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마천루 아래의 753개 펌프들
24달러짜리 세계 수도
1626년, 어느 네덜란드인이 마나하타섬을 불과 24달러(현재로 치면 100만 원 조금 넘는 정도)에 샀다는 건 과연 무역강국 네덜란드라 끄덕일만하다. 그 땅에 건설한 뉴암스테르담과 네덜란드 사람들의 개방적 문화가 현재 뉴욕의 다양성으로 이어지는 것 아닌가? 생각해보면 '아마 그렇지 않을까?' 끄덕거릴만하다. 다만 뉴욕의 땅 속 어딘가에서 오늘도 생고생 중일 뉴욕시 교통국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런 것도 네덜란드의 영향이란 말인가라고 고개를 갸우뚱할지 모르겠다. 물론 마나하타섬을 산 네덜란드인이 이럴 줄 알았겠냐만 자뭇 뉴욕의 현재 상황이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뭐 탓을 하자는 것은 아니고 그저 지금이 왜 이모양인지 알고자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언제 우리가 우리 손자나 증손자 그리고 증손자의 증손자의 미래까지 걱정하며 행동했던가? 지금의 우리나 그때의 그들이나 최선의 선택을 한 결과겠거니 믿을 수밖에.
관광지 뉴욕과 실 생활지 뉴욕의 차이
뉴욕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마 화려한 도시 하면 떠오르는 온갖 수식어의 총집합체라 해도 충분할 것이다. 뉴욕이 미국의 수도는 아니라지만 어디 그리 생각하나. 의외로 뉴욕을 미국의 수도라 얘기하는 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된다.(하물며 UN 본부도 뉴욕에 있지 않은가?) 미국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인류 역사상 최강국 지위를 가지게 된다. 고로 자연스레 '미국=최강국' 등식이 성립된다. 소크라테스의 3단 논법은 여기에도 적용된다. 미국이 최강국이니 미국의 사실상 경제수도인 뉴욕 역시 세계 최고의 도시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뉴욕의 실제 거주민들은 뉴욕의 이런 거창한 이미지가 딱히 틀린 건 않지만, 이름에 걸맞지 않게 꽤나 후줄근한 면도 많다고 너도나도 입을 모으는 모양이다. 이를테면 무지막지한 월세 값의 방에 창궐하는 쥐떼라던지, 고구마 백만 개쯤 먹은 듯한 교통체증, 자주 끊기는 통신과 부실한 속도의 인터넷, 비만 오면 물이 줄줄 새는 지하철 플랫폼이라던지 등등 수없이 말이다. 오늘은 그 중에서 물이 줄줄 새는 지하철에 대한 이야기다.
풍차의 나라, 네덜란드
네덜란드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히딩크처럼 명장을 배출한 축구 강국이고, 풍차와 튤립의 고장이다. 또한 유럽에서 가장 영어를 잘 구사한다. 상업과 무역에 강하니 이해타산이 빠르다고 생각한다면 편견과 선입견일까. 하지만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가 있으니 바로 '간척'되겠다.
네덜란드 국토의 태반은 간척으로 일군 땅이다. 심지어 수도인 암스테르담도 간척지 위에 지은 도시다. 네덜란드란 이름도 nethe(낮은)와 land(땅)의 합성어다. 땅보다 낮다 뜻이다. 바다와 접한 데다 저지대이다. 물은 중력에 따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필연적으로 흘러드는 물을 댐과 보를 쌓아 막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고여있거나 미쳐 막지 못해 흘러들어온 물은 끊임없이 퍼낼 수밖에 없다. 풍차는 목가적인 풍경의 기념물이 아니라 짠물을 퍼내는, (당시로선 최첨단의) 자동 펌프였다. 아차 하면 마을과 도시가 물바다가 되는 상황에서 펌프시설 관리에 대한 이들의 관심은 집요할 수밖에 없다. 댐의 구멍을 손으로 막아 홍수를 막았다는 '한스 브링커'란 미국 동화가 이 동네에서 재난구조 스펙터클 블록버스터로 변모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얘기다.
