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 대통령 전쟁(3부)

전쟁과 크리스마스 휴전

by 윤단




54 사이즈의 고독



어림잡아도 7천만 분의 1이다. 매년도 아니고 꼴랑 4년에 한 번. 임산부가 한 번에 일란성쌍둥이를 두 쌍(총 4명!)을 임신할 확률과 비슷하다. 쉽게 말해 기대 안 하는 게 편하다는 뜻이다. 7~8천만 명이 사는, 1908년의 미국에서 대통령이 된다는 건 지금의 여기나 그때나 소위 ‘선택받은(?)’ 셈이다. 그렇다고 로또 된 것 마냥 기뻐할 일만은 아니다. 큰 힘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 법. 대통령이 되는 것과 대통령 일을 잘 해내는 건 엄연히 다른 일 아닌가. 어찌어찌 칼자루는 잡았는데, 어찌 휘둘러야 할지 모르는 태프트는 풍랑 앞의 종이배 신세였다. 아님 하이에나 떼에 둘러싸인 코끼리 거나.


그가 처음 맞닥뜨린 시련은 관세 문제였다. 당시 말 많은 주제 중 하나였다. 높은 관세를 낮출 것이나 말 것이냐의 싸움이었다. 공화당의 보수주의자들은 고율의 관세를 유지하고자 했다. 공화당의 혁신주의자들은 관세를 내리자 주장했다. 고율의 관세가 대기업의 독과점과 횡포의 원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전임자 루스벨트는 이 골치 아픈 문제를 후임자에게 미룸으로서, 가장 현명한 선택을 했다. 루스벨트다운 노련한 결정이었다. 바통을 넘겨받은 태프트는 더 이상 이 문제를 미룰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밀린 숙제 하듯이 말이다.

태프트의 지지한 자들은 곧 루스벨트의 지지자이기도 했다. 그들은 루스벨트가 스탠더드 오일사를 상대로 소송전을 벌이는 광경을 보며 루스벨트를 지지하게 된 사람들이다. 당연히 그들은 태프트에게도 그런 것을 바랐다. 고로 태프트 지지자들과 혁신주의자들은 태프트가 관세를 인하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태프트는 아니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관세법은 되려 올라 있었다. 혁신주의자들은 놀랍다 못해 황당해했다. 혁신주의자들을 더욱 분노케 한 건 단순히 관세가 올라서가 아니었다.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철저히. 혁신 주의자들의 빗발치는 비난에 태프트는 공화당의 보수주의자들 뒤로 몸을 숨겼다. 감춰지지도 않을 거구가 말이다.


공화당 내 보수주의자들이라고 불만이 없던 건 아니었다. 가뜩이나 줏대 없이 오락가락하는데, 아내 넬리가 사사건건 참견하니, 도무지 자기들 마음대로 휘두를 수가 없었다. 애당초 태프트가 간택(?)된 것은 루스벨트와 정반로 말을 잘 들었기 때문이었는데 말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태프트


하필 이런 시기에 넬리가 쓰러진 건 태프트에게 큰 불행이었다. 넬리는 그의 아내이며, 자녀들의 어머니를 넘어 가장 절친한 친구이며 정신적 구원자이자 같은 배를 탄, 정권 운영의 파트너였다. 그런 넬리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녀의 시원시원한 말주변도 같이 사라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태프트의 근심은 무거워질 뿐이었다. 그 무렵, 태프트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54 사이즈 잠옷바람의 괴로운 영혼은 백악관을 밤새 서성이곤 했다.




태프트의 순교자 처형식


순교자의 입을 막기란 죽음 말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미국 최초의 산림청장인 기퍼드 핀촛은 그런 의미에서 순교자였다. 태프트는 그의 입을 끝내 막을 수 없었다.


기퍼드 핀촛 초대 산림청장( = 순교자)


기퍼드 핀촛이 감사관 루이스 글래비스를 찾아간 건 1909년 늦여름이었다. 핀촛은 내무장관 볼린저의 부정부패 스캔들을 털어놨다. 볼린저가 많은 석탄이 매장된 알래스카 공유지를 민간업자에게 넘기면서 부당이익을 취했다는 것이다. 볼린저는 태프트가 임명한 장관이었다. 글래비스는 태프트에게 이를 알렸다. 태프트는 볼린저의 편을 들었다. 감사관 글래비스는 해임됐다. 핀촛은 신문사와 의회 사람들을 만나 열렬히 자신의 신념을 설파했다. 핀촛은 루스벨트의 자연보호주의를 추종하는 순교자였다. 태프트는 기어이 핀촛도 해고했다.


