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키치니 Mar 06. 2024

이름 붙인 것들에 대하여

 산책을 하다보면 너무 징그러워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어떤 것을 만난다. 한번은 아이들이 아파트를 돌며 몇 마리인지 세어보았는데 스무 마리도 넘었다. 차라리 도마뱀이나 달팽이라면 환호했을텐데 안타깝게도 그건 '벌레'다. 그것은 집게벌레같이 검은 빛깔을 번득거리며 송충이처럼 꼬물꼬물 기어간다. 몇 개인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다리 마다 노란색 점 무늬가 있다. 벌레를 몸서리치도록 싫어하는 나는 그 존재를 떠올리고 그것을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친다. 살아있는 것도 끔찍하지만 종종 밟혀 죽어 납작해져 있는 처참한 모습을 볼 때면 온몬에 털이 쭈볏쭈볏 선다. 그들을 확인하고 잘 피하기 위해 바닥만 보고 걷는 게 습관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이들이 그 벌레의 이름을 궁금해했다. 엄마 휴대폰으로 네이버 스마트렌즈를 찍어 보겠다는 걸 말렸다. 이건 네이버에 안 뜬다고 굳이 핑계를 대면서. 내 두 눈으로 그것과 비슷한 또 다른 창조물의 사진을 접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나 현지인에게 물어보면 금방 답을 얻었겠지만 사실 전혀 알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우린 그것의 이름을 몰랐다. 아이들은 그 벌레에게 이름을 붙여주자고 하더니 여러 후보들을 내놓았다. 일사천리로 '노랑발'이라는 이름을 채택했다. 타국에서 온 아이들에 의해 그것은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아이들을 따라 나도 모르게 "노랑발 조심해.", "노랑발 앞에 있다."라며 그것이 허락했는지 모를 이름을 불렀다.  


 어라. 노랑발이 나쁘지 않은 이름이었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것은 새로운 존재로 태어났다. 김춘수 시인의 말이 맞았다. 그것의 이름이 귀여운 '노랑발'이 된 이후로 우리 관계는 달라졌다. 그것을 피하던 내 몸짓은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이웃을 만난 것 처럼 때때로 자연스러워졌다. (차마 반갑다고는 못하겠다.) 추한 겉모습 외에는 어떤 방어력도 갖추지 못하여 속수무책 당하는 그들에게 연민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따금 일어나는 그들의 죽음을 조심스럽게 애도하고 웬일인지 드물게 마주치는 날에는 안부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리고 내 망막에 그들의 상이 맺힐 때 자동으로 노랑발을 부르게 되었다. 아니 그들이 없어도 노랑발이라는 이름을 통해 그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내 이름도 그 누구의 이름도 스스로가 지은 것은 없다.(개명은 예외로 두자.) 그 이름을 허락한 적도 없지만 우린 그러한 존재로 살아간다. 내가 만들지 않았지만 내 것이고 내 것이지만 내가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감히 무언가의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나의 세계 안으로 그것을 끌어들이는 행위이다. 나는 언제 이름을 붙여 보았을까. 소중한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남편과 함께 며칠을 고민하여 지은 이름, 첫 차를 샀을 때도 '올순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었다. 자신의 세계를 형성해가고 있는 아이들은 더 많은 것들에 이름을 붙인다. 나무, 꽃, 구름, 인형, 연필, 낙서하듯 그려낸 어떤 대상에 대하여도. 심지어 이름이 있는 것들에도 자신만의 이름을 붙여나간다. 그것들은 행복하겠다. 누군가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되어서. 


  사진 출처: Pixabay. Igor Magno Cabral Goiaba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자꾸 옛날 생각이 난다는 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