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우상숭배에서 벗어나야 나를 찾을 수 있다

by 은파


“과학기술은 중립적이다.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선과 악이 될 수 있다.”

- 로버트 오펜하이머



현대 문명의 찬란한 빛줄기처럼 펼쳐진 과학기술은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한때 인류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던 많은 것들이 이제는 일상이 되었다. 의료 기술은 불치병의 영역을 끊임없이 좁혀가고, 통신 기술은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과도 실시간 소통을 가능하게 했다. 이는 마치 마법과도 같은 변화였고, 그 결과 과학기술은 현대인의 새로운 신앙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기술 숭배는 마치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 숨겨진 어둠처럼, 우리 사회의 그림자를 품고 있다. 과학기술이 모든 문제의 해결사가 될 수 있다는 맹목적 신념은, 마치 신기루처럼 우리의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한다.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 윤리적 판단의 영역까지도 과학기술의 잣대로 재려는 시도는 위험한 착각이 아닐 수 없다.

현대인의 일상은 과학기술의 그물망 속에 깊이 얽매여 있다. 스마트폰으로 시작해서 스마트폰으로 끝나는 하루, 인공지능이 추천하는 콘텐츠로 채워지는 여가 시간, 알고리즘이 중매하는 인간관계까지. 이러한 편리함의 이면에는 인간성 상실이라는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직접적인 대면 접촉이 줄어들면서 공감 능력이 퇴화하고, 깊이 있는 사고와 성찰의 기회는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과학기술 발전이 초래하는 환경 파괴와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다. 끝없는 생산과 소비의 순환은 지구의 생명력을 고갈시키고 있으며, 첨단 기술의 혜택은 특정 계층에게 편중되어 새로운 형태의 계급 사회를 만들어내고 있다. 디지털 격차는 단순한 정보 접근성의 차이를 넘어, 교육과 취업, 문화생활 전반에 걸친 심각한 불평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기술과 인간성의 조화로운 공존이다. 기술 발전이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협하지 않도록, 환경 친화적 기술의 개발과 보급에 더욱 힘써야 한다. 또한 디지털 소외계층을 위한 실질적인 지원책을 마련하여, 과학기술의 혜택이 모든 이에게 고르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이 인간의 도구이지 주인이 아니라는 점을 끊임없이 상기하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존엄성과 윤리적 가치를 침해하지 않도록 철저한 성찰과 감시가 필요하다. 이는 마치 불을 다루는 지혜와도 같다. 불은 인류에게 문명의 빛을 선사했지만, 통제되지 않으면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위험한 요소이기도 하다.

결국 과학기술은 인류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수단이어야 하며,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기술의 발전이 가져올 혜택을 누리되, 그것이 우리의 인간성과 지구 생태계를 위협하지 않도록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현대 문명이 직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현대 과학기술의 성격

과학기술은 인류 문명의 웅장한 교향곡과도 같다. 때로는 희망찬 장조로, 때로는 불안한 단조로 울리며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왔다. 마치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것처럼, 과학기술은 인류에게 무한한 가능성의 문을 열어주었지만, 동시에 판도라의 상자처럼 예측할 수 없는 도전과 위험도 함께 가져왔다.

낙관론자들의 시선에는 과학기술이 황금빛 새벽을 예고하는 여명과도 같다. 레이 커즈와일과 같은 미래학자들은 과학기술이 인류의 오랜 숙제들 - 질병, 빈곤, 환경 문제 - 을 해결할 열쇠라고 믿는다. 그들의 눈에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을 증폭시키는 현명한 조력자로, 생명공학이 질병과 노화를 정복할 마법의 지팡이로 비춰진다.

반면, 비관론자들의 렌즈를 통해 보면 과학기술은 마치 그리스 비극의 서막과도 같다. 제러미 리프킨이나 유발 하라리와 같은 사상가들은 기술 발전이 가져올 그림자 - 일자리 상실, 불평등 심화, 인간성 상실 - 를 경고한다. 그들에게 인공지능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위협할 수 있는 판도라의 상자이며, 첨단 기술은 새로운 형태의 디스토피아를 잉태할 수 있는 위험한 씨앗이다.

이러한 극단적 시각들 사이에서, 중도적 관점은 과학기술을 마치 양날의 검과 같이 바라본다. 이들은 기술 자체가 선악의 가치를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인간의 손길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고 본다. 카를 슈미트가 지적했듯이, 과학기술은 그저 도구일 뿐, 그것의 운명은 전적으로 인간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특히 하이데거의 통찰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기술을 단순히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것을 넘어, 보다 깊은 차원의 성찰을 요구한다. 그의 눈에 비친 현대 기술은 인간을 도구화하고 소외시킬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지만, 동시에 그는 기술과 인간의 공존 가능성을 모색했다. 이는 마치 불가피한 운명의 동반자와 같은 기술을 어떻게 현명하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을 담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관점들이 교차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균형 잡힌 시각이다. 과학기술은 분명 인류에게 전례 없는 번영과 가능성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위기와 도전도 초래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 양면성을 정확히 인식하고,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존엄성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미래는 마치 백지와도 같다. 과학기술이라는 붓으로 어떤 그림을 그려나갈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선택을 넘어, 인류의 존재 방식과 미래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우리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이바지할 수 있도록 지혜롭게 이끌어가야 할 것이다.

거대한 착각에서 벗어나라

현대 문명은 마치 거대한 기계처럼 과학기술의 톱니바퀴로 돌아간다. 인간은 이 놀라운 발전 속에서 자신을 만물의 영장이자 자연의 지배자로 여기며, 세상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시선은 이러한 인간의 오만함을 꿰뚫어 본다. 마치 맑은 거울처럼, 그의 철학은 우리의 착각을 비추어 보여준다.

하이데거에게 기술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물속에 잠긴 빙산처럼, 보이는 부분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기술은 인간과 자연, 세계가 서로 얽혀 존재하는 복잡한 그물망의 한 부분이다. 이는 마치 숲속의 생태계처럼, 모든 존재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를 형성한다.

'기술의 본질 사유'라는 하이데거의 제안은 깊은 호수를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표면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넘어, 그 깊은 심연에 감춰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라는 것이다. 기술을 단순히 인간의 편의를 위한 도구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그것이 세계를 드러내고 존재의 의미를 밝히는 창구로 이해해야 한다.

현대인의 가장 큰 착각은 기술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마치 고삐 풀린 말처럼, 기술은 이미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성장하고 있다. 인공지능의 발전이 보여주듯, 기술은 더 이상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삶과 존재 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하이데거는 우리에게 '세계의 말'에 귀 기울이라고 조언한다. 이는 마치 고요한 숲속에서 자연의 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 기술을 통해 드러나는 존재의 신비를 경청하고, 그 속에서 인간과 자연, 기술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인간 중심적 사고라는 거대한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는 마치 오만한 이카로스가 태양을 향해 날아올랐다가 추락한 것처럼, 인간의 교만이 가져올 수 있는 비극을 경계하는 것이다. 대신 우리는 세계 속의 한 존재로서, 기술과 자연과 조화로운 관계를 모색해야 한다.

진정한 자유와 주체성은 역설적으로 이러한 겸손한 인식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세계의 지배자가 아닌 참여자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기술과 함께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우리에게 전하는 깊은 통찰이며, 현대 문명이 직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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