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눈이 하얗게 내렸다. 오늘은 절대 밖에 나가지 말라고 루아가 전화를 했다.
대답은 그러마고 했지만 나의 결정은 공원이었다. 이런 날일수록 공원은 한적할 테니. 물론 눈싸움을 하러 오는 중학생들이 있긴 하지만 그러기엔 이른 시각이었다.
누가 오라고 부르는 것도 아니고, 굳이 공원엘 가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집에 있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부지런히 커피를 내려 보온병에 담아 길을 나섰다. 다행히 미끄러지지 않고 느린 걸음으로 공원에 이르렀을 때 운동하고 있는 노인 서넛이 보였다. 그중 한 명이 나를 향해 손짓으로 아는 척을 했다. 목례로 대답하고 지나가는데 회장 할아버지가 여전히 민소매차림으로 역기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는 더 이상 소리 지르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내 길을 가는데 익숙한 소리가 나를 불렀다. 화가님!
돌아보지 않고도 나는 그를 알 수 있었다.
조이상.
그러나 나는 선 자리에서 잠깐 멈칫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화가님!”
내 앞쪽으로 조이상이 성큼 다가섰다. 테가 굵고 검은 선글라스가 해맑은 얼굴을 거의 반쯤 가리고 있었다. 조이상은 안경을 벗어 들고 눈을 찡그리며 해를 가리켰다.
“화가님, 이런 날은 선글라스 쓰셔야 해요. 반사되는 눈빛은 강렬해서 눈을 해친대요.”
그러나 조이상은 다시 선글라스를 쓰진 않았다. 대신 나를 향해 서서 그 선한 눈을 몇 번 끔쩍였다.
“오늘 만날 줄 알았죠. 며칠 동안 기다렸거든요.”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든 나는 추우니 걸으며 이야기하자고 조이상을 이끌었다.
“전화를 하지 그랬어요.”
내 말에 조이상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마치 기다리던 말을 들은 것처럼. 그러나 사실 조이상이 전화를 했어도 내가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름으로 저장해 놓지 않았으므로. 생각이 그에 이르자 내가 한 말에 대해서 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생각도 안 했으면서 말을 쉽게 해 버렸구나.
“화가님, 제가 팔짱을 껴도 될까요? 미끄러워서요.”
나의 두 손은 주머니에 푹 찔러 넣은 상태라서 조이상이 팔을 끼면 되었다.
조이상의 팔이 내 팔을 지탱해 주면서 걷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아프기 전의 남편이 그랬었다. 눈이 오면 엉거주춤한 나를 제대로 걷게 해 주던 팔짱이었다.
“신발에 아이젠을 채워줘야 안심이 되는데.”
그렇게 놀리면서도 아이젠을 채우진 않았다. 아이젠을 채우고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누가 봐도 우스꽝스러운 일이며 남편이 한 말은 농담이라는 걸 알면서도 난 화가 났다.
그게 관심과 사랑의 다른 표현 방식인 것을 요즘에야 깨달으며 늦된 나와 사는 사람들이 힘들었겠단 생각이 들곤 했다. 나의 부모님과 동생인 여준과 남편과 딸 루아에게 까지.
“화가님, 이러지 말고, 요 아래 카페에 가요. 저희 회사 옆에 있는데 아주 괜찮아요.”
나를 부축해 걷던 조이상이 제안했다. 그러나 나는 이 공원을 두고 카페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근처 벤치에 눈을 쓸고 앉자고 했다.
“왜 나를 만나려고 했어요?”
준비해 간 커피를 조이상에게 따라주며 무심한 듯 물었다. 사실 왜 만나려고 했는지 궁금하진 않았다. 내가 아무런 까닭 없이 조이상을 만나면 기분이 좋듯이 조이상 또한 그냥 만나고 싶었을 수도 있을 테니까. 우리 삶의 행동이나 생각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궁금한 게 있어서요. 엄마가 묻지 말라고 하셨는데......여준 화가님과 너무 닮으셨잖아요? 고여준 화가님의 쌍둥이 언니 화가님이시죠?”
나는 놀라지는 않았다. 조이상은 처음부터 나를 고여준으로 착각하기도 했고, 또 그 엄마가 여준의 소식을 물으러 일부러 왔던 일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조이상은 왜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걸까? 갑자기 조이상의 관자놀이에 점이 있었단 생각이 났다. 지금은 가려진 머리카락 때문에 확인할 수는 없지만 루아와 같은 자리, 같은 크기의 점에 놀랐었다. 그러나 그런 점은 누구라도 갖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니까. 나는 다시 마음을 다독였다.
“맞아요. 그게 왜요?”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물었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니요. 제가 고여준 화가님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너무 놀랐었거든요. 그런데 화가님의 그림도 그렇더라고요. 그런 훌륭한 화가님이 공원에서 그림을 그리셔서 일단 좀 의아했고요. 그다음엔 존경스러웠어요. 저 같은 사람 초상화도 그려 주셨으니.”
