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 대통령 전쟁(2부)

미국 역사상 가장 뚱뚱한 대통령(으로 기억된 남자)

by 윤단


찰스의 확신

134938-004-4A539A97.jpg 태프트와 그의 맹랑한(?) 아들, 찰스

태프트에게는 찰스라는 막내아들이 있었다. 아홉 살 날 무렵, 꽤나 맹랑했던 찰스는 어느 일가친척과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다. 친척이 찰스에게 물었다.


"니 아버지가 대법원 판사 되는 건 어떻니?"


겨우 아홉 살짜리가 대법원이 뭐며, 판사가 뭔지 알기나 할까 싶은데, 찰스는 단호하게, 너무나도 확신에 찬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안됩니다!"


친척은 그 단호함에 의아해서.


"왜 안되는데??"


찰스는 다시 단호하게.


"어머니는 아버지께서 대통령이 되시길 원합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했던가. 막내아들마저 단호히 확신하는 분위기에서 태프트는 그토록 가고 싶던 대법원 판사 자리를 다른 이에게 양보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뚱뚱한 대통령(으로 기억된 남자)

국가의 국민은 2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자국 대통령의 후덕한 뱃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국민과 그렇지 않은 국민으로. 전자를 대표하는 경우가 독일이다. 동독, 서독의 통일이라는 업적으로 8~90년대 독일을 이끈 헬무트 콜 총리는 기골이 장대했다. 무려 196cm의 키에 몸무게는 120kg이었다. 그것도 공식적인 몸무게일 뿐 사실 더 나갔을 거란 얘기도 있다. 후자의 경우 손쉽게 우리나라를 꼽을 수 있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지금의 문재인 대통령까지 대부분 표준 체중이거나 살집이 조금 있는 수준이다. 투표로 선출된 대통령의 경우는 더 그렇다.

키 168cm, 몸무게 65kg(?)의 김영삼 대통령와 악수하는 헬무트 콜.

자국의 지도자의 몸매 보느냐의 여부는 '능력 있음 됐지 뭐가 문제냐'이거나 '아무리 그래도 한 나라의 리더쯤 돼서 몸 관리는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의 차이일 것이다. 뭐 정답은 당연히 없다. 다만 현재의 미국 은 최근 당선된 트럼프 대통령(188cm, 107kg)이 나잇살로 조금 후덕한 걸 제외하면 표준 체중 수준의 대통령을 뽑아왔다.(그저 우연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의미에서 윌리엄 태프트는 시대를 잘 타고난 인물이다. 매우 후덕했으니 말이다.

엄근진

키 182cm, 몸무게 125kg. 대통령 당선자 신분일 때, 태프트의 신체 사이즈다. 헬무트 콜 총리보다 작은 키에 몸무게는 비슷했으니 아마 더 후덕했을 것이다. 뱃살이 곧 인격이라는 옛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면, 태프트는 이미 당선자 신분일 때도 미국 역사상 가장 대인배 대통령이었다. 이런 식이면 백악관은 훌륭한 인격 수련기관이 된다. 불과 4년 만에 태프트의 몸무게를 50kg 가까이 더 불려놨으니 말이다.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풀었던 태프트는 퇴임할 때쯤 175kg에 육박했다.(당연히 초고도 비만.) 어찌나 한 덩치 했던지 목욕 중 욕조에 끼었다 구조(?)돼서 욕조를 새로 설치했는데, 그 크기가 4인 가족용이라 해도 적절할 정도였다.

문제의 그 1인용(?) 욕조

식사량과 학습량의 상관관계에 관한 연구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있었다면, 태프트는 중요 참고 사례였으리라. 식사량만큼이나 학습력도 대단했으니 말이다. 예일대 차석 졸업을 필두로 이어지는, 그의 화려한 커리어는 루스벨트 못지않다. 대략 나열하자면 변호사, 연방판사, 필리핀 초대 총독, 육군장관, 대통령, 예일대 교수, 연방대법원장 정도다. 다양함도 다양함이지만, 맡은 업무에서 거의 대부분 능력을 인정받아 요직만 두루 거쳤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여기서 '거의 대부분'이라는 표현이 들어가는 이유는 예외가 있기 때문이다. 그토록 양적으로 질적으로 화려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단지 뚱뚱한 대통령으로 기억되는 이유다. 대통령 재임 시 뭘 했는지 뇌리에 남은 게 없기 때문이다. 혹자는 대체 더 나아가 잘한 게 없다고 생각해서 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안 좋은 소린 건 매 한 가지다.

