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마녀, '장티푸스 메리'
어렴풋이, '병균'이 뭔지 알아가던 때였다. 이 보이지 않는 공포를 두고 사람들은 병이 바람을 타면서 번진다고 믿거나, 빈민층이 병이 퍼트린다고 믿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마녀의 저주쯤으로 여겼다.
거짓말처럼 온 도시에 전염병이 돌았다. 1907년에만 미국 전역에서 28,971명이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5명 중 1명은 죽는, 치명적인 병이었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렸다. 그러자 시간을 거슬러 마녀가 소환됐다. 메리 맬런은 그렇게 살아있는 마녀가 됐다.
1915년 1월과 2월, 두 달 동안 맨해튼의 슬론 여성병원에서 장티푸스 환자가 25명이나 발생했다. 그중 2명은 끝내 사망했다. 뉴욕 최고의 시설과 관리 능력을 가진 병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다행히 장티푸스 예방백신이 개발된 후였다.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
뉴욕시 보건국은 즉각 역학조사에 나섰다. 직원 모두를 상대로 장티푸스 보균 여부를 조사했다. 그중 장티푸스 보균자로 양성 판정을 받은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요리사, 메리 브라운이었다. 불과 몇 년 전 뉴욕시를 떠들썩하게 했던 '그 이름'과 같은 같은 이름이었다.
보건국 사람들은 메리 브라운을 찾아 나섰다. 요리사는 종적이 묘연했다. 어느 순경의 신고로 위생복 입은 경찰들이 외딴집 주변을 둘러쳤다. 경찰은 사다리를 타고 창문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화장실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메리 브라운을 발견했다. 현장에 함께 있던 뉴욕시 보건국 담당자는 이 중년 여성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진짜 이름은 메리 맬런. 4년 전, 온 뉴욕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티푸스 메리'였다.
시간을 거슬러, 9년 전이었다. 1906년 8월, 톰슨 부부는 휴가를 떠나 있었다. 그들은 평소 뉴욕 롱아일랜드주 오이스터베이의 저택에서 지냈다. 휴가 기간엔 그들 소유의 다른 저택에서 지내곤 했다. 그 기간 동안 빈 집은 다른 이에게 빌려줬다. 지금의 에어비앤비 같은 것이었다. 그해 톰슨 부부의 가사노동자 딸린 저택을 빌린 건 찰스 엘리엇 워렌 씨의 가족이었다.
워렌 부부에게 악몽 같은 일이 생긴 건 8월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딸 마가렛이 고열을 일으키며 앓아누운 것이다.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워렌 부인과 마가렛의 언니, 하녀 둘 그리고 정원사까지 같은 증세를 보이며 쓰러졌다. 장티푸스였다.
장티푸스는 보통 빈민촌에서 발생하는 병이었다. 균에 오염된 물을 마시거나, 그 물로 씻은 음식물을 먹었을 때가 문제였다. 장티푸스 백신은 개발된 건 1911년이었다. 치료법이 없었다. 혹여 오이스터베이 일대가 장티푸스균에 오염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뉴욕 타임스]는 9월 11일 자 1면을 할애하며, 부촌에서의 장티푸스 감염자 발생을 대서특필했다. 자칫하면 오이스터베이 일대가 쑥대밭이 될 형국이었다.
보건소 직원들이 역학조사 나섰다. 조사 결과는 깨끗했다.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다행히 장티푸스 감염자는 더 나타나지 않았다. 워렌 씨 가족과 가사노동자들도 증세가 호전되기 시작했다. 원인은 모르지만, 더 이상 감염자가 나오지 않자 사건은 그렇게 흐지부지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졌다. 한 명만 제외하고.
톰슨 부인은 이번 사건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그녀는 집을 소각하고 싶지 않았다. 오이스터베이의 저택은 그녀의 결혼 선물이었다. [뉴욕 타임스]까지 나서서 대대적으로 자신의 집을 장티푸스 발원지로 만천하에 알린 마당. 톰슨 부인은 지인을 통해 조지 소퍼 박사를 소개받았다. 자신을 '전염병 퇴치사'라 부르는, 그 바닥에선 제법 유명한 장티푸스 전문가였다.
조지 소퍼는 다시 역학조사에 나섰다. 상하수도가 연결된 집 안의 모든 곳(부엌, 욕실, 화장실 같은)에서 샘플을 채집했다. 깨끗했다. 워렌 부부가 먹은 음식들은 모두 근처 농장과 바다에서 공수한 것들이었다. 조사할 필요가 없었다. 오이스터베이에서 장티푸스로 고생한 이들은 오직 그들뿐이었으니. 톰슨 씨 저택에서 장티푸스가 발병한 건 5년 전이었다. 이번 일과 관련짓기엔 너무 예전 일이었다.
