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지급 결제 수단은 기술을 기반으로 발전해 왔다. 동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거푸집을 이용하여 먼저 소전(素錢)을 만든 후 무늬와 장식을 새긴 틀 사이에 끼워 찍어야 한다. 현존하는 금속 화폐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600여년 경 아나톨리아 (Anatolia) 반도 서부의 리디아 (Lydia) 왕국에서 주조한 동전이다. 돈이 있으면 돈놀이, 즉 도박도 생긴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Herodotus)가 저술한 『역사(Histories)』에 따르면 인류 최초로 주사위를 사용하여 (돈)놀이를 한 나라도 리디아다. 서기 105년 중국 한(漢)나라 화제(和帝) 때 궁중의 물자 조달 책임자였던 채륜(菜倫)이 종이를 발명했다. 7세기 중국 쓰촨성(四川省) 지역의 한 상인은 고객들이 무거운 동전을 들고 다니지 않도록 고객들의 동전을 자신이 맡아서 관리하고 대신 이에 대한 청구권을 증빙하는 종이 수표(claim check)를 발행했다. 사람들이 이 수표를 이용하여 상거래를 한 것이 지폐의 효시라고 여겨진다. 정부가 발행한 세계 최초의 종이 화폐는 10세기 무렵 중국 송(宋)나라의 교자(交子)이다. 북방의 요(遼)나라 등과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던 송나라 정부에서 전쟁 비용을 충당할 목적으로 대거 발행하여 전국적으로 유통시켰다. 송나라는 교자의 위변조를 막기 위해 2~3년마다 한 번씩 새로운 교자를 발행했다. 구형 교자를 신형 교자로 교환하지 않는 경우 구형 교자의 화폐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중국의 지폐 기술은 이후 13세기에 마르코 폴로(Marco Polo)에 의해 유럽으로 전해졌다.
최근의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도 예외 없이 지급 결제 환경을 격변시키고 있다. 디지털 전환기에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화폐(M0)와 이를 기반으로 민간 은행 등이 제공하는 화폐로 구성되는 이중통화제도(dual monetary system)는 어떻게 진화할까? 참고로,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는 스테이블 코인(stable coin)과는 전혀 다르다. 스테이블 코인은 다른 통화(another currency)나 증권(financial instrument)에 가치가 페그(peg)되어 있는 탈중앙화 암호화폐이다. 반면,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는 중앙은행 화폐, 즉 M0를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하여 암호화 및 디지털화한 것이다. 향후 중앙은행의 디지털 화폐는 어떻게 설계되고 운용되어야 할까? 이 글에서는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 (centeral bank digital currency, CBDC)의 현황, CBDC 종류, 잠재적 효익과 비용 등을 간략하게 살펴본다.
2023년 3월 기준 최소한 87개 국가에서 다양한 형태의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를 시험하고 있다.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를 시험 중인 87개 국의 국내총생산(gross domestic product, GDP)을 모두 합치면 전세계 GDP의 90%를 넘는다. 먼저 동 카리브해 인근 국가들에서 시도 중인 계좌 기반 모형을 살펴보자. 앤티가 바부다(Antigua and Barbuda), 앵귈라(Anguilla), 도미니카 연방(Commonwealth od Dominica), 그레나다(Grenada), 몬트세렛 (Montserrat), 세인트 키츠 네비스 연방(Federation of Saint Kitts and Nevis), 세인트 루시아(Saint Lucia), 세인트 빈센트 그레나딘(Saint Vincent and the Grenadines) 등의 동카리브 국가들은 소비자들이 동카리브 중앙은행(Eastern Caribbean Central Bank, ECCB)에 직접 디지털 예금계좌를 만드는 DCash 방식을 도입했다. 이 모형과 정반대되는 유형이 중국의 e-CNY다. 중국은 민간은행들이 자체적으로 디지털 화폐 계좌를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 선수촌에서 시험적으로 e-CNY를 시행한 바 있다. 유럽중앙은행(European Central Bank, ECB)의 개념 모형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ECB는 허가를 받은 금융기간들이 블록체인 네트워크에서 노드 (permissioned node)로 작동하면서 디지털 유로화를 유통시키는 도관(conduit) 역할을 하는 방식을 검토 중이다. 자마이카(Jamaica)가 2022년 6월에 도입한 JAM-DEX는 법정통화(legal tender)로 공식 비준 받은 최초의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이다. 블록체인 기반인 바하마(Bahama)의 Sand Dollar나 동카리브 국가들의 DCash와 달리 자마이카의 JAM-DEX는 블록체인 기반이 아니다. 따라서 JAM-DEX에는 스마트 계약(smart contracts)이나 국가 간 지급 결제 (cross-border payments) 기능이 없다. 나이지리아는 2021년 아프리카 국가 최초로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인 eNaira를 발행했다. 모바일 지급 결제 서비스인 음페사(M-Pesa)를 통해 금융 결제 네트워크를 구축한 아프리카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디지털 화폐에 대한 수용성이 높다. 이 밖에도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연합은 디지털 화폐를 공동으로 발행하여 각 나라 국내 뿐만 아니라 양국 간 지급 결제에도 활용하는 방안(Project Aber)을 고려 중이다.