그는 대화 중에 심심치 않게 자는 버릇이 있었다. 10~15분을 자다가 깨면 대화가 이어졌다. 장례식장도,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몰려도 아랑곳없었다. 상대방의 이름도 잘 기억 못 하였다. 정치가든. 의회 의원이든, 하물며 담당 취재기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연설문도 제대로 준비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럼 임기응변이라도 좋았어야 하는데, 그는 불행희도 지독히도 연설을 못했다. 선거 유세 시절, 루스벨트의 첫째 딸 앨리스는 그의 연설을 보며 하도 웃던 나머지 맹장수술 봉합부위가 터져 재수술을 받아야 했다. 업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속달우편제와 우체국 예금제 도입, 노동부 독립, 애리조나와 뉴멕시코의 주 승격과 몇몇 외교적 성과가 그것이다. 보시다시피 우리가 아는 건, 단 하나도 없다. 여기에 끊임없이 좌충우돌하는 그의 정책과 발언들이 누적되면서 당을 떠나 수없이 많은 정적들을 양산했다. 그는 백악관에 있기엔 너무나도 안람함과 편안함을 사랑하는 이였다. 아일랜드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자신의 묘비에 이런 문구를 남겼다. 마치 태프트를 얘기하는 것처럼.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태프트는 우유부단하게 우물쭈물하다가 기어이 사단을 내고 말았다. 가장 친한 친구이자 든든한 후원자마저 등 돌리게 만든 것이다.


아주 오래된 인연(들)

3283c63a6ca54476d62b9e81a7e354c7--william-howard-taft-bullies.jpg 코끼리는 신경쓰지 말자.

루스벨트와 태프트가 서로를 알게 된 건 1890년쯤이었다. 1886년. 아내 헬렌 헤론(애칭 넬리)과 결혼한 태프트는 오하이오 주 대법원 판사 업무를 보면서 두각을 드러냈다. 벤저민 해리슨 대통령은 그를 법무 차관직으로 임명한다. 당시 루스벨트는 공무원위원회 위원이었다.(행정부 내 인사와 관련해서 부정부패를 감사하는 업무였다.) 두 사람은 자주 밥을 먹고, 산책 다니며 친해졌다. 성격 면에서 극과 극(불같은 루스벨트와 차분한 태프트)이었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1896년 태프트는 친구인 윌리엄 맥킨리 대통령에게 루스벨트를 해군 차관에 임명하도록 로비한다. 맥킨리 대통령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그를 해군 차관에 임명했고, 그가 나서서 진두지휘한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전리품으로 받은 것은 필리핀이었다. 필리핀은 독립을 원했다. 미국은 꽤 오랜 시간 필리핀과 게릴라 전을 치러야 했다. 1900년 맥킨리는 이 녹록지 않은 땅에 태프트를 파견한다. 총독 자리였다. 태프트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대통령의 딜과 아내의 성화에 짐을 싼다. 맥킨리는 그에게 대법원 판사직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가 그토록 원하던 그 자리였다.

그는 뱃살만큼이나 인덕 있는 사람이었다. '작은 갈색 형제들'을 배려해야 한다고 주장한 태프트는 총독으로 있으면서 필리핀의 부정부패를 적발, 학교 설립, 항구나 도로 같은 사회기반시설 건설에 힘썼다. 심지어 건강, 보건도 챙겼다. 예상외로 필리핀 총독 일이 나쁘지 않았는지,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가 두 차례나 대법원 판사직을 제안했음에도 태프트는 마다한다. 그러다 1904년. 필리핀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건강 문제도 생긴 차차, 전쟁 장관직을 임명받아 워싱턴 D.C로 귀환한다. 이때부터 태프트는 본격적으로 루스벨트의 대소사를 챙기는 보좌관 역할을 시작한다. 우리 근대사에서 루스벨트와 태프트가 나오는 유일한 순간이 이때와 관련 있다.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고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하는(우리리에겐 매우 불행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그것이다. 태프트는 루스벨트의 최측근 중 최측근이었다. 루스벨트는 태프트에게 대법원 판사직을 무려 세 번이나 제안했다. 태프트는 모두 거절한다. 그의 목표는 이제 대법원 판사가 아니었다.