오이스터베이에서 벌인 조사 결과는 모두 허탕이었다. 조지 소퍼 박사는 워렌 부부를 만나기로 했다. 남은 단서는 한 가지. 사람뿐이었다.
조지 소퍼는 워렌 부부에게 오이스터베이에 머물 동안 집 밖을 나갔다 온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없었다. 그럼 누군가 집에 다녀갔는지 물었다. 없었다. 부부의 기억에서 특이할 것이라곤, 8월 첫째 주에 요리사가 해고됐고, 새로 고용된 요리사가 8월 4일부터 일한 것뿐이었다. 잠깐. 요리사?
워렌 부부와 가사노동자들은 직접적인 교류가 별로 없었다. 그런 그들이 비슷한 시기엔 줄줄이 감염될 방법은 물과 음식뿐이었다. 워렌 부부 가족도, 가사노동자들도 요리사가 한 음식을 먹었다. 한 식탁에선 아닐지라도. 소퍼는 워렌 부부에게 그들이 먹은 음식들에 대해 물었다. 장티푸스균은 높은 온도에서 푹 익혀 먹으면 문제없었다. 그들이 기억하길, 익히지 않은 음식을 먹은 건 8월 20일이었다. 복숭아로 만든 아이스크림이었다. 마가렛이 앓아누운 건 8월 말 아니던가.
조지 소퍼가 워렌 부부를 만났을 때, 밖은 이미 추운 겨울이었다. 그 요리사는 예전에 그만둔 후였다. 조지 소퍼는 그 묘령의 요리사를 찾아 나섰다. 큰 키의 다부진 체격, 새파란 눈동자와 다소 고집스러워 보이는 인상, 아일랜드 태생, 38세 여성. 그녀의 이름은 메리. 메리 맬런이었다.
조지 소퍼는 '스트리커 부인의 직업소개소'를 찾아갔다. 워렌 부인이 메리 맬런을 소개받은 곳이었다. 소장은 메리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저 메리가 일했던 가정집 주소 목록이 전부였다. 조지 소퍼는 실망했다. 어쩔 수 없이 일일이 그 가정집들을 찾아다녔다. 어쩐 일인지 하나 같이 집주인들은 메리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정확히는 관심이 없었으리라. 성과는 있었다. 메리가 일한 가정집 대부분에서 장티푸스 환자가 발병한 것이다. 마치 메리는 장티푸스가 득실거리는 곳만 골라서 일한 것 같았다.
독일인 로베르트 코흐 박사가 무증상 보균자라는 개념으로 노벨 의학상을 받은 건 1905년이었다. 무증상 보균자란 감염됐지만, 아프지 않은 사람을 가리켰다. 당시만 해도 병균에 감염됐으면, 당연히 증상을 앓고, 증상이 나타난 이들이 병을 옮긴다고 생각했다. 즉 건강한 사람이 균을 옮길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코흐 박사의 연구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소퍼가 보기에 메리 맬런은 당시 이런 상식의 절대적인 수혜자다. 주변 사람 아무도 그녀를 감염자라 의심하지 않았다. 물론 스스로도 감염되지 않았다고 여겼다. 더군다나 그녀를 본 사람들은 하나 같이 무척 건강하다 말하는 지경이었으니. 조지 소퍼는 확신했다. 그녀는 장티푸스에 내성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미국에도 장티푸스 무증상 보균자가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완벽한 증거였다.
수소문 끝에 조지 소퍼는 메리 맬런을 만난다. 파크로 688번가의 월터 바운 씨의 집에서였다. 그녀가 그곳에서 일을 시작한 건 오이스터베이를 그만 둔지 몇 주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때까지 소퍼 박사가 확인한 감염자 수는 22명이었다. 그가 바운 씨의 집을 찾아간 뒤, 숫자는 24명으로 더 늘었다. 바운씨의 외동딸과 세탁부 한 명이 장티푸스로 앓아누운 것이다. 특히 외동딸은 매우 위독한 지경이었다. 나중 얘기지만 그 외동딸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조지 소퍼는 다짜고짜 부엌으로 갔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요지인즉슨 '자신과 함께 병원 가서 검사를 받아보자'였다. 메리는 격렬하게 화를 냈다. 그럴 법도 했다. 무증상 보균자란 개념이 없던 시대였다. 아무리 개념을 열심히 설명한들 생사람 잡는 미친놈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요리사였다. 위생을 중요시하는 요리사에게 보균자라는 사실은 낙인과 다를 바 없었다. 조지 소퍼가 마주한 것은 생계의 위협과 근거 없는 모험에 분노한 메리 맬런이었다. 소퍼는 겁에 질려 부엌을 뛰쳐나와야만 했다.