이 소식은 저 멀리 아프리카에서 사냥에 열중하는 루스벨트의 귀까지 전달됐다. 미국 최초로 산림청을 만든 건 루스벨트였다. 핀촛은 루스벨트가 임명한 최초의 산림청장이었다.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은 이들의 작품이었다. 루스벨트의 입에서 불이 뿜었음은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그로부터 1년 뒤 그들의 재회했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루스벨트는 종종 백악관을 찾아왔다. 태프트와의 대화는 의외로 화기애애했다. 루스벨트는 지지자들과 동료 정치인들에게 태프트를 공격하지 말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다만, 이런 화기애애도 오래가진 않았다. 자주 참석하던 모임에서 루스벨트는 태프트의 그간의 행적(?)들에 대해 드디어 '제대로' 알게 된다. 화가 난 루스벨트는 이후 약 한 달 동안 중서부 지역을 돌며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그즈음 몸이 회복된 넬리는 루스벨트의 소식을 듣더니, 태프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루스벨트와 겨루게 될 거예요. 당신은 패할 거고요."


태프트의 몸은 점점 불어났다.




국지전에서 전면전으로

1912년 2월 22일. 루스벨트는 기어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 선거에 참가하겠다고 선언한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태프트에 대한 분노도 빼놓을 수 없겠다. 분노는 태프트에게도 잘 전달된 모양이다. 태프트는 친구와의 편지에 이렇게 썼다.


'쥐도 코너에 몰리면 물어뜯는다.'


4년 만에 다시 열린 시카고 전당대회에서 루스벨트와 태프트는 앙숙이 되어 있었다. 달라진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태프트는 이제 도전자가 아닌 타이틀을 보유한 현직 챔피언이었다. 물론 비실비실하긴 했지만. 반대로 루스벨트는 이제 도전자 신세였다. 전설의 전직 타이틀 보유 경험자(?)이긴 했지만 말이다.


변수는 공화당이었다. 사실 공화당의 주류인 보수주의자들은 루스벨트를 매우 싫어했다. 루스벨트를 부통령으로 지명한 것도 사실은 그를 허수아비처럼 만들려고 한 책략이었다. 본디 미국의 부통령 자리란 그런 자리다. 지금까지도. 물론 이 책략은 맥킨리 대통령의 암살로 보기 좋게 빗나갔고, 그 뒤로 공화당은 장장 8년 동안이나 대통령 루스벨트의 폭거를 참아내야 했다. 그러니 공화당은 절대로 루스벨트를 공화당의 대통령의 후보로 낼 생각이 없었다. 차라리 지지리 우유부단하고 인기 없어도, 성격 좋고 말 잘 듣는 태프트를 밀기로 작정한 터였다. 시카고 전당대회는 그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현장이었다.


공화당 수뇌부는 대의원을 매수했고, 태프트는 기어이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 루스벨트와 지지자는 납득할 수 없었다. 이들은 공화당을 탈퇴하고는 '진보당'이란 이름으로 새 정당을 조직했다. 다만, 일반 대중들은 이들을 수사슴당이라고 불렀다. 수사슴은 루스벨트의 별명이었다. 수사슴당은 수사슴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전쟁의 서막이었다.


두 친구의 눈물겨운 사생결단전


한편, 민주당은 프린스턴 대학 총장 출신의 뉴저지 주의 주지사, 우드로 윌슨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정치학이 주전공이던, 이 지적인 정치인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이러했다.


'수줍음 많고, 잘 생겼으며, 야망이 크다.'


수줍고, 야망 많으며, 잘생긴(!) 우드로 윌슨.