불완전한 천국의 네덜란드 DNA
도시는 인간의 의지로 만든 천국이란 얘기가 있다. 단순히 추위와 눈, 비바람과 천적 따위를 피하는 것을 넘어 온갖 욕망을 실현하기 편리한 공간이란 뜻이다. 자연이 알아서 이런 공간을 만들어줄 리 만무하니 말이다. 인간은 참으로 독한 존재여서 자신이 원하는 위치라면 그곳이 어디든 기어이 거대한 회색빛 도시를 올렸다. 숲, 평야, 사막, 절벽 위, 심지어는 강과 바다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결국 완전할 수 없는 인간이 만든 천국은 역시나 불완전했고 여기저기서 문제가 터져 나왔다. 지상 최고의 도시라는 뉴욕도 예외는 아니다.
뉴욕의 맨해튼은 수백 년 전만 해도 마나하타 섬이라고 불렸다.(맨해튼이란 지명은 여기서 유래했다.) 이 숲지대에 터를 잡은 네덜란드인은 이 동네를 뉴암스테르담이라 명명하고 모피, 사탕수수, 노예(!) 무역으로 꽤나 부유한 삶을 누렸다. 옆동네 점령국 영국이 이 배 아픈 광경을 가만히 두고 볼 순 없는 노릇. 당시 가뜩이나 네덜란드와 전쟁도 벌이고 있던지라 영국은 이 지역을 점령하고자 군대를 파견한다. 뉴암스테르담 시민들이 백기 들고 항복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13일이었다. 본토의 선조들은 무려 80년을 스페인에게 개긴(?) 전력이 있으나, 고국을 버리고 기회의 땅을 찾아온 후손들은 자신과 가족의 생명 그리고 돈, 그 이상의 무언가는 없었던 모양이다. 이걸 잘 알고 있었는지 아님 두 손 두발 다든 건지 영국은 이 지역 타이틀만 바꾸곤 그대로 내버려둔다. 이른바, '자치'하도록 놔둔 것이다.
그렇게 뉴암스테르담은 지금의 뉴욕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그 '지금'이라는 시점이 100년 전을 말한다는 것이다. 뉴욕은 이미 1900년대 초반에 지금의 모습을 완성한 상태였다. 위 사진은 1921년 뉴욕의 풍경이다. 동시대의 조선사람 누군가가 몇 달에 걸쳐 뉴욕에 갔다면 그가 느낄 충격과 공포가 상상되는가. 문제는 도시도 사람처럼 생로병사의 연결고리에서 피해갈 수 없다는 점이다. 도시가 오래전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전통을 지키고 있고 그에 따른 고풍스러운 풍경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매력적인 것은 인정하지만 건물의 최고 중요한 견고함과 이용의 편리함은 응당 저하된다. 수시로 보수해야 하며 갈수록 보수할 곳은 많아질 것이고 그 난이도도 같이 올라간다. 지하라고 예외가 아니다.
멈출 수 없는 753개의 펌프
뉴욕에 지하철이 들어선 것은 1904년이었다. 지금부터 100년이 넘은 것이라 놀란다면 이르다. 뉴욕은 이미 그 시절부터 교통체증으로 민원이 발생하는, 전 세계적으로 흔치 않은 동네 중 하나였다. 지하철 건설이 옵션이 아닌 필수적인 상황. 난관 역시 필연적이었다. 지하에는 이미 로마시대부터 역사 페이지에 등장한 건축, 토목의 대선배, 상하수도가 자리하고 있었다. 도시 전역에 깔린 상하수도를 지하철 건설을 이유로 깨부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어쩔 수 없는 요소에 전쟁과 테러에 대비한 방공호 구실까지 더해져 지하철은 상하수도를 넘어 땅 밑 저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그리고 이 시설에 이제 오래되었다. 곳곳에서 물이 새고 있다. 그런데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한 모양이다.
본래 숲은 물을 잘 저장한다. 반면 콘크리트란 물질은 전혀 그렇지 않다. 회색 콘크리트 빌딩 숲들은 별도의 거대한 배수시설이 필요하다. 그래야 홍수를 예방할 수 있다. 비가 많이 내리는 곳이라면 더더욱 중요하다. 내리는 비는 족족 배수관을 따라 하수도관을 타고 허드슨강이 나나 빌딩 숲 어디론가로 흘러간다. 더러 도시 곳곳에 위치한 지하철 환풍구를 타고 흘러들기도 한다. 이 물의 최종 종착지는 지하철 정거장과 선로다.