각 국의 중앙은행들이 CBDC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다양하다. 첫 번째, 1950년 대에 신용카드가 도입된 이후 현금 사용량이 꾸준히 감소하고 있고, COVID-19 이후 위생 문제 때문에 사람들이 현금을 직접 주고받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유럽중앙은행에 의하면 유럽의 2021년 현금 사용액은 2014년에 비해 3분 1 가량 감소했다. 노르웨이에서는 현금으로 결제되는 비중이 전체의 3% 정도에 불과하다. 두 번째, 디지털 자산에 대한 관심이 폭증한 것도 큰 원인이다. 영국에서는 성인의 10% 이상이 디지털 자산을 보유한 적이 있다고 조사되었다. 디지털 자산은 가치 측정 수단으로서의 법정 통화의 위치에 대해 잠재적인 위협이 된다. 디지털 자산의 보유를 막을 수 없다면 중앙은행이 디지털 화폐를 발행하는 것이 대안이다. 세 번째, 디지털 화폐는 해외 결제를 적절하게 관리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지급결제시장에서 중앙은행의 역할을 제고할 수 있다. 신용카드와 간편 결제 등이 등장한 이후 지급결제 시장에서 중앙은행의 역할이 크게 축소된 것이 사실이다. 중앙은행 입장에서는 디지털 화폐를 통해 지급결제 시장의 혁신을 주도하는 전략적 위치를 선점하고, 궁극적으로 그 역할과 위상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 네 번째,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는 스마트폰을 통해 금융 소외 계층을 포용하는 기능을 할 수 있다. 2016년 기준 미국에서 은행 계좌를 보유하지 않은 성인인구는 전체의 5%에 지나지 않았지만, 전세계적으로는 16억 명 정도가 여전히 금융서비스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스마트폰을 통해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적극적인 금융포용(financial inclusion)정책의 일환이며, 궁극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에게 금융서비스를 이용할 기회를 제공하여 금융 소외 계층의 금융 접근성을 높일 수 있다.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가 널리 쓰이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전문가들도 많다. 중앙은행 화폐가 디지털화 된다는 것은, 곧 개인의 화폐 보유가 모두 추적 가능해지고 궁극적으로 조세 당국이 세금을 부과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2023년 9월 3일 일본은행의 발표에 따르면 일본 노인들이 장롱에 보관하고 있는 이른바 “단스(タンス, 장롱) 예금” 규모가 107조엔 (원화로 970조 원) 가량에 달했다. 일본의 상속세율은 55%로 전세계에서 가장 높다. 일본 재산가들은 상속세를 줄이고 조세 당국에 재산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장롱에 현금을 보관하는 경향이 있다. 5만원권 발행 이후 환수율이 매우 낮은 우리나라도 상황은 비슷하다. 자금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현금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디지털 화폐를 적극적으로 이용할 가능성은 낮다. 디지털 화폐의 전산 하부구조(IT Infrastructure)와 기술적인 안정성도 여전히 의문시된다. 예컨대, 동카리브 연합의 DCash는 2022년 1월부터 2개월 가량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블록체인 기반의 새로운 지급결제 하부구조(payments infrastructure)를 만드는 것도 난관이다. 블록체인 트릴레마(the blockchain trilemma)는 이더리움의 창시자인 비탈릭 부테린(Vitalik Buterin)이 주창한 개념으로, 현재의 기술로는 블록체인이 탈중앙성(decentralization), 보안성(security), 확장성(scalability)의 세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다양한 난관 때문에 캐나다 중앙은행은 현재로서는 디지털 화폐의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고 잠정적으로 결론 내렸다.