이야기를 이어가는 조이상에게로 따뜻한 강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 강물에 손을 담가 따스함을 느끼고 싶을 정도로 나는 조이상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조이상에 대한 알 수 없는 연민이 밀려와서 스스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고여준 화가의 무슨 그림이었나요?”
조이상이 봤다는 여준의 그림을 내가 안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그냥 물었다. 무엇이 조이상을 놀라게 했을까 싶은 궁금증이었다.
“스페인에서 전시하실 때 엄마가 다녀오셨거든요. 그때 사 오신 그림 중 하나가 이거예요.”
조이상이 휴대전화의 갤러리에서 꺼내 보인 그림은 유화 초상화였다. 중학교 때부터도 자화상을 꾸준히 그려온 여준의 그림이었다. 그림으로는 여준인지 나인지 전혀 구별할 수 없었다.
나도 여준의 스페인 전시에 대한 이메일을 받았지만 도록은 첨부되지 않아서 이 자화상이 있는 줄은 몰랐다. 여준의 자화상을 보자 뜨거운 기운이 가슴에서 얼굴로 치올랐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는데 정작 얼굴의 느낌은 차가웠다. 나의 조용하지만 돌발적인 행동에 조이상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추우세요?라고 물었을 뿐.
“저는 그때 열 살 쯤이었는데 그림에서 고여준 화가님을 처음 봤어요. 그런데 엄마가 보여준 아주 낡은 팸플릿에서 화가님을 봤거든요. 놀랍게도 두 분이 똑같은 거예요. 엄마가 설명을 해 주셔서 두 분이 쌍둥이란 걸 알았어요. 제가 더 좋아하는 그림은 이거랍니다.”
조이상은 다른 화면을 꺼내 내 앞에 펼쳐 보였다. 그건 내가 그린 크로키 초상화로 여준을 그린 것이었다.
잠시 프랑스에 머물다가 내가 떠날 무렵 우리는 작은 전시회를 열었다. 나는 극구 사양했지만 여준의 권유로 크로키 몇 점을 내놨고 생각 외로 매진되었다. 그때 여준은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역시, 숙. 대단해. 와! 내건 몇 개 남았는데. 축하해.”
얼떨결에 팔린 작품을 여준은 크게 축하해 주며 밤이 새도록 음악을 틀고 춤추고 놀았던 기억이 났다. 여준은 아껴두었던 와인도 따서 러브 샷을 하자며 흥을 돋웠다.
“야, 내건 싸니까 팔린 거지. 별 거냐?”
기분이 좋으면서도 마냥 좋아하지 못하는 나를 여준은 있는 힘껏 끌어안으며 떠들었다.
“숙, 싸다고 사는 사람들이 아냐. 너의 작품성을 본 거야. 언제까지 그럴 거야? 그림 계속 그려야 돼. 너 같은 천재가 멈추면 세상이 손해야.”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어본 말이었다. 천재.
“이 그림이 집에 있나요?”
나는 조심스럽게 조이상에게 물었다. 두 개의 그림이 집에 있든지 아니든지 내가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는데 왜 확인하고 싶었을까.
“아니요, 두 개 다 엄마 연구실에 있어요. 저도 일부러 엄마 연구실에 가야 볼 수 있거든요. 아주 아끼시는 거죠. 그런데, 화가님, 얼굴빛이 안 좋으세요. 어디 아프세요?”
아마도 내가 심하게 찡그렸거나 아주 무심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그럴 때 사람들은 주로 아프냐고 물었다. 그러나 아픈 것도 아니고 불편한 것도 아닌, 아무 생각 없이 있는 상황이었다.
모든 것이 일시 정지된 것 같고, 나 혼자 공중에 떠 있는 느낌. 뭘 어쩔 수가 없는 그런 상황.
나는 일단 정신을 차렸고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일어났다. 잠깐 어지럼증이 있었지만 심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가시게요? 제가 모셔다 드릴까요?”
조이상은 정말 나를 집에라도 데려다줄 기세였다. 그러나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
“그래서 나를 보러 온 거군요? 확인 차?”
조이상의 팔짱에 기대어 공원을 내려오며 물었다. 길은 많이 녹아 있어서 더욱 미끄러웠다.
“아니요. 일단 그림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뭐라 그럴까. 마치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그런 느낌 있잖아요? 초면임에도 분명히 이전에 깊이 알았던 사람처럼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들고, 찾게 되고, 그랬어요. 혹시 화가님과 제가 전생에라도 만났을까요? 농담이에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공원에서 화가님 처음 보던 날 번개 맞은 것 같았어요. 이제 고백하지만.”
조이상의 말에 어떤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 번개 맞은 것 같았다.
“엄마가 그랬어요. 만날 사람은 만난다고. 그게 화가님인가 봐요. 엄마가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인지 모르지만 제가 만날 사람은 화가님이 맞는 거죠 뭐.”
조이상은 밝게 웃으며 시커먼 선글라스를 다시 썼다.
“다음에 제가 선글라스 하나 선물할게요. 언제 오실 거예요?”
나는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니, 언제일지 몰라요. 조심해서 가요. 세상이 미끄러워요.”
반짝이던 해가 구름 속으로 숨더니 순간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또 한 차례 눈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