조지 소퍼는 그녀의 격렬한 저항에 당황했다. 어린 나이에 아일랜드에서 이민 온 그녀는 산전수전 다 겪으며 자란 터프한 여성이었다. 그녀에게 요리사란 갖은 고생 끝에 얻은 천직이자 생계 수단이었다. 다시 메리를 찾아갔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조지 소퍼는 이제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 섬뜩한 소식이 들렸다. 메리가 월터 바운 씨 집의 요리사 일을 그만두고 새로 일터를 구한다는 것이었다. 조지 소퍼는 두 번째로 메리를 만나러 갔을 때, 도와줄 사람과 함께 간 것 빼곤 혼자 조사하고 있었다. 후에 그의 행동으로 보건대, '그녀의 발견'을 온전히 자신의 업적으로 독차지하고 싶어서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는 이제 더 이상 그럴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가 황급히 찾아간 곳은 뉴욕시 보건국이었다. 이제 조지 소퍼와 메리 맬런과의 대치는 메리 맬런과 뉴욕 전체와의 대치로, 전선이 확대된다.
로크가 주장한 3권 분립이란 폭주하는 권력을 제어하기 위함이었다. 일종의 안전장치다. 폭주하는 권력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고, 그 짓들이란 대게 해악 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미국은 일찍이 삼권분립을 실현한 나라였다. 그렇지만 아닌 부분도 있었다. 뉴욕시 보건국이 그랬다.
보건국을 움직이는 보건국위원회는 의사들로 이뤄진 결사대 같은 집단이었다. 공공위생에 대한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한을 손에 쥔 그들은 공공위생을 위협하는 그 무엇이든 거침없는 칼날을 휘둘렀다. 수정헌법도 그들 앞에선 무력했다. 수정헌법은 명백히 개인의 신체적 자유나 사상적 자유 같은 것들을 보장토록 했다. 그런 자유나 권리들을 제한하려면 절차에 따라야 했다. 그것도 어디까지 최소한의 제한이다. 문제는 전염병이 창궐하던 시대였다. 사람들은 무슨 수 쓰더라도 전염병의 확산을 막길 바랬다. 그런 시민들의 바람에 따라 보건국위원회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게 됐다. 공포 앞에서 법이란 아무 의미 없는 낙서에 불과했다.
보건국위원회는 몇 차례 직원을 보내 메리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당연히 실패였다. 그러자 위원회는 경찰을 동원했다. 그들도 멀쩡한 사람을 체포하려는 건 처음이었다. 메리 맬런을 영장도 없이, 거의 납치되다시피 체포되었다. 그녀는 로어 이스트 사이트의 파커 병원에 격리됐다. 전염병 전담병원이었다. 1907년 3월 20일이었다. 반강제로 실시된 검사에서 장티푸스 보균자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자 조지 소퍼가 메리 맬런을 찾아왔다.
조지 소퍼는 거래를 제안했다. 자신의 제안을 수락하면, 병원에서 나가게 해주겠다는 조건이었다. 하나는 수술이었고, 나머지는 메리를 주제로 책을 쓰겠단 것이었다.
수술이란 쓸개를 들어내는 것이었다. 당시에 제대로 된 진통제도, 항생제도 없었다. 그냥 맨 정신에 살을 갈라서 내장을 잘라 들어내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수술이 잘 될지, 수술 후에 감염으로 살아남을지 알 수 없는 도박이었다. 게다가 의학적 지식이 없는 메리가 보기에도 쓸개를 들어낸다 한들 장티푸스가 완치되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실제도 쓸개와 장티푸스는 아무런 연관도 없거니와.
메리를 주제로 한 책 출판도 그랬다. 그 책은 온통 자신에 대한, 불쾌한 얘기로 도배될 터. 그걸 읽는 일반시민들이나 기자들이 자신을 찾아내는 건 일도 아닌 일이었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메리는 자신이 장티푸스 보균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메리는 그 자리를 떠났다.
1907년 4월 2일, 당대 최고의 판매부수를 자랑하던 [뉴욕 아메리칸]의 1면 제목은 이랬다.
