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종교는 없지만 아이들이 어렸을 때 돈보스꼬라는 이름의 성당 유치원을 다녔다. 당시 원장 수녀님께서 감사에 진심이셨는데 학부모 모임 자리에서 늘 감사의 힘과 중요성에 대하여 강연하셨고 아이들의 교육 활동에도 감사를 녹여냈으며 감사일기를 권하고 열심히 한 가정에 선물을 주시기도 하였다. 그때 처음으로 감사하는 삶이 더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 둘을 순조롭게 낳은 것, 가족이 나름 평안하게 지내고 있는 것, 두 다리 뻗고 잘 집이 있다는 것 등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에 감사하기 시작하자 마음이 좀더 단단하고 넓어졌다. 모든 일이 그랬다. 인생을 사는 데 쉬운 것이 하나도 없었음에도 본인의 노력이 있었고 또 누군가(무언가)의 도움이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나 평범한 삶을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감사할 일이 맞았다. 그러므로 나도 감사에 진심이 되었다.
당시 감사에 대한 이론(?)은 이랬다. '감사하는 마음은 주변에 좋은 에너지를 끌어당긴다. 좋은 에너지는 결국 모든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힘이 된다.' 무슨 마법도 아니고 사이비 종교도 아니지만 실제로 그랬다. 감사하니까 일이 잘 되었다고 느끼는 건지, 일이 잘 되어서 감사한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보다 긍정적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렇다고 일어나고야 말 힘든 일들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천운을 타고나서 어려움이 나만 비껴가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것들을 겪어내는 나의 자세가 달라졌을 뿐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엄마의 우울증으로 온 집안에 태풍이 일었을 때도, 직업적 정체성이 흔들릴 정도로 하는 일들이 녹록치 않았을 때도 덤덤하게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크든 작든 난관을 잘 버텼고 중심을 잃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감사의 힘이 발휘된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감사에 진심이 된 이후부터 늘 "고마워."를 입에 달고 다녔는데 그 영향을 누군가가 받았다. 두 딸이었다. 엄마 아빠에게 와 준 것도 감사한데 건강하게 태어났고 게다가 (엄마 눈으로)예쁘기까지 하니 밤마다 고백하듯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학교를 잘 다녀와준 것이 고마웠다. 밥을 먹으면 남기지 않고 잘 먹어주어서 고마웠다. 하루가 다르게 몸도 마음도 크는 것이 고맙고 아침이면 일어나 세수하고 자기 전에 양치질하는 것도 고마웠다. 물론 부모이기에 잔소리도 하고 혼을 낼 때도 있지만 그 보다는 감사를 더 많이 표현하며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덕분에 느껴진다. 감사라는 영양분을 먹고 마음도 생각도 건강한 아이들로 자라고 있음이. 두 딸도 많은 것들에 감사하며 살고 있음을.
또 다른 영향은 내가 가르치던 학생들에게 있었다. 학교에서 나는 '아주 작은 행동에도 빈번하게' 감사를 표현했다. 아침마다 학교에 와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처음 그 말에 아이들은 '도대체 뭐가 고맙다는 거지?' 하는 표정이었지만 어느새 자신들이 학교에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해했다. (멀쩡한 두 다리로 걸어서 학교까지 왔다니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인사를 할 때도 교과서를 걷어올 때도 발표를 할 때도 심지어 운동장에서 놀 때도 끝에는 모두 고맙다로 끝났다. "예쁘게 인사해줘서 고마워. 책을 걷어줘서 고마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줘서 고마워. 다치지 않고 놀아줘서 고마워." 감사를 받은 아이들은 눈빛이 달라진다. 내가 그들을 존중한 것처럼 그들 역시 나를 존중하려는 게 보인다. 선생님의 진심을 마음으로 읽고 있음을 알겠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학기가 끝날 때쯤 물어보면 선생님이 가장 많이 한 말이 "고마워."임을 안 친구들도 있고 '선생님이 언제요?'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친구들도 있다. 후자는 분명 더 많은 감사를 받아야 하는 아이들이다. 저에게 한 말인줄도 모르고 감사를 튕겨내는 것이다. 함께하는 시간만이라도 그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더 많이 해주리라.)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선생님이 계셨는지 큰딸이 학교 수업 시간에 봤다며 재미있는 노래를 소개해주었다. 노랫말이 이랬다. '그래서 감사 그래도 감사. 그러나 감사 그러므로 감사. 그렇지만 감사 그럼에도 감사. 그러니까 감사 아주그냥 감사. 그리하실지라도 감사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 이래도 저래도 감사. 매일 매일 감사 항상 감사. 쉬지말고 감사 범사에 감사.' 출처가 어디인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아무리 감사를 좋아하는 나라도 온갖 부사를 앞에 넣은 감사 폭탄에 어이없기도 하고 웃음이 절로 났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노래를 끊어 읽다보니 하나하나가 의미가 있었다. 세상에 감사하지 않을 일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주의를 요한다. 내가 생각하는 감사의 의미는 처한 상황을 수동적으로 바라보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분수에 만족하라는 말도 아니다. 더 나은 삶을 만들어 가기 위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힘이다.) 그리곤 후크송처럼 입에 붙어 나도 모르게 불러대곤 했다.
이곳에 오고 얼마되지 않았을 때 둘째 딸이 제안을 했다. "엄마, 우리 커다란 종이를 붙여놓고 거기에 각자 감사한 일을 써보면 어떨까?" 참 좋은 생각이다. 유치원 때 그렇게 쓰라고 했던 가족감사일기를 바쁘다는 핑계로 한번도 쓴 적이 없는데 드디어 미뤄놓은 숙제를 하는 것처럼 기회가 온 것이다. 그 길로 공책을 사러 갔다. 그리고 매일 잠자기 전에 그날 있었던 일을 돌이켜보고 감사할 일을 적는다. 거창한 감사가 있는 날은 거의 없다. 대부분 무심코 지나칠 만한 소소한 감사들이다. 그리고 미래를 위한 감사다. 그런데 정말 쓸 말이 없는 날이 있다. 하루종일 되는 일이 없었고 기분이 안좋았고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던 날. 선뜻 감사를 쓰기 화가 나는 날이다. 그런데 저 노래의 한 소절이 묘하게 스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 누가 꼭 내 귀에 대고 하는 말 같다. 덕분에 아직까지 감사를 잘 실천하고 있다. 그러므로 미흡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도 진심을 담아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