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세습>>
능력으로 한 인간을 평가하는 것은 정당한가? 한국 사회가 제시하는 답안은 '그렇다'에 가깝다.
그렇다면, 아예 지능지수가 160 이상인 사람만 최고위 공무원(혹은 제법 괜찮은 직업인)이 될 수 있는 사회는 어떠한가. 대기만성형 인재도 걱정할 필요없다. 모든 사람은 5년에 한 번씩 지능검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머리만 좋다면 언제든 구제받을 수 있으니 불이익 걱정은 안해도 좋다.
사실 이 가정은 '능력주의'라는 말을 처음 고안해낸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예측한, '2034년 능력주의가 만연한 영국 사회'의 살풍경이다. 마이클 영은 <<능력주의>>라는 소설에서 능력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가리켜 슬프고 허약하다고 말한다.
마이클 영의 소설이 출간된 시기는 1958년. 마이클 영의 우울한 상상은 60여 년이 지나 현실이 되고 있다.
예일대 로스쿨 교수 대니얼 마코비츠의 <<엘리트세습>>에 따르면 능력주의의 토대는 허약하고, 그 결과는 사회 구성원 모두를 패자로 만들어 슬프다.
대니얼 마코비츠는 이 책의 서문에서 ‘실력대로 공정하다는 능력주의는 속임수’라고 말한다. 능력에 따라 부와 권력, 지위를 얻는다는 능력주의 사회의 서사는 직위를 물려주던 세습 귀족 사회의 대항 서사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능력은 엄연히 세습의 결과다.
미국에서 학업 적성 시험(SAT)을 대학입시에 도입하던 20세기 중반, 능력주의가 처음으로 뿌리를 내리던 그 무렵만 하더라도 능력주의는 특권의 대물림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었다. 명문대학 동문 자녀를 명문대에 입학시켜주던 관행이 줄어들었고, 평범한 가정 출신의 고등학생이 좋은 SAT 성적을 받아 하버드대학에 들어간 뒤 종국엔 노벨상을 수상하는 사례도 나왔다.
하지만 능력주의 용광로에서 만들어진 신흥 엘리트 계층은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방법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기 시작했다.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교육을 통해 인적 자본을 물려준 것이다.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는 ‘마태효과’는 능력주의 시대의 생존 기술에도 적용된다. 상위 엘리트 계층 자녀는 학업 능력은 물론이고 정서적 역량(개방성, 자신감, 절제력, 투지)까지 중산층 아이가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앞서가고 있다. 게다가 인적 자본의 상속은 증여세와 상속세마저 면제된다. 대니얼 마코비츠는 엘리트 계층의 경우 교육을 통해 물려주는 인적자본 가치가 1,000만 달러에 달할 것이라 추산하는데 이 돈이 아무런 세금없이 상속되는 것이다.
특히 상위 엘리트 계층 자녀가 입학하는 명문대학은 기부금은 물론이고 조세지원을 비롯해 막대한 공적 자금 지원을 받는다. 결국 중산층과 그 자녀가 마련한 재원이 엘리트 계층의 교육에 투입되는 역설이 발생한다.
인적 자본을 소유한 사람은 노동을 병행하지 않으면 인적 자본에서 지대를 뽑아낼 수 없다. 엘리트 계층의 자녀는 직업 시장에 진입한 후에도 과도한 노동시간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신분 상승의 대가로 강도 높은 노역형을 선고받은 셈이다. 더군다나 현재 엘리트 계층의 자녀 교육은 끊임없는 군비 경쟁과도 같다. 엘리트 계층은 자신의 자녀가낙오하지 않도록 막대한 교육비를 투입해야 하고 이를 위해 무자비한 자기 착취와도 같은 노동을 지속해야 한다.
중산층은 엘리트 계층 진입이 좌절되더라도 적정한 수준의 교육과 적절한 직업으로 적당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20세기 중반만 하더라도 중산층의 꿈은 현실이었다. “모든 고용인이 생산직에서 최고 경영자에 이르기까지 쭉 이어진 연속체를 이루었고, 고용인 각각의 직무는 옆 사람과 매우 비슷했다. 중간 관리자 군단은 독자적으로 생산을 조율할 수 있었으며, 부담과 책무 뿐만 아니라 회사 경영에서 얻은 소득까지 공유했다.”
