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제의 아침은 언제나 고요했다. 가족들이 잠든 새벽, 그는 홀로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거실 탁자 위에는 어젯밤 늦게 들어와 미처 정리하지 못한 서류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승제는 한숨을 내쉬며 그것들을 서류 가방에 챙겼다. 오늘도 긴 하루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부엌으로 향하던 승제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냉장고 문에 붙은 메모가 눈에 띄었다. 수아의 글씨체로 쓰인 메모였다.
"아빠, 이번 주 토요일에 학교 진로의 날 행사가 있어요. 꼭 와주세요."
승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미 그날 중요한 회의가 잡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내 윤희와 딸 수아가 잠든 방문 앞을 지나치며 승제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는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고 자신을 위로했다. 새한전자에서 입지는 좁아졌지만 상무로서 그의 책임은 여전히 막중했고, 회사에서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더 큰 노력이 필요했다.
회사에 도착한 승제는 곧바로 회의실로 향했다. 오늘은 그가 제안한 새로운 인사 정책에 대한 논의가 있는 날이었다. 그는 이 정책이 회사의 문화를 혁신하고 직원들의 만족도를 높일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회의는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보수적인 임원들은 이번에도 그의 제안을 강하게 비판했다.
회의가 끝난 후, 승제는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울의 빽빽한 고층 빌딩들이 그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그는 문득 이 거대한 도시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고 무력한 존재인지 실감했다.
그날 밤, 승제는 평소보다 더 늦게 귀가했다. 집에 도착하자 윤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심각해 보였다. 윤희는 수아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유는 수아의 부모, 특히 승제가 '미국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이 소식은 승제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자신의 선택이 딸에게 이런 상처를 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승제는 수아의 방문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였다. 그는 딸을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다음 날, 승제는 수아의 학교를 찾았다. 그는 딸의 담임 선생님과 면담하며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선생님은 수아가 최근 들어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한다고 말했다. 승제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무거워졌다.
학교에서 나오는 길에 승제는 우연히 수아의 모습을 보았다. 운동장 한쪽에서 혼자 벤치에 앉아 있는 수아의 모습은 너무나 외로워 보였다. 승제는 다가가 수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나타나면 오히려 수아가 더 큰 곤란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회사로 돌아온 승제는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수아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던 성공이 과연 옳은 것이었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가족의 행복을 희생하면서까지 이루려 했던 그의 꿈은 이제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밤새도록 승제는 윤희와 긴 대화를 나눴다. 윤희는 더 이상 이대로는 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가족이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떨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승제는 이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에게 한국으로의 귀국은 단순한 이주가 아닌, 그의 정체성과 꿈의 실현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승제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자신의 꿈과 가족의 행복 사이에서 갈등했다. 한국에서의 성공을 위해 그동안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였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족에게 얼마나 큰 희생을 강요했는지를 돌아보았다.
다음 날, 승제는 회사에서 또 다른 위기를 맞았다. 그의 권한이 대폭 축소되었고, 주요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점점 더 고립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동료들의 차가운 시선, 상사의 냉담한 태도, 모든 것이 그를 압박했다.
퇴근 후, 승제는 한강 변을 홀로 걸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광주에서의 어린 시절, 미국으로의 이민,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까지. 그의 삶은 끊임없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느끼는 고독과 절망감은 그 어느 때보다도 컸다.
집에 돌아온 승제는 수아의 방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흐느낌 소리에 그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가 수아를 꼭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쓰러졌다.
그날 밤, 승제는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는 끝없는 미로를 헤매고 있었다. 미로의 벽은 높고 차가웠으며,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길을 찾아 헤맸지만, 매번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듯했다. 멀리서 가족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그들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새벽녘에 승제는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났다. 그의 마음속에는 깊은 공허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추구해온 '성공'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높은 직위, 사회적 인정, 그리고 물질적 풍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위해 그가 희생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아침 식사 시간, 가족들은 여전히 어색한 침묵 속에서 식사했다. 승제는 수아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며 가슴이 아팠다. 한때 밝고 활기찼던 그의 딸은 이제 우울하고 무기력해 보였다. 윤희 역시 피곤해 보였고, 그녀의 눈에는 걱정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날 저녁, 승제는 늦게 귀가했다. 집에 들어서자 윤희가 거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평소보다 더 심각해 보였다. 윤희는 조용히 말했다. 수아가 오늘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고 한다. 더 이상 친구들의 따돌림을 견딜 수 없다고 했다.
