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미중 갈등과 탈세계화 추세
그동안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국은 세계화(globalization)를 부르짖으며 하나의 지구촌을 지향했다. 경제는 물론 과학기술, 사회문화 심지어는 정치문제까지 국가 간 상호협력과 국제사회의 개입을 확대해 갔다.
세계화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만 해도 탈냉전과 경제공동체를 통해 저개발국가의 국민들이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세계화가 확대될수록 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국가들은 미국, 중국, 유럽 등 글로벌 경제력을 장학하고 있는 국가들에게 더욱 종속되어 경제 강국들의 조그마한 구조 또는 정책변화에도 국가경제 전체가 흔들리는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개발국가들을 중심으로 세계화의 부작용에 대한 비판과 탈세계화 시도가 일부 있었으나, 이미 강대국 중심으로 짜인 세계경제질서에 정면으로 대응하여 탈세계화를 실제로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경제적으로 선진 각국에 크게 뒤지지 않고 비교적 안정적인 경제역량을 가지고 있던 우리나라도 세계금융질서의 움직임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IMF구제금융의 지원을 받는 불가피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고 가정이 파괴되는 치욕을 경험했다.
그런데 세계화를 통해 영원히 이익만을 누릴 것으로 기대했던 경제 패권 국가들에게도 세계화의 역작용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굴뚝산업을 노동비용이 싼 중국으로 대거 옮겨 제품의 단가를 낮추고 자국의 환경보호 측면에서도 커다란 이익을 누렸던 미국이 오히려 자국 산업을 고사시키고 중국 의존도만 갈수록 심화시키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겪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국민의 고통은 중국과 불법 이민자 탓”이라 선동하며 대통령에 당선됐다. 미국과 중국의 심각한 무역 갈등이 촉발된 것이다.
한편 인터넷과 ICT 산업의 급속한 발전으로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등 글로벌 기업들이 출현하게 되고 이들 글로벌 기업 대부분은 미국 기업들이었다. 당연히 이들 기업에 대항할 역내 기업이 없는 유럽연합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제조업은 중국에게, ICT 등 첨단산업은 미국에게 자리를 내준 유럽 국가들의 위기감은 갈수록 고조되었다.
무너지고 있는 기존의 질서에 대체하는 새로운 질서를 모색해야 한다는 뉴노멀이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지만 아직까지 그 실체적 뱡향성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경제 패권을 쥐고 있는 미국, 중국, 유렵연합은 국지적 또는 탈세계화적 규제정책과 규제입법의 제정을 통해 자국 이익의 극대화를 모색하고 있는 상황이다.
Ⅱ. 미국과 EU의 자국 보호 규제정책
미국 바이든 행정부는 세계적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미국 국민 생활의 안정화”를 명분으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제정·발효시켰다. 그런데 ‘인플레이션’이라는 것이 탄소나 유해물질도 아니고 일종의 경제 현상 또는 상황인데 이러한 인플레이션을 법률로써 감축시키겠다는 발상 자체가 놀랍다. 당연히 법률의 이름(법명)과는 달리 그 이면에 바이든 행정부의 속내가 숨어 있는 것이다.
IRA는 보건, 클린 에너지, 조세 등 3대 부문의 개혁적 규정을 담고 있는데, 이 중에서 클린 에너지 관련 규정을 보면 미국이 이 법을 통해 추진하고자 하는 숨은 목적이 보인다. ‘클린 에너지’ 와 관련하여 ‘에너지 비용 감소, 클린 에너지 경제 구축, 환경오염 감소 등’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으나 그 핵심 내용은 “미국 내에서 생산되는 친환경 에너지 기업에게만 다양한 세액공제 및 보조금 혜택을 주겠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전기차, 태양광 발전소 등 탄소 에너지를 대체할 수 있는 이른바 ‘클린 에너지’를 육성·발전시키겠다는 것인데 이들 산업은 중국이 이미 기술적 측면은 물론 시장 점유율 등에서 월등히 앞서 있다. 그래서 중국을 견제·배제하기 위해 IRA를 제정해서 ‘미국 역내에서 생산·제조되는 제품’에 대해서만 혜택을 주겠다는 것이다. 결국 ‘인플레이션 감축’, ‘클린 에너지’ 등 온갖 그럴듯한 명분을 다 내세우고 있으나 그 속내는 단적으로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것이다.
국가가 자국 기업에 대해서만 차별적으로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세금을 감면하는 것은 WTO 협정과 한미 FTA 협정을 위반하는 것이다. 당장 보조금 혜택을 받지 못하는 우리나라 현대·기아자동차는 보조금을 받는 테슬라 자동차와 가격경쟁력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부 차원에서 항의도 하고 외교적 노력도 하고 있으나 이미 발효된 IRA의 적용을 막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유럽연합은 게이트키퍼의 자사우대, 결합판매, 최혜대우요구 등 독점화 기도 행위를 규율하는 「디지털 시장법」(Digital Markets Act, DMA)」과 모든 온라인 중개 서비스 사업자의 불법 콘텐츠 유통 금지, 추천알고리즘 투명성 확보 등의 의무를 규정한 「디지털 서비스법」(Digital Service Act, DSA)」을 제정하였다.