뉴욕시 교통국에는 유수 책임 담당부서가 따로 있다. 교통과 유수(流水)가 무슨 조합인가 싶겠지만 뭐하는 일인고 하니 뉴욕의 지하철에 있는 물의 흐름을 관리하는 부서란다. 지하철에 왜 물이 흐르는가 의아하겠지만, 사실 뉴욕 지하철은 어디에선가 흘러들어오는 물을 퍼내느라 매일매일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뉴욕시는 753대의 펌프로 매일 5,000만 리터의 물을 퍼올리고 있다. 생수 1.5리터로 3,30만 병치다.
만일의 끔찍한 상상
만일 뉴욕에 전기공급이 완전히 끊긴다고 가정해보자. 펌프가 일제히 멈춘 지 불과 36시간 만이면 지하철역 하나쯤은 순식간에 물바다가 된다. 허리춤 정도 적신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스쿠버다이빙이 가능한 수준으로 아예 침수된다.
이 단계에서 막지 못하면 다시 불과 며칠 만에 뉴욕 전체의 지하철은 허드슨강의 물줄기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빠른 유속으로 인해 지하철 위의 대지가 약해진다. 만일 그때가 3월이라면 사태는 점입가경에 치닫는다. 춘절기에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얼마나 극심한가.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는 물줄기가 지하철 콘크리트 구조물과 그 위의 대지에 치명적인 위해를 가할 것이다. 그곳은 맨땅이고 약간의 잔디와 나무 몇 그루 정도가 펼쳐진 공간이라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맨해튼의 풍경이 어디 그러한가? 맨해튼은 백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수천만 톤의 콘크리트와 철근 덩어리들이 득실득실한 빌딩 숲이다. 약해진 지반은 잠시도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결국 피로의 한계를 넘어선 어떤 곳은 결국 그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을 것이다. 결국 맨해튼은 붕괴돼 사라질 것이다. 이러니 뉴욕시 교통국 사람들은 잠시도, 단 하루도 게을리 일할 수 없는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등줄기에 식은땀 한 줄기 흐를 테니 말이다. 이쯤 되면 뉴욕도 부단히 물 밑에서 발길질하는 백조 신세다.
안타까운 점은 이런 시나리오도 여러 가능한 사태의 일부라는 점이다. 당장 낡디 낡은 수도관이 곳곳에서 터지고 있다. 수도관에 흘러나온 물은 어딘가로 지금도 흘러들어가고 있다. 지하철이라고 예외겠는가. 우리가 늘 버리는 비닐봉지와 휴지, 쓰레기들도 교통국 사람들에겐 골칫덩이다. 이것이 하수도 어딘가를 막아버리면 물이 역류해 지하철로 흘러든다.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은 의외로 직접적이다. 바람이라도 거세게 불면 바닷물이 역류해 뉴욕 양키즈의 양키스타디움 인근의 터널은 물바다가 되고 만다. 불행한 것은 뉴욕 교통국이 아무리 펜대 굴려봐야 내놓을 해결책이란 게 고작 펌프 구입비와 수리비, 담당인력 예산을 늘리는 일 뿐이란 점이다. 맨해튼을 부수고 다시 올릴 순 없지 않은가?
만반의 체비를 갖추긴 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에는 아예 동력발전기를 갖춘 펌프 열차를 도입하기 이른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2003년 미국 동부 대규모 정전사태에도 지하철 침수피해는 눈에 띄게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2012년 슈퍼 허리케인 샌디는 뉴욕시 교통국의 그토록 상상하기 싫었던 꿈을 기어이 실현해주고 말았다. 지하철 7곳이 정말 꿈에서나 볼 법하게 침수되어 버렸다. 위로라고 한다면 지상이나 지하나 물 많기는 매 한 가지였단 것 정도. 뉴욕시 교통국 사람들은 아마 2012년을 끔찍이도 기억하기 싫은 해로 떠올릴 것이다.
갓 블레스 유! 뉴욕(교통국)!
오늘도 수많은 뉴욕 교통국 사람들이 뉴욕의 지하 어딘가에서 753개의 물펌프와 함께 땀 흘리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노고에 뉴욕 시민은 꽤나 많은 응원과 지원이 필요할 듯싶다. 우리야 멀디 먼 다른 나라 걱정이라지만 그들은 현실 아닌가. 최고의 백조도 폼나게 살기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참고도서 : 인간 없는 세상(앨런 와이즈면 저, 이한중 역, 랜덤하우스 코리아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