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어른이 된다는 건, 세상은 '원래 불공평한 곳이라는 걸 알아가는 일
어느 순간부터 세상이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고등학생 때였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며, 부모의 경제적 역량과 가방끈의 길이가 자식의 성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은 순간이었다. 어슴푸레하게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실제로 몸소 이를 체감한 건 처음이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혼자 머리 싸매고 적당히 공부하면 어느 정도 성적을 올릴 수 있었지만, 고등학교는 그게 아닌 것 같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첫 성적표를 받아 든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었다. 그날 집에 가며 곰곰이 생각하니, 고군분투하며 책상에 몇 시간씩 앉아 있어도,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아니 따라갈 엄두도 나지 않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들은 이미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 수학이나 영어와 같은 핵심 과목들은 충분히 선행을 한 친구들이었는데, 나는 다른 친구들이 종종 그 친구들의 경제적 수준에 대해서 떠들어댔던 것을 기억해냈다. 시골이었지만, 그중에서는 괜찮게 사는 집안의 자제들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 한 명도 그런 류의 친구였는데, 어떻게 공부해야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지 부모에게 익히 들었으며, 그 좋은 대학이라는 것이 인생에서 보장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도 구체적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부모님 두 분 다 대학을 나왔다는 그 친구는 비록 나와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지만, 다른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대학 문턱을 밟아 보지도 못한 내 부모님 이야기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당연히 친구들의 부모님들도 중졸 혹은 공부 좀 해봤자 고졸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생각보다 캠퍼스 생활을 해보신 분들은 많았고, 그들의 자제들은 적어도 성적이라는 지표에선 나보다 저만치 앞서 나가 있는 것 같았다. 참 우습게도 나는 그때까지 부모님과 대학 진학이나 공부에 관한 얘기를 한 번도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본인들이 모르는 삶에 대해서 자식에게 얘기해줄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때 처음으로 세상이 참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지는 순전히 운에 의한 일인데, 어찌 이리 불공평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오르지 않는 성적표를 붙잡고, 불공평에 대해서 처음으로 생각했었다.
애석하게도 수능에서 원하는 만큼의 성적을 내지 못했다. 집안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터라, 재수는 꿈도 꾸지 못했고 그렇다고 시골 독서실에 혼자 앉아 1년의 세월을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받은 성적으로 그나마 가장 좋다고 말하는 대학에 진학하려 했다. 원서를 쓰기 하루 전 어머니가 평소와 다른 진지한 목소리로 나를 불러 앉혔다. 어머니는 자신이 없다고 했다. 그 비싼 등록금과 타지 생활에 필요한 생활비를 지원해줄 자신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내게 집 근처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어떻냐고 물었다. 당시 나의 성적으로 지원한다면 충분히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수준이었고, 집에서 다닐 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에, 집값 걱정도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그 말이 왜 그렇게 서럽던지. 자식이 더 좋은 성적으로 더 나은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기를 바라며 선제적으로 나서 재수를 장려하는 부모들도 많은데, 왜 나와 내 어머니는 이 얄궂은 대화를 할 수밖에 없는지. 눈물이 핑 돌다 못해, 나도 모르는 사이 복받친 서러움의 눈물이 떨어졌다. 어머니는 나를 보며 한숨만 쉬셨다.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를 원망했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어린 자식을 세상에 남기고 떠난 아버지가 처음으로 원망스러웠다. 그것이 성인으로서 내 삶의 시작이었다. 어느 재수학원이 좋은지를 고민하는 친구들을 보며, 나는 끓어오르는 부러움을 참아내기 어려웠다.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믿는 바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나밖에 믿을 수 없었다. 자식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은 어머니가 오죽했으면, 나를 앉혀 놓고 그런 얘기를 하셨을까. 어쨌거나 내가 선택한 길이었다. 나를 묶어 두려는 제약에도 불구하고, 대놓고 세상은 불공정하다고 말하는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도전해보고 싶었다. 설렘이나 파릇파릇함이 가득해야 했을 신입생의 내 마음에는 그런 생각들이 가득했다.
