 느껴졌지만 전문가인 그들이 보았을 때 분명히 필요해서였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결국 물었다.

“서상철 할아버지가 저를 찾아요? 자기 어머니를 찾는 게 아닌가요? 시어머니요.”

상대방은 잠깐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내 아내, 고여숙을 만나게 해 줘, 그러셨어요. 사모님이 지난주에 오셨던 것은 기억 못 하시는 것 같아요.”

루아의 아이를 돌봐주기로 한 수요일이었다.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사위의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그러나 가장 눈에 어른거리는 것은 솜사탕 같은 아기였다. 아기를 보러 가는 날은 데이트하듯 설렘이 가득했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가 그곳에 있었다. 늙어가는 것은 생명과는 점차 멀어지는 것이고 낯섦에 대해 경계가 더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날것의 생명체가 그 명제를 흔적도 없이 녹이고 신세계를 선물했다. 누구나 그런 것은 아니라지만 나에겐 그랬다.

하필 오늘이야.

마음속에서 마뜩잖은 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남편보다 아기 때문에 망설이는 내가 보이자 곧 정신을 가다듬었다.

너야말로 제정신이 아니군. 일흔여덟 먹은 노인네와 한 살도 안 된 아기의 시간을 생각해 봐.



정신을 차리고 옷을 속히 갈아입었다. 아기에게 가려고 입었던 흰색 면 티셔츠를 벗고 자루 같은 녹색 원피스를 꿰었다.


내가 만나본 남편의 상황은 대개 그랬다.

침묵하다가 아무 일 없다는 듯 해맑게 웃던가, 자기 엄마한테 가자고 떼를 쓰던가.

공연히 헛걸음하는 것 같았다. 모처럼 잠깐 외출한다고 했던 사위한테도 미안했다.

옷을 갈아입는 짧은 시간에도 머릿속에 온갖 생각들이 조립되고 해체되었다.


“루아구나. 루아가 왔어. 숨결이지.”

나를 본 남편은 얼굴에 화색이 돌아 소년 같았다. 주름조차도 묻힐 만큼 그는 환히 빛났다.

그러나 침대에 뉘인 상태여서 내가 일으키려고 하자 옆에서 제지했다.

“지난번 다녀가시고부터는 식사를 거부하셔서 지금까지 거의 아무것도 안 드셨어요. 이 상태가 지속되면 탈수로 위험해지거든요. 사모님을 엄청 찾으셔서 혹시 식사에 도움이 될까 하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원장의 걱정스러운 얼굴은 나보다 더했다. 하긴 그동안 남편은 식사는 그럭저럭 했으니 긴장되는 상황인 것은 맞았다. 그런데 식사를 안 한 사람의 얼굴이 빛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 일까. 모든 것이 아리송했다.

지금 저를 딸로 착각하는데요?

요양원 원장을 보는 내 시선은 그랬다.

남편이 굶는다는 것보다는 그의 정신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에 방점이 찍힌 궁금증이었다.

“할아버지, 사모님 오시면 식사하신다고 약속하셨죠? 사모님 이름이 뭐죠?”

남편은 눈을 잠시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나를 딸로 착각했던 환희의 눈빛이 편안해져 있었다. 방안을 흘긋거리며 둘러보던 그의 눈동자가 내게 멈추고 나직한 소리가 입술로 새어 나왔다.

“내 아내 고여숙.

남편이 젊었을 때부터 나를 부르던 애칭 아닌 애칭이었다. 남편의 모임에 가면 나는 항상 그렇게 소개되었었다.

‘제 아내 고여숙입니다. 그림쟁이죠.’

그러나 지금 남편이 하는 말은 나를 알아봐서라기보다는 그냥 기억된 낱말을 소리 내는 정도가 분명했다. 방금 전까지도 루아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런 기대도 없이 남편을 향해 허리를 구부려 물었다. 누구라고요?


“내 아내 고여숙. 그림쟁이.”

남편의 정신을 확인한 나는 직원을 설득해 휠체어에 실어줄 것을 부탁했다. 혹시라도 바깥바람을 쏘이면 낫지 않겠느냐고. 직원은 난색을 표하더니 물어보고 오겠다며 나가더니 다른 직원 한 명과 같이 왔다. 두 사람의 도움을 받은 남편의 몸은 빈 자루처럼 흐느적거려서 거의 누은 상태로 단단하게 고정해야 했다.

