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머리가 갑자기 늘었다. 굳이 새치라고 표현하지 않은 까닭은 날 때가 돼서 났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렇다고 마흔 조금 넘은 나이에 백발이 된 것은 아니다. 그저 염색을 해야하나 고민할 정도로 여기저기 보이기 시작했다. 거울을 볼 때마다 한두 가닥씩 튀던 놈들이 꽤나 늘었다. 흰머리는 초대하지 않은 손님처럼 내 머리에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나이들고 있음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서 서글퍼진다. 차라리 한 쪽에 집중적으로 나면 브리치하듯 관리하기 쉬울텐데 얄밉게도 지정 구역 없이 드문드문 지저분하게 나온다.
머리에 불청객이 찾아온 다음부터 자꾸 다른 사람 머리를 보는 습관이 생겼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것 같은데 흰머리가 없네. 염색한 걸까?', '뿌염 시기가 지났네. 정수리에만 흰머리가 보여.', '흰머리가 꽤 있네. 몇 살일까.' 등 혼자 온갖 생각을 한다. 심지어 '우리 어머님은 원래 어떤 모습이실까. 우리를 만날 때만 염색하시는 걸까.' 같은 궁금증도 품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만났던 새까만 머리의 할머니들이 사실은 모두 진짜(?)가 아니었음에 일종의 배신감도 느껴진다. 그리고 누군가를 오랜만에 만나야 할 때는 다소 망설여지기도 한다. 변해가는 모습에 상대가 적잖이 당황할까 싶기도 하고 그 당혹감이 다시 나에게 전달될까봐 두렵기도 하다.
흰머리로 인해 좌절스러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사회생활을 하며 싫든 좋든 매일매일 스스로를 단장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살았는데 큰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나의 꾸밈과 흰머리는 타협할 수 없는 상반된 지점에 놓여버렸다. 게다가 염색을 결심하든 안하든 흰머리와 함께 앞으로 50년을 더 살아야한다는 사실은 절망에 가까웠다. 흰머리는 한두 가닥만 있어도 너무 돋보이는 게 문제다. 흑과 백이라니 운명의 장난같다. 분명 '흑'이 압도적 우세인데도 이기는 건 늘 '백'이다. 내가 보지 못하는 뒤통수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흑백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염색을 마음먹지 못했다. 심각성을 덜 느끼는 것인지 염색으로 머리가 상하고 빠지는 것보다 그냥 풍성한 백발이 낫겠다는 마음이다. 나이 듦에 어쩔 수 없이 염색한 머리는 결이 뻣뻣하고 색상은 어정쩡하게 보인다. 미용실을 자주 가야 하는 것도 결정이 쉽지 않은 문제다. 시간적으로나 금전적으로 꽤나 비용이 드는 문제다. 셀프 염색을 시도해 본 적이 있지만 결과물이 참담했기에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자연 염색 샴푸가 출시되었을 때 너무나 반가웠고 누구보다 기쁜 마음으로 구매했지만 그 또한 별 효과가 없었다.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이 비단 나만이 아니기를.
현재의 결론은 '흰머리에 적응하자'이다. 하지만 흰머리를 갖고 사는 것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당당해지려 노력하다가도 이따금 거울을 볼 때마다 작아지는 스스로를 잘 일으켜 세워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흰머리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방송에 나오는 분들을 보면 멋지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만약 염색이라는 것이 없어서 사람들 모두 검은 머리든 흰머리든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닌다면 어떨까하는 엉뚱한 상상을 한다. 그렇다면 나의 흰머리가 덜 어색할 수 있겠다며 생각으로나마 버둥질을 해본다. 언젠가는 나도 염색하는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조금 더 자연스럽게 나이들고 싶다. 자신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을 살고 싶다.
사진 출처 : Pixabay. Engin Akyu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