학비는 국가의 도움과 장학금으로 어찌어찌 충족됐다. 하지만 생활비를 벌면서 공부를 한다는 게 여간 쉽지 않았다. 주독야독으로 대학 생활을 보내도 괜찮은 회사에 입사하거나 전문가 집단에 들어가는 것이 어려운 이 시기에, 주경야독할 수밖에 없다는 건 그만큼 감내하고 포기해야 할 것이 많음을 의미했다. 잠을 줄였고, 입고 먹는 것을 줄였다. 그래도 늘 부족하고 아쉬웠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전공 서적이 얼마나 비싼지. 어떻게든 더 싼 방법으로 전공 서적을 사려고 아등바등할 수밖에 없는 심정을. 매 끼니를 학식으로만 때워도 빠듯한 한 달 살림을. 시험기간에 한 자라도 더 공부하고 싶은 굴뚝같은 마음을 뒤로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갈 수밖에 없어, 아쉬움을 뒤로하고 도서관을 떠나야 했던 그 심정을. 방학은 오로지 돈 버는 기간으로만 할애해야만 하는 그 심정을. 애초에 부모가 뒷바라지해 줄 수 없음을 잘 알기에, 장기간의 시간과 비용이 요구되는 시험은 꿈도 꿀 수 없는 그 심정을. 주머니 사정 때문에, 피어오르는 연애의 감정을 애써 눌러야 했던 그 심정을. 무언가를 배우려 해도 비용을 먼저 계산할 수밖에 없는 심정을. 유학은 가진 자만의 권리라고 치부할 수밖에 없는 심정을. 그리고 이를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하며, 젊으니까 괜찮다고 스스로 최면을 거는 참담함을. 겪어 보지 않음 사람들은 모른다.
취업을 준비하며, 내가 내 생각만큼 훌륭한 사람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비가 내리는 날이었는데, 밖이 보이는 카페에 앉아 저렴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다. 노트북 화면에는 서류전형 결과 탈락이라는 문구가 떠 있었다. 잘 참아온 울분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누가 더 좋은 학교 안 가고 싶어서 안 갔는가. 누가 학점을 더 쌓고 싶지 않아서 쌓지 않았던가. 누가 전문 자격시험에 도전하고 싶지 않아서 안 했던가. 누가 더 공부하고 싶지 않아서 안 했던가.. 그런 아쉬움과 섭섭함이 새어 나왔다.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낼 수 없는 마음이란. 오아시스 없는 길고 긴 사막을 걷는 기분이었다. 세상은 참 냉정하다 못해 불공평한 곳이구나. 쓰린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세상은 너무도 불공평하다고 말하고 다녔다. 나와 가까운 사람을 만날 때면, 구구절절이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아마도 나를 정당화하고 싶었고, 내가 얼마나 모질게 살았는가 누군가 알아주길 바랐다. 하지만 사람들은 크게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그저 상식 수준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인정하는 정도였다. 나와 비슷한 배경과 경험을 공유한 이들도 크게 관심을 두고 들어주진 않았다. 내가 바랬던 더 깊은 수준의 공감과 그를 통한 치유는 없었다. 심지어 가족과 친척들도 내가 신파극 조로 말하는 불공평한 세상 이야기에 크게 동조하지 않는 듯 보였다. 나는 아리송했다. 이토록 불공평한 세상인데, 왜 사람들의 반응은 거기까지인지.
불공평하다는 인식이 극에 달했던 취업 준비 기간을 지나왔다. 여전히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20대 후반이 된 지금까지 겪어온 불공평도 있었지만, 나의 이야기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불공평이 세상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사람이 밥을 벌어 먹고 사는 대부분의 곳에 불평등이 자리하고 있다. 한 국가만의 현상이 아니며, 전 세계에 자리한 담론이다.