하루에 30만 부 넘게 팔리던 신문이었다. 당시 사회적 파괴력은 어마어마했다. '인간 장티푸스균'은 순식간에 화제의 인물이 됐다. 기사는 메리를 살아있는 악마 정도의 취급이었고, 지금 그 악마가 지금 뉴욕 한복판의 병원에 있으니 큰일이라는 식이었다. 보건당국은 폭발하는 여론에 놀라서 메리는 이스트강 상류 노스 브러더 섬의 리버사이드 병원으로 옮겼다. 물살이 워낙 센 곳이라 작은 배로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사실상 유배지 같은 곳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절차란 절차는 다 무시했다.
그리고 같은 달, 조지 소퍼는 메리 맬런을 주제로 한 논문을 발표했다. 제목은 '어느 만성적 장티푸스균 전파자에 관한 연구'였다. 약속한 대로 메리의 실명은 거론하지 않았다. 다만 이 논문은 메리가 노스 브라더 섬에 들어간 즈음 [미국 의학협회 저널]에 실리더니, 저 유명한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에까지 실렸다. 학계에서 인정받고 싶었던 조지 소퍼는 그러부터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맹렬히 논문을 발표하고 강연하러 다녔다.
이 중 마침표는 과연 [뉴욕 아메리칸]의 것이었다. [뉴욕 아메리칸]은 그녀를 끝끝내 마녀로 규정하고 마녀사냥에 선봉에 나섰다. 1909년 6월 30일, 80만 부 가까이 팔리던 일요판 조간신문에 메리 맬런의 이름과 그녀의 모습이 담긴 사진 그리고 섬뜩한 삽화가 실렸다. 그들의 주장은 역발상으로 참신했다. 제대로 된 재판 조차 없이 격리된 그녀를 두고, 역으로 제대로 된 재판이 없었다며 비난한 것이다.
그러자 제대로 된(?) 재판이 열렸다. 거짓말처럼.
그의 이름은 조지 프랜시스 오닐. 이 34살의 젊은 변호사는 [뉴욕 아메리칸]의 애독자였다. 그도 6월 30일 자 [뉴욕 아메리칸]를 펼친 터였다. 기사를 다 읽은 변호사는 혀를 찼다. 명백한 시민권 침해였다. 그는 메리를 변호해주겠다고 공개적으로 나섰다. 오닐 변호사는 뉴욕주 대법원에 인신 보호 영장 청구서를 제출했다. 인신 보호 영장이란 죄수나 다른 시설에 수용된 누군가를 후견인의 이름으로 판사 앞에 세워 그 수용이 합법적인지 판단하는 것을 말했다. 여기서 누군가는 메리였고, 후견인은 오닐 변호사였다. 법원은 영장을 발부했다. 메리는 이제야 제대로 된(?) 재판을 받게 됐다.
일요판 신문이 나가고 9일 후. 재판이 열렸다. 메리가 격리된 지 2년 4개월 만이었다. 두 판사 앞에서 오닐 변호사는 뉴욕시 보건국을 강하게 질타했다. 메리의 체포 및 격리 수용, 검사 모든 것들이 적법한 절차 없이 진행했다는 것이 요지였다. 더 나아가선 메리 같은 무증상 보균자가 뉴욕에 5명이나 더 있었다. 그들 중 격리된 자는 아무도 없었다. 격리된 건 오로지 메리뿐이었다. 변론은 순조로워 보였다. 재판이 끝나고 3주쯤 지난 7월 16일, 판결이 났다. 메리의 영장은 기각됐다.
1910년 2월 19일. 보건국은 몇 가지 조건을 수락하는 조건으로 메리를 노스 브러더섬을 나왔다. 조건이라 함은 요리를 직업으로 가지지 말고, 주기적으로 자신의 근황을 보고하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메리는 약속을 어겼다. 보건국도 그런 메리를 찾지 않았다. 손을 놓은 것다. 그 사이 메리 맬런은 메리 브라운, 메리 브레쇼프, 메리 브레이호프 같은 가명으로 메리는 레스토랑이나 호텔, 요양원 같은 곳에서 요리사로 일했다. 슬론여성병원은 화려한 외출의 종착지였다.
메리의 화려한 외출은 4년 만에 막을 내렸다. 메리는 다시 노스 브라더 섬으로 돌아갔다. 메리는 남은 평생을 노스 브러더섬에서 보내야만 했다.
출처 : 위험한 요리사 메리(지은이 : 수전 캠벨 바톨레티, 옮긴이 : 곽명단, 펴낸 곳 : 돌베개, 2018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