DMA의 적용 대상인 이른바 ‘게이트키퍼’는 대규모 플랫폼으로서 사업이용자와 최종사용자 사이의 게이트키퍼로서 활동하는 사업자를 말하는데, 디지털 시장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핵심 플랫폼 서비스(core platform services)사업자가 이에 해당한다. 빅테크(Big Tech)의 경쟁 저해 행위를 막기 위해 강력한 사전규제를 통한 거대 플랫폼 사업자의 불공정한 관행을 뿌리 뽑겠다는 것이 이들 법의 대의적 명분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의명분 이면에 숨어 있는 진짜 속내는 GAFA를 비롯한 미국 빅테크 기업을 겨냥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나라 기업도 유렵연합 역내에 핵심 플랫폼 서비스를 제공할 경우 DMA 등을 준수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들 법에 대한 분석과 대응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부와 정치권은 유렵연합이 이러한 법안들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때부터 단순한 대응적 차원을 넘어 우리나라 디지털 플랫폼 규제입법의 모델로 삼아 계수(繼受)하려 했으며 지금도 그 분위기는 이어지고 있다.
미국 역시 빅테크 기업의 독과점적 지위 남용을 우려해서 오랜 조사 활동을 거쳐 이른바 ‘디지털 시장의 경쟁조사 보고서’(Investigation of Competition Digital Markets)를 발표했고, 이를 바탕으로 하원은 5개의 반독점 패키지 법안을, 상원은 대형 앱마켓 사업자 규제 법안을 각각 발의했다. 하지만 발의된 법안 중 「기업결합 신고비용 현대화 법률」(Merger Filing Fee Modernization Act)만 통과됐고, 나머지는 입법이 불발됐다. 특히 EU DMA와 유사한 AICOA(The American Innovation and Choice Online Act), OAMA(The Open App Market Act), PCOA(Platform Competition and Opportunity Act) 등 플랫폼 규제입법은 의회의 회기 종료에 따라 자동 폐기됐다.
한때 당장이라도 제정될 것처럼 보였던 디지털 플랫폼 규제입법이 이처럼 주춤하게 된 것은 기존 경쟁법과 별도로 디지털 플랫폼만을 특별히 규제해야 하는 당위성을 논증하기도 어렵고 자칫 플랫폼에 대한 규제가 산업의 혁신을 저해하고 소상공인들의 생존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기조가 형성된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미국 정부와 국민들의 관심이 플랫폼 규제보다는 대중 무역규제로 전이되었다는 것이 가장 커다란 이유다.
Ⅲ. 우리나라는 디지털 플랫폼 규제입법 추진동향에 대한 비판적 제언
디지털 플랫폼의 성장에 따라 기존 전통산업과의 갈등은 우리도 피할 수 없는 현상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 대형마트와 재래시장 또는 골목상권과의 갈등보다는 더욱 광범위한 사회적 문제로 확대되었다. 모빌리티 플랫폼과 택시 사업자, 공유숙박 플랫폼과 기존 숙박업소, 음식배달 플랫폼과 라이더, 전자거래 플랫폼과 영세 온라인 쇼핑 입점업체 등의 갈등은 정부와 정치권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고 디지털 플랫폼 규제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다.
대형 플랫폼이 시장지배력을 남용하거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서 불공정거래행위를 한다면 기존의 경쟁법으로 규제하고, 현행 경쟁법만으로 규제되지 않는다면 새로운 규범을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러한 사회적 갈등과 현상에 대한 심도 깊은 실태조사와 현상학적 원인 및 문제점 등을 차분하게 분석하기보다는 EU의 DMA, DSA 등 해외 입법의 기본 틀을 그대로 계수하는 디지털 플랫폼 규제입법의 제정 시도부터 서둘러 진행했다. 다행히 여야 정치권과 정부 부처간 경쟁적으로 추진되던 디지털 플랫폼 규제입법 추진의 광풍(?)은 ‘자율규제’라는 방파제로 다소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여전히 정치권과 정부 부처는 규제의 칼날을 갈면서 플랫폼 규제입법의 기회만을 엿보는 상황이다.
플랫폼 규제입법의 제정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당위성과 필요성이 확인된다면 당연히 규제입법을 제정하는 것이 순리다. 하지만 미국의 글로벌 플랫폼 기업들로부터 역내 산업을 보호하려는 EU, 중국에게 빼앗긴 국가기간산업의 경쟁력을 다시 되찾으려는 미국 등 각자 자국의 상황과 이익을 위해 추진되고 있는 규제입법의 기본틀을 우리나라 정부나 정치권이 커다란 고민 없이 일단 계수하여 입법부터 하려는 태도는 진실로 무책임한 발상이다.
디지털 플랫폼과 관련된 소상공인과 종사자의 상호관계, 플랫폼이 가존 산업에 미치는 영향, 경쟁법 등 현행법의 규제 공백에 대한 실증 등에 대한 철저한 실태조사가 선행돼야 한다. 어설픈 동조적 규제 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디지털 플랫폼을 규제하는 법령을 제정할 때는 미국도 EU도 아닌 우리나라 국민과 우리나라 산업에 미치는 영향부터 꼼꼼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의 봉(?)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 이 글은 KISO저널https://journal.kiso.or.kr/ 제50호 <KISO위원 칼럼>에 실린 김민호 성균관대 교수의 글(탈세계화 추세와 디지털 플랫폼 규제정책 ; 우리는 봉인가? | KISO저널)을 재인용했습니다.
글 김민호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발행 KISO저널 제5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