불공평에 관련된 더 많은 삶의 모습을 알게 됐지만, 이전처럼 사람들에게 힘주어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고 말하진 않는다. 내 이야기를 들었던 그들처럼, 인식적 수준에서의 불공평을 말하는 수준이다.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데 익숙해진 것일 수도 있고, 어쩔 수 없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힌 것일 수도 있고, 둘 다일 수도 있다. 매일 뜨고 지는 해가 놀랍지 않듯이, 짧은 하루가 아쉬워도 하루의 시간을 늘릴 수 없듯이, 불공평은 내게 다가왔다. 과거의 내가 가엾으면서도, 나 역시도 불공평이라는 인간사 거대 담론의 한 예시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고, 더 큰 박탈감과 비상식을 감당하며 살아낸 사람들도 발에 치이게 많다.
어떤 현상을 보고, 그건 원래 그렇다고 말하는 건 책임감 없는 말이라 생각했었다. '원래'라는 표현은 설명의 가능성과 고뇌의 필요성을 묵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공평한 세상에 대해서는 원래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제일 적합한 것 같다. 그렇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다. 사회적 재화를 나누는 기준을 초월적 신이 정량적 지표를 기반으로 무소불위의 기준을 만들지 않는 이상, 세상은 불공평하다. 자본주의라는 체제는 그저 그 불공평함을 효율성이라는 이름에 숨겨 극대화할 뿐이다. 내가 어떤 교육 수준, 외모, 재산, 종교, 국가, 인종을 가진 부모 밑에서 태어날지는 순전히 임의로 결정된다. 그게 한 인간의 생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에도 불구하고 선택은 임의다. 그 부모 밑에서 내가 어떤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날지도 미지수다. 그게 우리 생의 시작이고 핵심이다.
임금 상승률이 자본에 대한 이자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건 지나가는 개도 알고 있다. 애초에 배우지 못해 좋은 학력과 기술을 가지지 못한 자는 큰 요행일 일지 않는 이상 쳇바퀴 돌 듯 가난과 가난을 돌뿐이다. 주식과 부동산은 장기적으로 끊임없이 상승해왔고, 그 안에서 애초에 자산이 많았던 사람들의 자산은 빠르게 증식됐다. 빈부격차를 나타내는 지표를 보면, 자본주의가 내려앉은 현대사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자본은 자본을 낳을 뿐만 아니라, 자식에게도 대물림된다. 사회가 고도화되면서 직접 증여가 되기보단, 교육과 같은 세련된 방식으로 대물림된다. 자타공인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교라 불리는 서울대의 부모 평균 소득이 가장 높다는 것만 봐도 이해가 쉽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다. 누가 그렇게 만들어서가 아니라,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그들이 모여 사는 국가가 효율성을 전면부에 내걸면서 불공평을 가속됐다. 사람들은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말하지 않고 표출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르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내가 불공평에 대해 힘주어 말했을 때, 그들이 깊게 동조하지 않았다고 해서 불공평한 세상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그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불공평함을 체감하며 살아가고 있었을 게다. 다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인정해버리고 익숙해진 것이겠지. 자신의 직접 경험이나 주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알게 됐을 것이다.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건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것만큼이나 자명한 사실이고, 우리는 그저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뿐이라고.
열렬했던 박탈감과 섭섭함이 가신 자리에는 체념과 익숙함이 자리했다. 이 거대한 인간 세상의 특징을 바꾸는 데 생각이 미치기보다는, 어떻게 그 체제 안에 순응하여 더 나은 삶을 살까를 고민하게 된다. 당장 어떤 선택을 내리고, 어느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가야 이 불공평한 사회에서 그나마 체제의 장점을 누리며 살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어쩔 수 없는 것 앞에서 어쩔 수 있는 것을 고민하게 되는 인간의 특성은, 내게도 통용된다. 나는 이 불공평한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어른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