현재의 노동 시장은 그것마저 허용하지 않는다. 기술 발전은 중간 숙련도급 중산층 근로자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있다. 기술 혁신으로 엘리트 중역이 거의 모든 기업 내 부서와 개별 근로자의 업무와 근태를 순식간에 파악하고, 감독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우버의 경우 극소수 관리자들이 얼굴도 본적없는 수십만 운전기사를 관리한다) 기술이 중간 숙련 근로자에게서 관리 기능을 앗아갔고, 반대로 기업 중역에게는 엄청난 보상을 안겨주고 있다.
금융 분야 변화도 중산층 근로자를 압박하고 있다. 경영에 개입해 주주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행동주의 투자자’들은 경영진에게는 경제적 보상을 당근으로 제시하면서 노동자들에게는 가혹한 채찍(정리해고를 비롯한 비용 절감)을 휘두르고 있다.
대니얼 마코비츠는 노동시장의 양극화 현상이 미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본다. 미국에서 유독 초고도 기량에 대한 경제 수익률이 높다는 주장이다. 미국은 엘리트 계층에 대한 교육을 집중하는 반면 독일은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보편적 교육을 제공하는 방식을 고수한다. 또 미국 기업은 고숙련 근로자의 작업이 유리하도록 공장과 기계에 자본을 투자하지만, 독일 기업은 미숙련 근로자나 중간 숙련 근로자가 대다수인 부문에 새로운 자본을 투입한다. 자본 투자는 혁신으로 이어지게 마련인데 엘리트 계층에 편향적인 혁신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이 혁신은 또 다시 배타적 교육을 받은 엘리트 계층에게 유리한 작업, 기술, 고용 환경을 만든다.
능력주의는 중산층을 사회적, 경제적 혜택에서 철저하게 소외시키며, 동시에 엘리트 계층을 파괴적인 경쟁으로 끌어들인다. 대니얼 마코비츠는 이런 사회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보는데, 파국의 징조를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비대한 금융 부문이다. 엘리트 계층과 중산층 사이 불평등이 심화하자 금융공학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증가했고, 금융 산업이 빠르게 성장했다는 것이다. 금융공학의 타깃은 중산층이다. 중산층 가구가 임금 정체로 소득을 잃자 그 격차를 메우기 위해 대출이 크게 늘어났고, 중산층의 채무가 소비를 떠받치는 현상이 나타났다.(잔인하게도, 중산층에게 대출 빚을 안겨준 금융 상품의 개발자들이 월가의 엘리트 계층이다) “20세기 중반 미국인의 생활 수준은 소득을 통해 유지되었고, 유럽 중산층의 생활 수준은 정부의 재분배를 통해 뒷받침된 반면, 현재 미국 중산층은 갈수록 대출받은 돈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는게 대니얼 마코비츠의 진단이다.
저자의 주장에 대해 독자는 결국 이 질문에 가닿을 수밖에 없다. 능력주의를 뛰어넘는 새로운 사회계약을 우리는 상상할 수있을 것인가? 대니얼 마코비츠는 능력주의 위계 질서를 해체하기 위한 방법으로 두 가지를 제시한다. 우선 부유층 자녀의 최고급 교육에 집중하는 교육방식은 개방되고 포용성을 가져야 한다. 둘째, 엘리트 근로자에게 집중된 생산이 중산층에게 골고루 분산되어야 한다.
대니얼 마코비츠는 구체적이면서도 논쟁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그 중 한국 사회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몇 가지 안을 옮겨본다. 우선 교육과 관련해서는 명문대 문호를 개방해 학생 숫자를 늘린다. 엘리트 계층의 교육 경쟁을 완화시킬 수 있다. 더불어 중간 이하 계층 신입생을 일정 비율 이상 입학시키지 않는 대학에 대해서는 재정적 혜택을 주지 않는다. 노동 시장엔 중간 계층이 활동할 수 있는 직업군을 늘린다. 의사의 업무를 임상 간호사가 맡거나 변호사 대신 법무사를 양성하는 방식이다.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으로 인적 자원이 저주가 됐다는게 대니얼 마코비츠의 말인데 기실 한국 사회야말로 능력주의에 대한 숭배가 공고해지는 차원을 넘어 종교로 자리잡는 느낌이다. 전교 1등 출신 의사에게 진료를 받을지, 추천 전형 출신 의사에게 진료받을지를 무람없이 환자에게 묻는 나라다. 능력의 시원을 찾아 학창 시절을 탐사하는 이 나라에 인적 자원은 축복일까, 저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