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건 건배

금주법의 시대, 고통받은 애주가들

by 윤단


기분 좋게(?) 한잔!




기묘한 걸음걸이의 사람들


1930년 2월. 미국 남부의 오클라호마 시티 시립병원에 기묘한 환자들이 모여들었다. 환자들은 하나같이 손, 발에 힘이 빠져 주저앉은 이들이었다. 증세가 심한 이들은 말 조차 할 수 없었다. 운 좋았던 사람들은 기이한 모습으로 걸어 다녔다. 절룩이는 걸음걸이였다. 걸을 때마다 쿵쿵 거리는 소리가 났다. 발뒤꿈치가 아니라 발가락부터 땅에 닿았다. 발가락 끝에 힘이 없어서였다. 사람들은 이런 걸음걸이를 제이크 걸음걸이라 불렀다.

그해 여름, 오클라호마 옆에 옆의 미시시피 주에서 이 기묘한 증세의 환자가 2,000여 명이나 보고됐다. 옆 동네 캔자스, 텍사스, 켄터키, 테네시 아니, 사실상 미국 남부 전체에서 일명 '제이크 걸음걸이' 환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진저 제이크'이란 술을 마셨다는 점이었다.




1919년 11월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됐다. 세계 1차 대전의 끝이었다. 먼 길을 떠났던 군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뉴욕은 한바탕 질펀한 축제의 장이 됐다. 길거리는 군악대의 쩌렁쩌랑한 행진가와 퍼레이드 행렬로 가득 찼다. 기쁜 날 술이 빠질 리가. 사람들은 너도나도 술을 찾았다. 종전과 연말 그리고 축제. 술 마시기 더할 나위 없는 핑계였다. 여기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새해부터 술을 마시는 건 불법이었다.


전에 꽤 유명했던, 이런 제목의 소설이 있었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으레 하지 말라는 것에 더 끌리기 마련이다. 다만, 당시 사람들이 미쳐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술 한잔으로 치러야 하는 대가란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새해가 되기 전부터 술에 취해 쓰러진 사람들이 속출했다. 스산했던 그해 12월. 뉴욕 맨해튼에서만 42명이 사망했다. 미국 전역에서 1,000여 명의 사람들이 술에 취해 쓰러진 뒤,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금주법은 취지는 간단명료한 것이었다. '무절제한 폭음으로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자' 였달까. 여기서 '타락한 세상' 중에는 미국 내에서 대표적인 술의 도시, 뉴욕도 있었다. 오하이오 주의 주점 반대 연맹은 금주법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한 단체였다. 이들은 뉴욕으로 사람들을 보냈고, 이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조사 결과를 내놨다.


뉴욕시 주민들의 일주일 주류 소비량

: 진 70,500리터, 브랜디 71,440리터, 맥주와 와인 그리고 기타 증류주 470,000리터, 압생트 470리터


이들은 세상을 무절제한 폭음을 사라져야 하며, 곧 그렇게 될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헛소리는 아니었다. 금주법을 포함한 수정헌법은 1917년 12월에 상원, 하원을 통과했다. 그 후, 불과 1년 만에 15개 주가 수정헌법을 승인했다. 50개 주의 연합 형태의 미국답게 수정헌법이 제 힘을 발휘하려면 최소 36개의 주의 의회를 통과해야 했다. 1919년 1월 6일, 오하이오 주를 마지막으로 수정헌법은 그 모습을 미국 현대사에 드러냈다. 그렇게 1920년 1월 20일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악법', 금주법이 시행됐다.


좌 : 알렉산더 게틀러, 우 : 뉴욕 수석검시관 찰스 노리스

뉴욕시의 수석 독성학자 알렉산더 게틀러는 금주법이 시행되기 앞선 1918년 1월 19일, 미국 의학협회 저널에 한편의 글을 기고했다. 그중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우리 정부의 증류주 제조 금지 조치는 분명 엄청난 양의 밀주 생산으로 이어져 대중은 불순물이 섞이고 묽게 희석된 술을 마시게 될 것입니다.'


예언이 아니었다. 지극히 사실이었다.




목숨을 건 음주


20세기 초, 산업은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눈만 뜨면 하룻밤 사이 새로운 물질들이 발견되는 식이었다. 그 물질들이 인간의 몸에 어떻게 작용하는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 관심이 왜 필요한지 조차 몰랐다. 다만, 어떤 이들에겐 매우 큰 관심거리였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한 가지였다. 그 물질이 돈이 되는가 였다. 사람의 목숨이란 실험실의 쥐와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온갖 물질들이 세상 무관심한 화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고 발견되었다. 그중에 어떤 물질들은 술병으로 들어갔다.