그래도 신선한 바깥공기가 뒤엉켰던 정신을 재배치했던지 남편의 표정은 훨씬 선명해졌다.

“왜 식사를 안 해요? 서상철 씨.”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이었다.

늘, 루아 아빠 아니면 당신이었던 남자의 이름은 서상철이었지.

“내 아내 고여숙이 보고 싶어서 밥이 먹기 싫었어.”

갑자기 ‘내 아내 고여숙’이란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같이 낯설었다. 더욱이 내가 보고 싶어 밥이 먹기 싫다는 것은 사십 년 결혼생활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로운 언어였다. 옆에 있던 직원이 싱긋 웃었다.

나는 남편을 바라보며 다시 확인에 들어갔다.

놀랍게도 남편은 루아의 이름과 그 이름을 짓게 된 이유와 사위와 손자의 방문까지 기억을 해냈다. 그리고 여준에게서는 연락이 없느냐는 안부까지 물었다. 아주 천천히.

나는 좀 두려웠다. 죽기 직전에 정신이 명료해지는 때가 있다더니 지금일까? 요즘 들어 명료함과 잠에 빠지는 일이 반복되고 잦아졌다. 그렇다면 지금의 시간은 어디쯤일까?

이야기가 힘이 들었던지 남편은 잠시 잠이 들었다. 그 사이에 직원이 마시는 수액이라고 한 병 가져다주었다.


"곧 깨실 테니 잠이 깨면 드리세요."

남편은 정말 5분도 안되어 개운한 표정으로 눈을 떴다. 마시는 수액이라는 것도 빨대로 조심스럽게 절반이나 마셨다. 그런데 사실 남편이 다시 혼미한 정신으로 빠질까 봐 나는 어떤 말도 묻기가 두려웠다. 하지만 그 정적을 깬 것은 남편이었다.

“나와 함께 살아줘서 고마워요. 내 아내 고여숙 씨. 부탁이 있어요.”

정말로 너무도 달라진 남편의 말소리와 태도에 직원도 짐짓 놀라는 눈치였다.

"사모님, 녹음하시죠. 혹시 모를 일이니까요."

직원의 말에 부랴부랴 전화기의 녹음 버튼을 찾았으나 손이 헤매고 있었다. 결국 직원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남편은 정작 녹음을 시작하자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몰아쉬는 듯한 옅은 한숨과 함께 비교적 또렷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괜찮아요. 루아도 괜찮고 당신도 괜찮아져야 하는데.”

그리고는 다시 긴 침묵에 들어갔다. 잠든 것은 아니기에 틈틈이 남은 음료를 다 마시게 했다.

눈을 들어보니 초겨울의 스산함이 스민 요양원은 남편만큼이나 메말라 보였다.

공원의 날다람쥐도 이젠 먹이를 갈무리하겠군.

나의 생각은 또 다른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벗어나요."

침묵에서 돌아온 남편이 한 단어였다. 그리고는 다시 잠 속으로 떨어졌다.

잠든 남편은 정말 연약한 아이에 불과했다.

그래도 식사할 기미가 보인다며 안심하는 요양원 직원이 와줘서 고맙다고 했다. 주객이 전도된 것 같은 고맙다는 말에 내 밑자락의 부끄럼이 올라왔다.


길길이 뛰는 루아에게서 전화가 오기 전에 차에 오른 것이 다행이었다. 남편의 상태를 차분히 설명했음에도 루아는 통곡을 하며 울어댔다.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왜 대성통곡이냐. 진정해. 제정신이었다고, 오늘은."

내 말에 루아는 전화기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이 소리쳤다.

“엄마는 그게 제정신이라고? 아유. 끝정신이지 누가 봐도. 아빠의 마지막 시간이었다고. 그걸 왜 엄마 혼자 가냐고.”

어이가 없는 것은 나였다. 너보다 오래 산 내가 잘 알지 네가 뭘 알아.

일단 소리로 루아를 제압하고 있는 힘껏 액셀을 밟았다.

남편의 마지막 시간이라고?

그 시간에 한 말이란 게 고작 ‘벗어나요’라고? 그 말 외에는 다 잊은 모양이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남편의 작은, 그러나 또렷한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 소리가 거슬린 나는 입을 앙다물고 작게 소리쳤다.


당신 삶의 여정 어디쯤 있는지 난 알 수 없지만, 당신이야말로 속히 이 시간을 벗어나고 싶은 모양이네요. 서상철 씨.

keyword
작가의 이전글20. 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