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대통령(들)의 대통령
현재 미국 대통령은 트럼프다. 트럼프는 공화당 소속이다. 그 전 대통령은 오바마였다. 오바마는 민주당 소속이다. 그 전은 조지 부시였고 공화당 소속. 그 전의 지퍼게이트 주인공, 클린턴은 민주당. 그 전은 아버지 부시는 공화당이다. 최근의 경향을 보면 공화당과 민주당은 서로 사이좋게(?) 대통령직을 주고받고 있다. 얼핏 꽤 팽팽해 보이는 패싱게임이다. 최근만 놓고 보면 그렇다. 100년 전쯤엔 양상이 달랐다. 워싱턴 D.C의 주도권은 공화당의 것이었다. 1861년 공화당은 세기의 슈퍼스타 에이브러험 링컨을 배출했다. 이 남자는 우리가 익히 아는 신화적인 이야기 끝에 비극적으로 죽었다. 공화당은 이후 반세기 동안 10명의 대통령을 배출하며 승승장구했다. 민주당은 같은 기간 동안 고작 1명의 대통령만 배출했다. '산 자는 죽은 자를 못 이긴다'는 말처럼. 민주당의 당시 위세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 1901년에 대통령직에 오른 공화당 출신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그 흐름의 한 정점으로 평가받는다. 어찌나 인기가 많았는지 1904년의 재선 정도는 가볍게 성공했다. 세 번째 대선도 노려봄직한 인기에 공화당은 거칠 게 없었다. 1912년까진 말이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두 명의 대통령이다. 우리에겐 다소 낯선 이름들인데 그들을 소개하기 위해선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질문이 필요하다. '미국 역사상 최고 대통령은 누구며? 최악의 대통령은 누구냔 말인가?' 되겠다.
우선 미국 역사상 최고의 대통령? 저마다 이견이 있겠지만, 조지 워싱턴과 토마스 제퍼슨, 그리고 저 유명한 에이브러험 링컨, 그리고 두 명의 루스벨트 정도는 이견이 없는 모양이다. 사우스 다코다 주에 있는 일명 '큰 바위 얼굴들', 러시모어산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제외한 다른 대통령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네 조각상 중 우리에게 다소 낯선 대통령이라면 아마 링컨 바로 옆에 위치한 얼굴일 것이다. 26대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함께 두 명의 루스벨트 중 한 명이며 최고의 대통령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이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두 대통령 중 한 명이다.
그럼 반대로 역사상 최악의 미국 대통령을 꼽으면 누가 있을까? 1776년 건국해서 오늘까지, 220여 년간 미국이 선출한 대통령은 45명이다. 예전 기준으로 한 반을 꽉 채운 숫자인데, 역시나 이중에도 이 영광스러운 자리(?) 노리는 무수한 인재들(?)이 있었다. 개중에는 '이 구역의 미친놈은 나요' 격으로, 무수한 업적들(?)을 순식간에 쌓고 미국을 단박에 수렁으로 보낸 몇몇 대통령들이 있다. 일단 워렌 하딩, 캘빈 쿨리지가 그렇고, 아랫도리 함부로 놀려(?) 제대로 망신당한 클린턴도 그런 식이다. 다만 이분들은 특별 우대 차원에서 나중에 따로 얘기할까 한다.(하나하나 보통 비범한 게 아니니...) 오늘은 소개할 이는 루스벨트의 친구이자 정치적 동반자이며, 불구대천지 원수이기도 했던, 역사상 최악까지는 아니나 늘 최악의 대통령 순위 상위권을 유지하는 우등생(?). 27대 대통령 윌리엄 태프트다. 루스벨트와 함께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되겠다.
양 극단의 평가로 도저히 같은 선상에서 거론될 것 같지 않은, 이 두 대통령은 사실 당시 26~27대의 전현직 대통령이었다. 심지어 비슷한 나이에(루스벨트 1858년 , 태프트 1857년), 같은 공화당 당원이면서, 심지어 직장동료(대통령-보좌관)였으며, 공사를 떠나 오랜 친구이자 스승과 제자 같은 사이었다.(루스벨트가 스승, 태프트가 제자.) 서로 상대방을 더 좋은 자리 앉혀주려고 로비하던 이들은 결국 서로 제일 좋은 자리에 앉으려고 죽자 사자 싸우는 사이가 된다. 그 제일 좋은 자리란 백악관 안에 있는, 대통령 전용 안락의자였다.
