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종일 <<장성택의 길>>
'황금방울새'를 쓴 도나 타트라는 작가는 책 12권을 같이 읽는다는데 나는 2권을 함께 읽는다. 1-재미있는 책, 2-재미없는 책. 이 책은 단연 재미있는 책이다. 이번 주 휴일엔 '장성택의 길/신정의 불온한 경계인'을 읽었다.
흔히 우리나라 언론에서 북한에 대해 보도할 때 자주 쓰는 말이 '2인자' '온건파'라는 단어다. 하지만 정부 관계자들은 단연코 북한에 2인자나 온건파는 없다고 진단한다. 북한 독재 체제가 결코 2인자를 용인하지 않을 뿐더러 최고통치자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온건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다만 김정은의 선택과 필요에 따라 '온건한 역할'을 수행하는 '고위직'이 있을 뿐.
만약 장성택이 살아있었더라면 2인자에 준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점에서 장성택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고 있었다. 장성택의 북한 체제에 대한 문제 의식과 발언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이 인내할 수 있는 비등점 언저리를 오갔다. 종내 죽음으로 치닫는 장성택과 그 주변인의 심리, 북한 내부의 정세를 저자 라종일 교수는 국정원 차장을 지냈던 경험과 정보력을 토대로 생생하게 묘파한다. 책 분량이 주석빼고 270페이지 정도 되는데 술술 넘어간다. 사회과학분야의 '페이지터너(page-turner)'다.
저자가 분석하는 장성택의 죽음 이유는 대략 세 가지. 우선 김정은의 아버지 김정일의 엽색행각에 장성택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연루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김정은은 장성택을 '채홍사' 정도로 인식했을 수 있다. 김정은은 생모 고영희를 통해 김정일과 장성택의 성적 일탈을 전해 들으며 반감을 키웠을 것으로 보인다. (장성택은 남한에 온 적이 있는데, 이때도 남한 관계자들에게 룸살롱을 가자고 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좀 과하긴 과하다. 곤란한 요청을 받은 우리 정부 관계자는 '한국 기자들이 룸살롱으로 찾아올 수 있다'며 장성택을 설득했다고...)
또 하나, 장성택은 실제로 북한 주민들의 삶의 질에 관심이 많았고, 술을 먹으면 북한 주민들의 기근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몹시 슬퍼했다고 한다. 장성택은 확실히 외부를 향한 개방, 내부에 대한 개혁에 일정 정도 의지가 있었다. 심지어 장성택은 김정은을 상대로 개방과 개혁의 불가피성을 설득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마저 갖고 있었다. 문제는 김정은의 계획엔 '개혁과 개방'이 없었다는 거다.
끝으로, 장성택은 북한 지도층이 가지기 힘든 '인품'을 가지고 있었다. 왕의 사위, 부마였기에 가질 수 있었던 '여유'도 있었겠지만 장성택은 대학생 시절부터 리더십이 있었고,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아 주변의 신망이 두터웠다고 한다. 주변에 사람이 모일 수 밖에 없었고, 반대로 정적들에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 정적 대열의 마지막엔 김정은이 합류한다.
책에는 장성택에 대한 시각을 교정해주는 에피소드들이 적지 않다. 장성택이 결혼 직후 소련 모스크바에 거주하던 시절, 스탕달의 '적과 흑'을 읽었다는 대목이 의미심장하다.
장성택이 '적과 흑'의 주인공 쥘리엥 소렐을 보며 동병상련, 더 나아가 앞으로의 운명을 예감했을지 모른다는 흥미로운 짐작이다. 가난한 목재상의 아들 소렐은 신분상승을 꿈꾸며 귀부인을 유혹하지만, 끝내 사형에 처해진다. 다만 소렐은 법정 최후 진술에서 "배심원으로 농민 하나 보이지 않고, 분개한 부르주아만 있다"며 프랑스 혁명이후에도 강고한 신분 체제와 사회 질서에 저항했지만, 장성택은 최후 진술의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체제를 지근거리에서 바라보면서도 북한 주민들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한 몇 안되는 고위층 장성택은 어떤 최후 진술을 남기고 싶었을까..
참고로, 장성택의 죽음에 대해 장성택의 아내이자 김정은의 고모인 김경희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도 책에 나와있다. 궁금한 분들은 꼭 사서 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