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미각적 취향에 대한 관찰 소견서
아내에게 물었다. "오늘 저녁은 뭐 먹을까?"
아내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음..... 깔꼼한 거?"
순간 헤어디자이너의 직업적 고충이 공감됐다. 유유히 들어와 미용실 의자에 앉은 손님이 '그냥 자알~ 깎아주세요'라고 한다면 머리가 복잡해지겠지.(단골이 아니라면)
직장인의 하루 일과 중 최대의 난관이자 고민이 점심메뉴 선택이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직장인은 알 것이다. 메뉴 선정이 자뭇 진지한 토론 혹은 노골적인 권력 다툼의 대상일 수 있다는 것을. 먹고 싶다는 욕망이 가장 본능적인 영역이니 말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본능을 최대한 보기 좋게 포장하라 배운다. 다만, 메뉴 선택이란 것이 일단 한 식당을 골라야 하는 객관식이란 점과 객관식의 가이드라인 쯤되는 우리의 단체생활 문화가 다소 엄격하다는 부분은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겠다. 아무리 포장해봐야 답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말이다. 만화 '북두의 권' 대사를 빌리자면....
"넌 이미 죽어있다." 쯤 되겠다.(...)
어느 직장이든 조직은 끊임없는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 결과물을 내놓고 평가를 받는다. 급식으로 강제 배식하지 않는 한 메뉴 선택과정 역시 그 과정을 따른다. 그리고 그 의사결정 과정의 정점에는 늘 절대 강자가 있게 마련이다. 조직의 의사결정권을 사실상 가진 자가 원하는 점심메뉴를 거부할 자. 과연 있겠는가? 있다면 미생(혹은 중생)인 본인의 입장에서 용감하다 평하고 싶긴 하나, 지혜롭다 보긴 어렵겠다. 심지어 권력자가 반드시 상사란 보장도 없으니 우리(미생들)는 그 조직의 특성과 그날 그날의 상황을 잘 살펴야 한다. 눈치는 사회생활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그러니 오늘도 대부분의 가련한 미생들은 권력의 칼날이 휘몰아치는 점심 상에서 무난하지만 상사 구미를 당기는, 탁월한 메뉴 선택으로 상사를 섬기고 후배들을 보듬는다. 점심메뉴 선택과 식사를 무난히 해결했다면 그날의 업무 중 절반을 한 것과 진배없다.(실제로도 하루의 절반인 정오가 지난 시점 아닌가?)
'오늘 하루도 무사히!'라는 절절한 마음으로 갖은 위기를 넘기며 칼퇴근했다 한들, 안심할 노릇은 아니다. 또 다른 선택의 난관. 저녁 메뉴 선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토록 바라던 주말의 메뉴 선택은 또 어떠한가? 직장인의 하루에서 반은 직장이고 반은 집이듯, 선택의 가짓수는 결코 직장과 다를 바 없다. 사실 집 또한 그런 곳이다. 부부싸움을 놀이의 한 종류로 스포츠처럼 즐기는 이들이 지구 상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의 경우 그런 이들을 본 적은 없으며, 누군가 그럴 수 있지 않겠냐고 묻는다면 헛김에 그럴 리가! 절대 그렇지 않다! 고 할지 모르겠다. 부부의 메뉴 선택이란 대게 자유를 빙자한 방임(너 먹고 싶은 거 먹어~라든지)이거나 사랑을 빙자한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이거 먹고 싶지 않니? 같은...)다. 결국 직장이나 집안이나 의사결정 과정과 그 결과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또는 후폭풍)은 시소게임과 작두 타기 사이의 어딘가인 셈이다. 행복은 둘째 치고, 최소한의 평온함 조차 이 모든 의사결정 과정과 선택, 그리고 결과(그에 따른 후폭풍도...)까지 무사히 넘어야 하는 험난한 일정이다. 이쯤 되면 기실 이불 밖은 모두 위험한 셈이다.
이쯤에서 질문 하나. 과연 나는 살기 위해 먹는 것인가? 먹기 위해 사는 것인가?
예전에 수학교육과에 재학 중인 분께 과외를 받은 적이 있다. 수학이 좋다는(나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분 말씀에 따르자면, 수학교육과 학생들은 '1+1=2'이란 단순하기 짝이 없는 수식을 두고 그 과정을 증명하고자 대학노트 한 권 채운단다. 그 두꺼운 대학노트를 말이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나 일단 그렇다고 해두자. 여기서 형이상학적인 고민이 길어져 버리면 단순 사고는 순식간에 대형 참사로 번지니 말이다. 먹고사는 문제 앞에 형이상학적 고민할 시간이란 없는 법이다. 형이하학적이고 실리적인 고민이 우선이다. 일단 먹어야 할 것 아닌가. 살기(?) 위해. 과연 아내가 말하는 '깔꼼한 거'란 무엇일까?