단순히 어느 동네 중년 아저씨들의 우정과 배신 가득한 단막극 정도로 끝났으면 좋았을 것을. 이 둘은 미국 전체를 무대로 한편 대선 드라마를 쓰며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바야흐로 사건사고 끊이지 않던 근현대의 미국. 격동의 1912년. 이 두 전현직 대통령들의 인정사정 볼 것 없는 진흙탕 데스매치는 가뜩이나 전쟁 같은 대선에 기름을 부어 버린다. 그것도 아주 화끈하게.
대통령 루스벨트는 1908년 1월 어느 날 태프트와 그의 아내 넬리를 백악관 만찬에 초청한다. 임기가 끝나가던 루스벨트는 자신의 후임자를 찾고 있었다. 주변의 추천도 여럿 있었지만 내심 마음은 정한 상태였다. 식사가 끝나자 루스벨트의 충직한 보좌관이자 오랜 친구인 태프트가 이렇게 말했다.
"대법원장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태프트 옆에 있던 아내 넬리는 이렇게 말했다.
"태프트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그렇게 태프트는 대통령이 되었다.
이듬해 1909년 3월 4일. 태프트는 자신이 바라던 대법원장이 아닌, 백악관 안주인으로 입성한다. 취임식날 워싱턴 D.C는 눈밭이었다. 사상 최초로 자동차 가두행진이 예정된지라 많은 이들이 도로의 눈을 치웠다. 취임식에는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다. 3월은 여기나 워싱턴 D.C나 춥긴 매 한 가지다. 이런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이 모인 건 간단한 이유였다. 루스벨트의 강력한 리더십을 이어 달라는 것이었다. 태프트를 루스벨트의 계승자로 여긴 것이다. 루스벨트의 의도도 그러했다. 루스벨트는 자신의 후계자를 축하하고자 친히 취임식에 참석했다. 두 사람은 화기애애해 보였다. 태프트는 선거인단 438명 중 321명의 지지를 받아 당선됐다. 민주당의 윌리엄 브라이언과의 유권자 득표율 차가 7% 정도인 건 좀 께름칙했지만 어쨌든 선거에서 이겼으니 신경 쓸 일 아니었다. 취임식은 연방상원 회관에서 인파의 환호 속에 잘 치러졌다. 취임식을 마치고 백악관의 안락의자에 육중한 몸을 기댄 태프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대통령이다. 그동안 너무 다른 일을 많이 해서 지쳤어."
그렇다. 태프트는 임기 첫날부터 이미 지쳐있었다.
이미 지친 태프트와 달리 루스벨트는 지칠 줄 몰랐다. 퇴임식부터 취임식까지 쉴 새 없이 달린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프리카로 사냥 여행을 떠났다. 평소 사냥에 열광한 터라 그럴 법도 하지만 다른 의도도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끊임없는 3선 출마 요구와 태프트를 루스벨트의 아바타쯤으로 여기는 평판에 대한 일종의 답변이었다. 미국을 떠남으로 해서 출마 요구도, 태프트 정부의 부담감도, 어느 정도 덜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의구심은 해결할 수 없었다. 태프트를 공화당 대선후보로 추천하고 대대적으로 지원한 건 루스벨트였으니까. 아닌 척해봐야 모두가 아는 비밀이었다.
지칠 줄 모르는 루스벨트는 소싯적부터 남달랐다. 으레 천식과 감기 같은 잔병치레로 점철된 부잣집 도련님 하면 유약한 남자를 떠올리겠지만 루스벨트는 예외였다. 신체적 병약함이 오히려 그의 도전의식을 불타게 한 모양이다. 연약한 신체를 콤플렉스로 느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복싱은 가뜩이나 안 좋은 눈에 실명을 줄 만큼 즐겼고, 틈틈이 즐긴 사냥도 퇴임 후엔 아예 아프리카로 떠날 정도로 열광했다. 여담이지만 아프리카에선 무려 코끼리, 사자, 기린, 물소 등(!)을 쓰러트리며 다녔다. 큰 사냥감을 쓰러트리며 희열을 느꼈던 모양이다.
화끈한 성격만큼이나 그가 거친 직업도 다양했다. 일단 하버드대를 졸업한 뒤 그가 거친 직업만 나열해도 다음과 같다. 카우보이, 작가 겸 역사가(38권 저술), 경찰청장, 해군장관, 군인, 뉴욕 주지사, 부통령, 대통령, 협상가(지미 카터 같은) 등등. 무수히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그를 단박에 역사의 한 페이지로 등장시킨 건 역시나 대통령 자리였다.
그가 대통령이 된 건 우연이었다. 1900년 그는 윌리엄 맥킨리 공화당 대선후보의 러닝메이트로 대선에 참여했다. 선거에서 맥킨리는 승리했고 곧 그는 부통령으로 취임한다. 그로부터 1년 뒤 맥킨리가 암살당하면서 그는 대통령직을 승계받는다. 당시 그의 나이 42세. 존 F. 케네디 전까진 역대 최연소 대통령이었다.