민주당과 공화당이 다 해 먹던(?) 미국 정치사에서 보기 드문 삼파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전면전에서 총력전으로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직시하는 건 몹시도 괴로운 일이다. 매우 불행히도 태프트는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태프트는 자신이 재선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럴만한 것이 민주당과 공화당에서 각각 1명씩 후보를 내도 아슬아슬한 마당에 공화당 표가 두 갈래로 갈렸으니 말이다. 이건 정치 공학도 아니고 산수적으로 따져봐도 자명한 이치다. 주변 상황 파악이 끝나자, 태프트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자신은 인기 없는 현직 대통령이었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순 없었다. 이미 자신은 공식적으로 지명받은 공화대 대통령 후보였다. 태프트는 포기할 수 없었다. 아니 포기할 수도 없었다. 자포자기한 자의 무서움은 이럴 때 나온다. 쥐가 구석으로 몰린 것이다. 루스벨트를 향한 비난은 그렇게 폭발했다.


"온갖 조작과 속임수를 동원해 추종자들을 선동하는 사이비 종교 지도자 같은 사람!"

"위험하고 이기주의적인 민중 선동가!"

"진실에 함구하는 자!"


루스벨트는 사이비 지도자 같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다만, 자신을 맹렬히 비난하는 태프트를 향한 루스벨트의 답변은 요약하자면 시종일관 이런 식이었다.


'돼지쥐보다 더 멍청한 머리를 가진 얼간이'


태프트는 얼간입니다. 여러분!


이 둘을 지켜보던 우드로 윌슨의 평은 간단했다.


"이 사람이 그 사람이고, 그 사람이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이 그 사람이고, 그 사람이 이 사람입니다. 아시겠죠 여러분?


우드로 윌슨은 다소 뻣뻣하고 연설에 매가리가 없긴 했지만, 자기 비하로 남을 웃기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미국 사람들은 유머 있는 리더를 좋아한다. 아니 리더의 필수 조건이라 여긴다. 레이건 전 대통령이 지금도 사랑받는 이유는 그의 업적보다는 생사가 오가는 상황에서도 거침없이 날리는 위트 때문이다.


갈수록 선거구도는 현직 대통령은 제쳐두기 시작했다. 태프트는 아내 넬리에게 쓴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이 나라에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어찌나 인기가 없던지 선거를 코앞에 두고 대선 러닝메이트이자 부통령이던 제임스 셔먼이 사망했다. 대체자를 찾았지만 아무도 그의 러닝메이트로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어찌어찌 섭외한 컬럼비아 대학 총장, 니콜라스 머레이는 수락하면서 조건을 달았다. '태프트는 이번 선거에서 낙선하여한다'였다. 정말 마지못하니 이름만 올리겠단 뜻이었다.



크리스마스 휴전


빗발치던 비난전은 한 발의 총소리를 정적에 휩싸였다. 1912년 10월 14일, 루스벨트는 호텔에서 식사를 마치고 연설장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누군가 그에게 다가왔고 총성이 울렸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고, 루스벨트는 가슴팍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경호원이 달려들어 범인을 붙잡았다. 다른 경호원은 피가 철철 흐르는 루스벨트를 병원으로 옮기려 했다. 루스벨트는 거부했다.


루스벨트는 기어이 연설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자신이 총격을 당했음을 청중들에게 밝혔다. 사람들이 웅성이는 동안 가슴품에서 연설지를 꺼내 들었다. 연설지로 피로 흥건했다. 루스벨트의 연설은 장장 90분간 이어졌다. 미국 정치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연설이었다. 그날 루스벨트는 이렇게 일갈했다.


"수사슴을 죽이려면, 그 정도론 어림도 없습니다!!"


연설이 끝나고 루스벨트는 경호원의 부축을 받으며 대회장을 빠져나갔다. 나중에 안 것이었지만 총알은 갈비뼈를 부러뜨리고, 폐의 바로 1cm 앞에서 멈춰서 있었다. 총알이 폐를 관통하지 않은 건, 두툼한 연설지와 안경집, 그리고 운동으로 다져진 단단한 가슴 근육 덕분이었다. 총을 쏜 범인은 존 슈랭크란 청년이었다. 그는 유령이 나타나 루스벨트를 죽이라 했다고 말했다.


