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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파 Dec 16. 2024

보고서의 굴레

"보고서는 위로 한 줄, 아래로 백 줄이야."

김 부장의 이 말은 회사의 보고 문화를 완벽하게 요약하고 있었다. 위로 올릴 때는 간단하게, 아래로 내릴 때는 지나치게 상세하게. 이것이 '꼰대 왕국'의 보고 체계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보고의 굴레가 시작됐다. 아침 9시, 태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민준 씨, 큰일 났어요. 부장님이 방금 우리가 올린 보고서를 보시고······."

보고서를 열어보니 빨간색 수정 표시가 가득했다. 내용에 대한 지적이 아니었다. 모두 형식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글꼴이 왜 이래?"

"줄 간격은 또 왜 이렇게 했어?"

"여백은 누가 이렇게 하래?"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김 부장의 '보고서 교정'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보고서 작성 기본 원칙]

글꼴 : 맑은고딕 12포인트

줄 간격 : 160%

여백 : 위 30mm, 아래 30mm, 좌우 25mm

들여쓰기 : 10pt

문단 간격 : 1.5줄

강조 : 진하게만 가능 (밑줄, 음영 절대 불가)

...


"이런 형식이 다 필요한 걸까요? 보고서 내용이 중요한 것 아닌가요?"

이수진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필요하지 않았다. 내용보다 형식에 집착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게 회사의 현실이었다.

"아침부터 보고서가 이게 뭐야?"

김 부장의 고함이 사무실을 울렸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사과는 늘 공허했다.

"제발 잘 좀 하라고! 보고서도 제대로 못 쓰면서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야?"

보고서는 끊임없이 반복됐다. 매일 아침 일일 보고, 매주 월요일 주간 보고, 매달 1일 월간 보고······. 그리고 수시로 발생하는 특별보고까지.

"저기······. 부장님."

송 대리가 조심스레 의견을 냈다.

"뭡니까?"

"보고서 양식을 좀 단순화하면 어떨까요? 그렇게 하면 업무 효율도 높아질 것 같고······."

"효율? 보고서가 효율을 위한 거예요?"

회사에서 보고서는 '효율'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권위와 통제를 위한 도구였다.


점심시간, 민준은 구내식당에서 동기들과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몇 시에 퇴근했어요?"

태호가 물었다.

"새벽 2시······."

김동현의 목소리에 피곤함이 묻어났다.

"보고서 때문에요?"

"네. 부장님이 갑자기 특별 보고서를 준비하라고 하셔서······."

특별 보고. 그것은 모두를 가장 괴롭히는 존재였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지시되는, 그러면서도 완벽함을 요구하는······.

"이런 보고서를 작성하는 시간에 실제 업무를 했으면······."

이수진의 말이 민준의 가슴에 와닿았다.

회사에서 실제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고를 위한 보고'에 낭비하고 있는 것일까?


[일일 보고서 작성 소요 시간]

자료 수집 및 정리 : 1시간

초안 작성 : 2시간

형식 검토 및 수정 : 1시간

상급자 검토 후 재수정 : 2시간

최종 확인 및 제출 : 30분

...


하루의 절반 이상이 보고서 작성에 소비되고 있었다.

"이러니 실적이 안 나오는 게 당연하죠."

태호가 한숨을 쉬었다.

"실제로 일할 시간이 없잖아요."

오후에는 더 큰 폭탄이 떨어졌다.

"보고서 체계를 개선하겠습니다."

김 부장의 발표에 잠시 희망이 보였다.

하지만······.

"앞으로 모든 보고서에 대해서는 4단계로 결재받도록 하겠습니다."

"단계마다 각기 다른 형식으로 작성하세요."

"그리고 결재도장은 반드시 순서대로······."

결국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새로운 보고 체계]

1단계 : 담당자 → 대리

- A4용지 세로 양식

- 상세 데이터 첨부

2단계 : 대리 → 과장

- A4 가로 양식

- 그래프 위주 정리

3단계 : 과장 → 차장

- PPT 형식

- 요약본 추가

4단계 : 차장 → 부장

- 한 장 요약본

- 음영 처리 필수

...


"이게 말이 됩니까?"

송 대리가 탄식했다.

"같은 내용을 네 번씩이나 다르게 작성하라니······."

하지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었다. 이것이 바로 '보고의 굴레'였다.

퇴근 시간이 지나도 모두 한결같이 보고서와 씨름하고 있었다.

"민준 씨, 이거 좀 봐주세요."

이수진이 피곤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음영 처리가 잘못됐대요. 진한 회색이 아니라 연한 회색을 써야 한다고······."

말도 안 되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게 일상이었다.

밤 11시, 사무실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이제 다 됐나요?"

태호가 모니터를 보며 중얼거렸다.

"아니요. 아직 결재도장 위치를 조정해야 하고······."

김동현의 말이 이어졌다.

그들은 마치 중세 시대의 서기처럼, 형식과 절차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새벽 1시, 겨우 모든 보고서가 완성됐다.