혈기 넘치는 데다 젊기까지 한 이 대통령은 거침없었다. 당시 미국은 거대해질 대로 거대해진 대기업들이 시장을 독과점해 그 폐해가 컸다. 독점적인 위치를 이용해 라이벌과 중소기업을 줄도산시켰고, 물건값을 마음대로 올렸다. 가뜩이나 실업자가 넘치는 마당에 여러모로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격이었다. 대기업의 전횡에 대한 불만이 거셌음에도 정치권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대기업의 넘치는 돈은 자연스레 정치권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스벨트는 셔먼 독점금지법이란 법령을 내세워 어느 대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그 어느 대기업이란 저 유명한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사였다. 오랜 소송 전 끝에 연방법원은 스탠더드 오일에게 분사 명령을 내린다. 루스벨트의 승리였다.
그렇다고 록펠러가 진 게임도 아니었다. 분사 후 기업가치가 크게 올라 록펠러는 오히려 더 큰 부자가 됐다. 그리고 미국은 독과점의 폐해에 따른 경제 위기에서 벗어났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하는 나름의 생태계를 구축한다.
파업과 집회를 반복하는 노동계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루스벨트는 인정사정없이 공권력을 투입해서 대규모 집회를 해산시켰다. 그러는 한편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법령도 통과시켰다. 양동작전이었다.
한편 밖으로는 미국의 강력한 군사력을 통해 분쟁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한다. 지금도 자주 언급되는 '미국의 세계 경찰론'의 시초였다. 다른 이름으론 제국주의였다. 우리에겐 비극이었다. 루스벨트는 다분히 인종차별적인데다 우생학까지 신봉했으며, 심지어 친일적인 인물이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그의 지시였다. 스페인으로부터 얻은 필리핀에 총독을 파견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어쨌든 미국인들 입장에선 '미국은 세다!'라고 말하는 듯한 행동들이었다. 역사상 최강국, 미국의 화려한 세계무대 등판이었다.
한편으론 자연보호 정책을 펼쳤다. 그중 압권은 단연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 설립이었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보던 시대임을 생각하면 의외이고, 그가 사냥광이란 걸 상기하면 자뭇 의아해지는 순간이다. 아무튼 그는 주요 산림자원이 함부로 개발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았다. 그리고 지금 전 세계 여러 나라들 곳곳에 국립공원들이 위치해 있다. 그걸 배운 게 비단 우리나라뿐만은 아닌 것이다.
이처럼 그가 러시모어산에서 한 자리 눌러앉은 것도, 최고의 대통령 평가순위에서 손꼽히는 것도, 다 이런 절륜한 국정운영에 기인한 것이다. 무력으로 사용할 수 없는 정치상황에서 생각이 다른 상대방을 설득하는 방법이란 온갖 협박과 회유로 절묘한 밀당을 벌이는 일뿐이다. 이런 비정한 정치판에서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루스벨트를 대통령(들)의 대통령이라 부를 수 있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결코 나눠먹기식으로, 고스톱 따먹기 식으로 인정받은 게 아니란 말이다.
루스벨트는 당근과 채찍을 쌍절곤 돌리 듯 능수능란하게 휘둘렀다. 기이한 풍경이었다. 그런 풍경을 본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당대의 굉장한 행운이다. 강력하고 능력 있는 정부란 드물기 때문이다. 미남미녀를 만나기 어렵듯이 말이다. 대중이 이런 정부에 열광 안할리 없다. 루스벨트에게 재선은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3선은 좀 달랐다. 당시 미국 헌법은 연임 제한이 없었다. 인기만 있다면 몇 번이든 대선에 나올 수 있었다. 대신 보통 두 번하면 더 안 하는 게 일반적인 관례였다(이 관습은 후에 또 다른 루스벨트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로 인해 산산조각 난다. 그는 무려 4번씩이나 했다.) 루스벨트는 끊임없는 주변의 요청과 대중의 인기에도 끝내 자신의 후임자를 찾기 시작한다. 고민 끝에 결국 관습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내심 아쉬워했다. 그의 나이는 이제 겨우 50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건, 그가 젊은 시절부터 행정부에서 일하며 알고 지내던 직장동료이자 능력있는 법조인이며, 오랜 친구인 동시에, 충직한 보좌관이었던, 윌리엄 태프트였다.
참고도서 1. 미국 대통령선거 이야기(조셉 커먼스 저, 박종일 역, 인간사랑 출간, 2009.2.28.)
2. 이런 대통령 뽑지 맙시다(네이슨 밀러 저, 김형곤 역, 혜안 출간, 2002.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