중국의 사례를 통해 구체적인 활용방안과 시사점을 살펴보자. 중국의 중앙은행인 중국인민은행(People’s Bank of China, PBOC)은 민간은행들과 협업하여 디지털 화폐 계좌를 유지 관리하고 있다. 2019년 PBOC는 앱과 전자지갑 기반으로 결제하는 e-CNY 시스템을 시험하였다. e-CNY 시스템의 장점은 금융 포용성(financial inclusion)이다. 중국의 서부 시골 지역은 여전히 금융 발전이 더디고, 중국의 낙후 지역에는 은행 계좌가 없는 사람들도 많다. 은행이 없는 금융 낙후 지역에도 스마트폰과 인터넷은 보급되어 있다. e-CNY는 스마트폰을 통해 디지털 지갑을 다운로드 하여 사용하는 방식이므로 은행 계좌가 없이도 이용할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다. 디지털 화폐에 기반한 금융 거래는 모두 실시간으로 추적 가능하므로, e-CNY는 고객확인제도(know your customer, KYC) 활성화에도 도움이 되고 일정 부분 금융 사기를 예방하는 데에도 효과적이다. 중국에서는 최근 e-CNY를 활용하여 소외 계층에게 정부 보조금을 지급하여 행정 비용을 줄이려는 시도도 활발하다.
본 글에서는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의 가능성과 한계, 실제 구현 사례, 각국 중앙 은행의 대응 방안 등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디지털 화폐의 미래를 지금 재단할 수는 없다. 디지털 화폐를 구현하기에는 기술적인 어려움과 제도적인 불확실성이 상존하는 것이 현실이다. 샤딩(sharding), 작업 증명(proof of work, PoW) 방식 개선, 2중 구조(layer-2 chain) 등을 활용하여 블록체인의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있으나 어떤 방식도 블록체인의 한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한다. 토머스 뉴커먼(Thomas Newcomen)의 증기기관을 개량한 제임스 와트 (James Watt) 수준의 기술 진보가 없으면 블록체인은 널리 활용되기 어려울 듯 하다. 한편, 민간은행의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디지털 화폐를 발행하고 낙후 지역에 대한 금융 포용 정책이나 취약 계층의 보조금 지급에 활용하는 중국의 사례도 적극 참고할 필요가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의 Project Aber 사례처럼, 우리나라와 국제 결제가 빈번한 국가들과 공동으로 디지털 지급결제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은 경제 주체들의 금융 비용을 낮추는 측면에서 매우 바람직하다.
디지털 화폐가 미래의 경제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바다 거북이가 오래 사는 것은 천천히 움직이기 때문이다(“The giant tortoise lives longer than any other animals”). 바다 거북이의 생존 전략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가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를 서둘러 도입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인 소견이다. 디지털 화폐에 관해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에서 발간한 『Money and Payments: The U.S. Dollar in the Age of Digital Transformation』 제하의 연구 보고서를 참고하시기를 권한다.
※ 이 글은 KISO저널https://journal.kiso.or.kr/ 제52호 <국내외 주요소식>에 실린 안용길 서울과기대 경영학과 교수의 글(‘중앙은행 디지털 화폐’의 현주소 | KISO저널)을 재인용했습니다.
글 안용길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경영학과 부교수
발행 KISO저널 제5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