금주법 시대 단속현장


사실 그리 새로운 일은 아니었다. 소위 엉터리 술, 밀주는 예나 당시나 공공연히 판매되고 있었다. 다만 제대로 된 술도 구하기 쉬웠다. 지금보다야 못하겠지만, 조심하면 안심하고 술을 마실 수 있었다. 그런 중에 금주법은 합법적인 술의 제조를 몽땅 금지시켜 버렸다. 애주가들은 얼마 전까지도 실컷 마시던 술이 사라지자 참을 수 없었다. 그렇게 술과 애주가들은 양지에서 음지로 사라졌다. 음지에는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은 별 다른 의심 없이 즐거운 마음에, 괴로운 마음에, 그리고 더러는(다소 어처구니없게도) 호기심에 술잔을 들었다. 그들이 치른 대가란 것은 참혹한 것이었다.




알코올인 듯, 알코올 아닌, 알코올 같은 우드 알코올


우드 알코올의 역사는 유서 깊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시체 방부제로 쓰였고, 이미 수세기 전부터 술의 재료였다. 우드 알코올의 재조는 엄연한 당대의 산업이었다. 미국 동부 해안지역에는 이른바 '나무 공장'들이 모여 있었다. 유럽은 이미 우드 알코올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술은커녕 아예 가정용으로 사용할 수 없게 했었다. 미국은 예외였다. 사람들은 이미 금주법 한참 전부터 당시까지, 여전히(?) 별 걱정 없이 우드 알코올로 만든 술을 마시고 있었다. 물론 종종 그리고 꾸준히 우드 알코올로 때문에 사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저 사고쯤으로 생각했다.


나무 장작 같은 것들을 200도 정도로 태우면 당연히 숯덩이가 된다. 이 숯덩이를 잘 가공하면 알코올을 추출할 수 있다. 이른바 우드 알코올이다. 같은 알코올이라도 에틸알코올과 우드 알코올은 차원이 달랐다. 에틸알코올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마실 수 있는 알코올이다. 적당량 마셨다면, 몸이 어찌어찌 해독이 가능하다. 우드 알코올은 그렇지 않다. 어린아이라면 단 두 숟가락, 다 큰 어른일지라도 딱 한 잔이면 치사량이다. 살아남더라도 실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금주법이 한창이던 1926년에 뉴욕시에서 우드 알코올을 마시고 실명한 사람이 1,200여 명이나 됐다.


밀주업자들은 이런 우드 알코올에 물과 다른 향신료, 술 등을 섞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에틸알코올, 그러니까 제대로 된 술을 만드는 것보다 우드 알코올로 술을 만드는 게 훨씬 저렴하니까. 가격이 가격이니 가난하고, 거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피해자의 대부분이었다.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우드 알코올을 마시지 않았다.


금주법 시대의 대통령 중 한 명인 워렌 하딩은 뻔뻔스럽게도 임기 내내 백악관에서 술잔치를 벌였다. 당연히 그 자리에 우드 알코올 술은 없었다. 같이 금주법 시대를 보낸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워렌 하딩보다 확실히 한 수 위였다. 금주법을 '고귀한 실험'이라 칭한 후버는 퇴근길에 벨기에 대사관을 들리곤 했다. 수정헌법 제18조가 '국내'의 술의 유통을 금지한 만큼, 대사관에서의 음주는 엄연한 '합법'이었다. 대사관은 치외법권 지역 아닌가.후버는 마티니를 좋아했다. 당연히 우드 알코올 술은 아니었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상황에도 이 기만적인 법은 없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악랄해졌다. 정부는 금주법이 잘 지켜지지 않자 1931년 화학자의 의견을 받아들여 새로운 술 제조법을 개발해 도입하도록 한다. 정부는 기자들을 초청해 시음회를 열었다. 이 시음회에 참석한 어느 기자는 술에 뭔가 이상한 물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이었다. 정부는 알코올에 석유 부산물을 섞도록 했다. 술은 썩은 달걀 냄새가 났다. 딱 한 모금이면, 술 생각 따윈 싹 사라졌다. 이제 애주가들이 술을 합법적으로 마시려면, 달걀 썩은 내도 참아야 했다.