게스트가 된 주인공

Republican-National-Convention-1908.jpg 1908.06.16.~19. 시카고 대경기장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 풍경

태프트가 공화당 후보로 확정되던 날. 그러니까 1908년 6월, 시카고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였다. 루스벨트는 갖은 노력을 다해 대의원들이 태프트를 밀도록 설득해놨었다. 이제 나머지는 태프트의 몫이었다. 태프트는 기장을 두르고 시카고 대경기장으로 입장했다. 전당대회에는 수많은 인파로 북적거렸다. 태프트는 공화당 내 유력 대통령 후보였다. 공화당 의장이던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 헨리 캐봇 로지는 현직 대통령이자 공화당 스타 정치인인 루스벨트의 이름을 거명하며 관객의 호응을 유도한다. 이때 누군가 외쳤다.


"4년! 4년만 더!!"


순식간에 장내는 '4년만 더!'를 외치는 목소리와 박수로 가득 찼다. 주인공인 태프트를 내버려둔 체. 밴드가 미국 국가를 연주하며 저지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전당대회는 루스벨트의 콘서트처럼 되어버렸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다 보니 루스벨트는 선거에 출마할 생각이 없음을 또 말해야 했다. 태프트 일가는 그 말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였고.

태프트는 702표를 획득했다. 2등 펜실베이니아 상원의원 필란더 녹스가 고작 68표에 그쳤으니 거의 10배에 가까운 압도적인 지지였다. 태프트는 여유롭게 공화당 선거 후보로 확정됐다. 태프트와 가족들에겐 기쁜 일이었다. 어딘가 찝찝한 전당대회였지만 말이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차이

447_taft_on_rooseveltrsquos_shoulder.jpg 여러분! 제 아들녀석입니다. 허허허!

이 뚱뚱하고, 둔하며, 행동 굼뜨고, 서투르며, 말 더듬고, 우물쭈물 거리던 태프트는 공화당 후보로 당선된 후에도 여전히 엉터리 같은 연설을 하며 유세를 다녔다. 그러나 역시 루스벨트의 후광은 대단한 것이었다. 태프트는 1908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제 미국이란 거대한 제국의 통수권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루스벨트와 태프트 사이에 이상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2666007.png 나, 대통령, 성공적.

대통령이 됐으니 논공행상 차례였다. 루스벨트는 당연히 자신이 최고의 수훈갑이라 여겼다. 태프트, 아니 넬리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과 자식들의 공이 크다 여겼다. 태프트는 넬리의 남편이다. 태프트는 이런 생각들을 루스벨트에게 전달한다. 만나서가 아닌 편지로. 루스벨트가 흥분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아내 넬리는 한 발짝 더 나가 신문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윌은 누구의 신세도 크게 지지 않은 백악관을 가져야 하니, 루스벨트에게도 큰 빚을 진 게 아니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루스벨트를 향한 넬리의 선전포고와 다름없었다. 한 성질 하는 루스벨트가 가만히 있을 리가. 당시 최고의 저널리스트 마크 설리번을 만난 루스벨트는 이렇게 일갈한다.


"태프트는 너무 약하다. 그의 형제들이 그를 마음대로 휘두를 것이다. 태프트의 의지와 노력 반대로 말이다."


루스벨트의 생각은 정확했다.


gty_theodore_roosevelt_ll_120213_wmain.jpg 넌 이제 주거써!!!!!




참고도서 1. 미국 대통령 선거 이야기(조셉 커먼스 저, 박종일 역, 인간사랑 출간, 2009.2.28.)

2. 이런 대통령 뽑지 맙시다(네이슨 밀러 저, 김형곤 역, 혜안 출간, 2002.5.10.)


3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