승제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상황이 이렇게까지 심각한 줄 몰랐다. 그는 무거운 마음으로 수아의 방으로 향했다. 노크하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수아는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승제가 다가가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승제는 딸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그는 수아에게 미안하다고, 자신이 그녀의 고통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수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수아는 왜 그들이 한국에 왔는지, 미국에 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승제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결정이 가족에게 이런 고통을 안겨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수아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겠다고, 수아가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을 고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날 밤늦게, 승제와 윤희는 거실에서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가족의 미래에 대해, 그리고 지금까지의 선택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윤희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제안했다. 수아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승제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한국에서의 꿈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동시에 가족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꿈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수아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다음 날, 승제는 회사에 휴가를 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들은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근처 공원으로 산책하러 나갔다. 걸으면서 승제는 수아에게 학교에서의 일들에 관해 물었다. 처음에는 말을 아꼈던 수아가 조금씩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날 오후, 가족은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 오랜만에 함께 웃고 즐기는 시간을 보냈지만, 승제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무거운 짐이 남아있었다. 그는 이 행복한 순간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저녁 식사 후, 승제는 윤희와 다시 한번 깊은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논의했다.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 한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는 것, 혹은 현재 상황을 개선하려 노력하는 것 등 여러 가지 선택지를 놓고 고민했다.
그러나 결론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승제는 한국에서의 경력과 꿈을 포기하기 어려웠고, 윤희는 미국에서의 안정된 삶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수아의 행복이 최우선이라는 데에는 동의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견 차이가 있었다.
승제는 출근했지만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가족 문제로 가득 찼다. 회의 중에도 그의 생각은 자꾸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동료들은 그의 이런 모습을 이상하게 여겼고, 부사장은 그의 업무 태도에 대해 질책했다.
점심시간, 승제는 혼자 회사 근처 공원으로 나갔다.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먹으며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 돌아보았다. 한국에서의 성공을 꿈꾸며 돌아왔지만, 지금 그가 마주한 현실은 꿈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날 저녁, 승제는 늦게 귀가했다. 집에 들어서자 윤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수아가 학교에서 또다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몇몇 아이들이 수아를 직접적으로 괴롭혔다고 했다.
승제는 분노와 무력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는 즉시 수아의 방으로 향했지만,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문 너머로 들려오는 흐느낌 소리에 그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했다. 그는 문 앞에 주저앉아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승제는 잠들지 못했다. 그는 거실 소파에 앉아 밤을 새웠다. 그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교차했다. 한국에서의 꿈, 가족의 행복, 수아의 미래,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그를 괴롭혔다.
다음 날 아침, 승제는 윤희를 깨워 그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그는 더 이상 현재 상황을 계속할 수 없다고 말했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모색하고 싶다고 했다.
윤희는 놀랐지만, 동시에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남편을 꼭 안아주었다. 그들은 함께 수아의 방으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수아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수아는 처음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부모님을 껴안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닌, 안도와 희망의 눈물이었다.
가족은 함께 앉아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했다. 미국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한국의 다른 지역으로 이사할지, 혹은 제3의 선택을 할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결정은 쉽지 않았지만, 그들은 처음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함께' 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날 저녁, 가족은 오랜만에 함께 외식했다. 식사하며 그들은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결론은 수아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지켜보고 그때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그런 결정을 한 후에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여전했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오랜만에 보는 희망의 빛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승제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울의 밤하늘에는 별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왠지 모르게 밝은 미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승제는 오랜만에 편안한 잠을 잤다. 꿈속에서 그는 가족과 함께 넓은 들판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불확실하지만 희망찬 미래가 펼쳐져 있었다. 승제는 꿈속에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진정한 '성공'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아침이 밝아오자 승제는 새로운 결심을 하고 일어났다. 그는 이제 가족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무언가 큰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앞에는 여전히 많은 어려움이 놓여 있었지만, 이제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가족과 함께라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