진저 제이크는 남부 일대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행하던 술이었다. 금주법이 시행하자 주 정부는 진저 제이크 업자들에게 알코올 비중을 낮추고, 생강의 양을 두 배 늘리라고 했다. 술이 아니라 음료처럼 만들란 얘기다. 술이 음료가 되자 장사가 안됐다. 손해가 크자 업자들은 정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정부는 단속에 나섰다. 공장은 폐쇄됐다. 업자들은 이젠 로션을 만들겠다고 항복 선언을 한 뒤, 몰래 진저 제이크를 다시 만들었다. 어차피 불법이었으니, 안에 무엇이 들어가든 알 바 아니었다. 오로지 목적은 단 하나, 가성비였다.


갱단과 일하던 어느 화학자들이 가소제로 술을 만드는 방법을 알아냈다. 전문용어로 인산트리크레질인 이 물질은 사진 필름 같은 플라스틱이 잘 부러지지 않도록 하는 물질이었다. 코닥 같은 사진 필름을 만드는 공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이 가소제는 적은 양으로도 순식간에 강한 취기가 돌았다. 느낌은 비슷했다. 다만 그 방식은 알코올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알코올은 간이 해독하다 만들어진 이물질들이 뇌의 작용을 방해하는 식이다. 가소제는 그게 아니라 아예 신경을 직접 파괴했다. 가소제는 신경독이었다. 후에 독일 학자들은 가소제로 그 유명한 '사린가스'를 만들어 낸다.

이제 업자들은 값싼 밀주를 만들 재료로 신경독 성분까지 손댄 것이다.


진저 제이크를 즐겨마신 이들은 주로 가난한 이들이었고, 힘없었던 이들은 이렇다 할 보상도 받지 못했다. 그냥 그런 일이 남부 어디서 좀 있었다 카더라 정도로, 그저 금주법 시대의 좀 유별난 에피소드로 치부됐다.




금주의 금지


여기나 거기나 십진법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금주법 시행이 10년쯤 되자, 많은 보험사들은 실태조사를 벌였다. 10년쯤 됐으니 한번 정산 좀 해보자는 생각일 게다. 그중에 푸르덴셜 생명보험사의 조사 결과는 다소 충격적이다. 금주법이 발효된 첫 해에 급성 알코올 중독 사망자가 1,000여 명이었는데 이제는 5,000여 명이라는 내용이었다. 사망자가 5배가 된 것이다. 메트로폴리탄 생명보험회사의 조사 결과는 조금 달랐다. 5배가 아니었다. 6배였다.


여론은 이미 오래전부터 술렁였다. 생각해보자.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들은 질 좋은 술은 펑펑 마신다. 단속에 걸릴 걱정도 없고, 엉터리 술을 마실 리도 거의 없다. 안전하게 불법을 저질러도 문제가 없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엉터리 술을 목숨 걸고 마셔야 한다. 재수 없이 단속에라도 걸렸다간, 경찰서에 갈지도 모른다. 이건 예나 지금이나 터무니없는 상황이다. 여기에 1929년 대공황이 왔다. 숱한 사람들이 직업을 잃었다. 실의에 빠진 사람들은 위로가 필요했다. 음주량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엉터리 술을 마시고 사망하는 사람의 숫자도 폭발했다. 어디 우리가 평소 내뱉는 '죽겠다!'란 소리가 진짜 죽여달란 얘긴가. 게다가 자신이 술값으로 낸 돈은 알 카포네 같은 마피아들을 부자로 만들었다. 마피아 같은 갱단들이 활개 치는 거리는 너무 위험했다.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개인이든 대중이든 무엇인가 괴로운 일이 있으면 뭔가로 탓을 돌리고 싶기 마련이다. 대중들은 슬슬 이 모든 경제, 사회적 문제의 원흉으로 금주법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이 지점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그는 금주법 폐지를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다.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32대 대통령 선거는 루스벨트의 것이었다. 무려 42개 주에서 승리했다. 압승이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수정헌법에 제21조가 새로 추가됐다. 제21조의 내용은 이러했다.


수정헌법 제18조의 금주법을 폐기한다.


1932년 크리스마스에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한 이는 단 2명뿐이었다. 이제 술 한잔에 목숨을 걸 필요가 없었다.




참고도서 : CSI in 모던타임스(데버러 블룸 지음, 장세현 옮김, 도서출판 어크로스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