우선 깔'끔'하다가 아니라 깔'꼼'하다 이다. 와이프는 국어 순화 및 언어문화 융성에 기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지 않는다. 그냥 일반인 '여자'다. 지극히 평범한. 다만 일반적인 표준어 사용에 준하되, 나름의 주관과 규칙에 따라 언어생활을 영위한다. 주말이면 양손에 청소기, 먼지 떨이개 한 세트를 들고는 깔끔(!)하게 청소할 것을 또렷한 발음으로 내게 주문한다. 깔'꼼'하다는 표현은 음식을 두고만 쓰는 표현이다. 아내는 의식적이든 혹은 무의식적이든 이 두 단어를 분류했다는 뜻이겠다.
기본적인 배경이 그렇다면. 과연(!) 대체(!) 깔꼼한 음식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의 혀는 짠맛, 단맛, 신맛, 쓴맛을 느낄 줄 안다. 최근에는 매운맛, 감칠맛, 떫은맛도 사실상 미각으로 본다고 한다. 즉 깔꼼한 맛은 당연하게도 미각이 아니다. 취향이다. 아내만(80억 인구 중 누군가 쓸 수도 있지만...)의 비사회적 언어일 게다. 사회적으로 합의된 바 없는 용어이므로 사전적 정의와 일반적 상식에 근거한 연역적 추리는 불가능하다. 오로지 귀납적 추리로 판단해야 한다. 결혼생활을 포함한 5년 여의 다종 다양한 사례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의 대화 중 일부다.
"깔꼼한 거? 깔꼼한 거 어떤 거?"
"음..... 떡볶이 먹을까?"
떡볶이라. 일단 떡볶이는 깔꼼한 맛의 음식으로 포함되는 모양이다. 떡볶이는 미각적으로 강렬한 단맛과 자극적인 매운맛 그리고 온몸을 휘감을 듯한 감칠맛의 조합이다. 퍽 의외지만 깔꼼한 음식으로 분류되었다. 짠맛은 없으면 허전하나 우리가 저염식 내지 무염식을 할 일이 당장은 없기도 하고, 늘 강렬한 단맛과 매운맛에 가려지니 일단 열외다.
떡볶이의 인상에서 99.8% 정도는 지배할 법한, 정열적인 핏빛 주홍색은 깔끔한 색상이거나 아예 판단 제외 요소인 듯하다.
떡볶이 1인분 속의 깻잎과 배추 잎의 중량을 미뤄볼 때, 야채류도 별로 중요치 않은가 보다. 아삭아삭한 식감이나 상큼하고 시원한 맛과 향을 생각하면 다소 의외다.
식감은 어떤가? 푹 퍼진 떡은 쫀득쫀득하고, 어묵은 탱글탱글하다. 국물은 걸쭉하다. 전체적인 느낌은 진한 고깃국물에 숟가락 한 바퀴 크게 휘젓고 한 숟갈 떴을 때의 점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색깔만 조금 다를 뿐. 다만, 같은 고기 국물이라 해도 투명하고 쨍한 평양냉면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고로 샐러드 같은 음식에서 느껴지는 식감과 정 반대지만 깔끔한 식감으로 판단되거나 역시 판단 제외 요소일 수 있다.
떡볶이의 깔끔함 판단에는 변수도 있다. 언제나 오로지 떡볶이만 먹지 않기 때문이다. 삼겹살과 된장국이 물아일체의 경지를 보여주듯. 떡볶이와 김밥, 어묵은 삼합으로써 식욕 대폭발과 이에 따른 진공청소기급 흡입력을 발동시킨다. 각각 새우 김밥과 어묵은 나와 아내의 필수옵션이다. 나는 새우 김밥의 느끼함을. 아내는 어묵의 따끈한 국물과 칼칼함을 사랑한다.
이로써 떡볶이가 깔끔한 것인지에 대한 분석은 더더욱 요원해진다. 그냥 깔꼼한 맛이라 듣고, 여보가 먹고 싶은 음식이라 이해한다. 깔끔하게. '1+1'은 간단히 '2'다. 이걸 증명하기 위해 대학 노트 한 권을 채우고 싶진 않다. 깔꼼하지 않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