"이게 정말 바람직한 회사 생활일까요?"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태호가 물었다.

하지만 민준은 답할 수 없었다. 이건 분명 잘못된 것 같은데, 그렇다고 바꿀 수도 없는 현실.


다음 날 아침, 또다시 보고서가 반려됐다.

"결재도장이 1mm 어긋났어요."

박 과장의 지적에 모두가 한숨을 쉬었다.

이런 게 과연 제대로 된 업무라고 할 수 있는가? 이게 회사가 발전할 수 있는 올바른 방향인가?

"띠링-“


[긴급 공지]

내일부터 새로운 보고서 양식 시행

기존 양식은 전면 폐기

새 양식으로 최근 보고서 전체 재작성 필요


절망이 밀려왔다.

그동안 작성한 최근 보고서를 다시 써야 한다니······.

"이제 진짜 한계인 것 같아요."

이수진이 눈물을 글썽였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보고 문화가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불합리한지를.

하지만 그저 견뎌낼 수밖에 없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형식으로

같은 절차를 밟으며······.

이러한 '보고의 굴레'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모두를 옥죄어 왔다.

"민준 씨······."

송 대리가 퇴근길에 말을 걸었다.

"네?"

"우리가 나중에 관리자가 되면······. 절대로 이러지 말자고요."

그녀의 말에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악순환은 반드시 끊어내야만 했다.

하지만 그날도······.

보고서를 쓰고

수정하고

또 수정하며······.

끝없는 보고의 굴레 속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다.

"띠링-"

새벽에 온 메시지였다.


[김 부장님]

"내일 아침 회의 전까지 최근 보고서를 모두 새 양식으로 변환해놓을 것“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결국 오늘도 새벽 출근이다.

"민준 씨······."

아침 일찍 출근했더니 이수진이 이미 와있었다.

"어제 집에도 못 갔어요. 모든 보고서를 재작성하느라······."

그들의 삶은 이렇게 무너져가고 있었다. 실제 업무보다 보고서 형식 맞추기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하는 현실.

"이거 보세요."

태호가 예전 보고서들을 보여줬다.


[보고서 변천사]

2023년 1월 : A4 세로 양식

2023년 3월 : A4 가로 양식으로 전면 교체

2023년 5월 : PPT 형식 추가

2023년 7월 : 한 장 요약본 의무화

2023년 9월 : 새로운 통합 양식 도입

...


"8개월 만에 다섯 번이나 양식이 바뀌었네요."

이수진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과거 보고서를 수정해야 했죠."

이건 단순한 시간 낭비를 넘어선 조직적 괴롭힘이었다. 보고서는 이제 업무가 아닌 고문이 되어 있었다.

오전 회의가 시작됐다.

"어제 지시한 보고서 재작성은 다들 끝났죠?"

김 부장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모두를 위아래로 훑었다.

"네······."

여기저기서 지친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음······. 근데 이것도 뭔가 부족한데······."

김 부장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다시 한번 수정합시다."

순간 사무실이 꽁꽁 얼어붙었다. 또다시 수정이라니.

"이번에는 색상 코드를 전부 바꾸도록 하죠."

"강조 부분은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표 서식도 새로 맞추고······."

끝없는 수정 요구가 이어졌다.

"부장님······."

송 대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서······."

"프로젝트요? 그것보다 보고서가 더 급해요! 이건 기본이에요, 기본!"

결국 모든 실무는 뒤로 밀렸다. 보고서 형식 맞추기가 그들의 최우선 과제가 된 것이다.


점심시간, 민준은 근처 식당에서 동기들과 현실을 한탄했다.

"어제는 결재도장 위치 때문에 세 번을······."

김동현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는 여백 때문에 다섯 번이나 수정했어요."

이수진도 한숨을 쉬었다.

문득 옆 테이블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우리 회사는 이제 보고서를 없앤대."

"정말? 어떻게?"

"그냥 채팅으로 주고받는대. 핵심만 간단히."

부러움이 밀려왔다. 저런 회사도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오후에는 더 황당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보고서 제출 절차를 개선하겠습니다."

김 부장의 발표가 시작됐다.


[새로운 보고서 제출 절차]

초안 작성

팀 내 검토

타 팀 상호 검토

4단계 결재

최종 승인

문서 등록

보관용 출력

스캔 후 PDF 변환

공유 드라이브 업로드

...


"이게 정말 개선인가요?"

태호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었다. 이건 명백한 퇴보였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밤이 깊어가도 보고서 작업은 계속됐다. 매일 밤 보고서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민준 씨······."

자정이 넘어 이수진이 힘없는 목소리로 불렀다.

"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는 걸까요? 이게 정말 제대로 된 일일까요?"

도저히 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모두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보고 문화가 얼마나 불합리한지를.

새벽 2시, 민준은 마지막 보고서를 수정하면서 생각했다.

'이게 과연 회사를 위한 걸까? 아니면 그저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것일까?'

그 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보고서를 쓰고

수정하고

또 수정하며······.

이 끝없는 굴레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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