당시 루스벨트의 엑스레이 사진과 피로 물든 셔츠, 빨간 원 안에 있는 것이 총알이다.
루스벨트 가슴품에 있던 연설지와 안경집


우드로 윌슨과 태프트는 루스벨트를 위해 2주간 선거운동을 하지 않았다. 그 덕에 루스벨트는 2주 동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시끌벅적하던 대선전이 조용해졌다. 정치판의 모든 것이 걸린 대통령 선거에서 전무후무하고, 매우 낯선 풍경이었다.


2년 뒤, 세계 1차 대전으로 한창 전쟁 중이던 독일군과 영국군이 크리스마스날 서로 잠시 총을 내려놓은 일이 있었다. 이들은 빈손으로 참호에서 나와 서로 악수를 하고는, 음식을 나누며, 이야기하고, 함께 캐럴송을 불렀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다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눠야 했다. 훗날 사람들은 이 일을 크리스마스의 휴전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 사진은 표지로 사용되지 않았...


난장판 싸움의 결과는 이러했다.


대선 전에 모든 힘을 쏟은 루스벨트와 태프트는 우드로 윌슨에게 거짓말처럼 참패당했다. 우드로 윌슨은 선거인단 투표에서 435표를 가져갔고, 루스벨트와 태프트는 각각 겨우 88표와 8표를 가져갔다.


태프트는 되려 기뻐했다. 이제 안 맞는 옷을 벗어던질 수 있었으니 말이다. 퇴임 후 그는 예일대의 법학부 교수로 부임했다. 전직 대통령이란 프리미엄에, 성격 좋고, 입담도 좋았으니 인기 교수는 따놓은 당상이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그토록 원하던 미국 연방 대법원장 자리도 앉는다. 여러모로 태프트는 훌륭한 법조인이자 학자였던 셈이다. 정치 말고.


태프트는 대선이 끝나자 다시 아프리카로 떠났다. 그토록 좋아하던 사냥 때문이었다. 불쌍한 아프리카 코끼리와 물소들에겐 루스벨트가 당선되는 쪽이 더 좋았을 것이다. 사실 미국 유권자들도 꽤 아쉬워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루스벨트에 대한 평가는 좋다. 다시 말하지만 사우스 다코다주의 러시모어산 조각상에 고스톱 치고 들어간 게 아니다.


역사의 승자가 된 우드로 윌슨은 44년 만에 공화당으로부터 정권을 가져왔다. 그리고 곧장 터진 제1차 세계대전에 속 꽤나 썩였으나, 국제연맹(UN 말고...)을 창설한 공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현재도 나름 좋은 평가받는 대통령이기도 하고. 다만, 우리 역사교과서에서 민족자결주의란 단어와 함께 건조하고 짧게 스쳐지나간다.




6년 만의 재회


1912년의 난장판 대통령 선거 이후 둘 사이에 왕래가 없었던 건 아니다. 세계 1차 대전이 터지자 이 두 전직 대통령들은 어쩐 일인지 한 목소리로 이 불구덩이 같은 전쟁에 미국이 나서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서로의 생각이 같음을 확인하니 연락도 다시 시작됐다. 그래도 앙금이 다 가신 건 아닌 모양이었다. 결코 만나진 않았으니 말이다. 그들의 관계란 딱 편지로 안부를 주고받는 정도였다. 그래도 양 쪽 다 편지의 서두에 '친애하는'이라고 시작했다.


1910년 시카고 블랙스톤 호텔 모습


1918년 5월의 어느 날이었다. 태프트는 시카고에 위치한 블랙스톤 호텔 로비에서 체크인을 하고 있었다. 마침 루스벨트는 호텔 식당에 앉아있다. 태프트는 루스벨트에게 다가갔다. 루스벨트는 뭔가의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태프트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격한 악수와 포옹. 주변의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하기 시작했다. 주위를 향해 두 사람은 미소와 인사로 화답했다. 둘은 자리에 앉아 반 시간 넘게 즐거운 수다를 떨다 헤어졌다. 윌리엄 태프트 58세, 시어도어 루스벨트 57세 되던 해였다.




참고도서

1. 미국 대통령 선거 이야기(조셉 커먼스 저, 박종일 역, 인간사랑 출간, 2009.2.28.)

2. 이런 대통령 뽑지 맙시다(네이슨 밀러 저, 김형곤 역, 혜안 출간, 2002.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