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본다는 것은

영화 듄 2에서 읽어본 시간의 철학

by sweet little kitty

영화 듄의 세계관


무아딥, 리산 알 가입, 마디. 이 외계어같은 단어들은 듄 2에서 폴 아트레이데스가 사막의 구원자로 변신하며 얻은 새로운 이름이다. 무아딥은 작지만 생존력이 강한 사막쥐를 의미하고, 리산 알 가입은 '보이지 않는 자의 혀'라는 뜻으로 신비 조직 베네 게세리트가 계획적으로 심어놓은 예언의 목소리다. 마디 역시 성전(holy war)을 이끌 지도자를 뜻한다. 이토록 강력한 사막의 영웅을 작은 쥐에 비유하고, 귀여운 이미지의 남자배우 티모시 살라메가 맡았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어쩌면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감독의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듄의 세계관은 따로 시간을 내어 공부하지 않으면 파악이 안 될 정도로 방대하고 복잡하다. (듄 파트 1을 보지 않으신 분은 스포일러가 있으니 다음 문단은 건너뛰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잘 따라가 보면 고대 그리스 로마문명부터 유럽인들의 제국주의로 연결되는 친숙한 서사가 많다.


먼 미래 우주제국은 황제와 귀족가문이 다스리는 세계다. 아라키스 행성은 우주여행의 필수 약물 '스파이스'가 나는 곳이기에 패권의 중심이 된다. 스파이스는 우주를 항해하는 동안 수명을 연장시키고, 미래를 보는 능력을 향상하는 일종의 각성제다. 스파이스라는 이름에서 대항해 시대의 향신료가 떠오르기도 하고, 2차 대전에서 일본이나 독일이 사용했던 메스암페타민이 연상되기도 한다.



'듄'은 사막의 지형을 특징적으로 표현하는 단어인 동시에, 아라키스 행성을 부르는 현지의 이름이다. 어느 날 황제는 하코넨 가문 대신 아트레이데스 가문에 아라키스의 통치를 맡기는데, 이는 아트레이데스 가문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황제의 함정이었다. 아트레이데스의 온건한 지도자 레토(폴의 아버지)공작은 아라키스의 원주민 프레멘과 협력하고자 하고, 좋은 구실을 잡은 황제는 하코넨 가문시켜 아트레이데스 가문을 멸족시킨다. 여기까지가 듄 1의 이야기다.


듄 2에서 레토 공작의 아들 폴은 어머니 제시카와 함께 사막으로 탈출하고, 아버지의 뜻처럼 프레멘과 협력하게 된다. 이곳에는 제시카가 속해 있던 베네 게세리트가 일찌감치 세뇌시킨 예언이 있는데, 리산 알 가입(외부의 목소리, 보이지 않는 자의 혀)이 나타나 사막을 녹지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서사였다. 사막의 프레멘들은 이방인 폴이 리산 알 가입일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고, 폴은 고민하다가 결국 협력자에서 예언자라는 타이틀로 올라선다.


폴은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가문의 복수를 위해서 구원자라는 달콤한 유혹에 끌릴 수 있다. 그러나 언제 봤다고 갑자기 맹목적으로 폴을 추종하는 원주민 프레멘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막을 개척한 용맹한 민족의 삶의 태도는 사라지고, 들은 사이비 종교의 광신도가 되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하던 폴도 결국은 그들의 요구에 맞추어 미래를 예언한다. 그런데, 도대체 폴은 어떻게 미래를 보는 것일까.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철학


고대 그리스 문명은 해상 문명으로 밖으로 뻗어나가 공간을 점유하고 지배하고자 했다. 영화 듄에서 하코넨 가문은 우주공간을 개척하고 지배하는 모습이 그리스 문명(헬레니즘)을 닮았다. 그러나 사막에 거주했던 이슬람 문명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에서 방향성을 잃지 않기 위해 공간이 아닌 시간을 지배하고 싶어 했다. 듄에서 사막의 프레멘들은 그렇게 지금이 아닌 미래를 꿈꾸고, 녹색의 자연을 꿈꾼다. 지금의 고통을 먼 미래의 약속으로 견뎌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슬람 문명이 일부 계승한 유대문명, 헤브라이즘과 닮았다. 헤브라이즘은 미래에 대한 신의 약속을 중요하게 여기며 메시아를 기다린다. 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이 인간의 욕망을 담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면 인간은 시간을 어떻게 인지하는 걸까.

우리는 시계를 보면서 살기에 시간을 인지한다고 생각하지만, 뇌에서 시간을 인지하는 것은 변화와 차이, 전환을 통해서다. 서로 다른 사건의 경계는 시간이 흘러갔다고 느끼게 한다. 같은 일을 반복하면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은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저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의 원제는 The order of time, 시간의 질서 또는 순서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나면 원래 시간에는 질서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시간은 거시적으로 보면 상대적인 개념이다. 오신화에 나오는 이야기 <만복사저포기>에서 양생이 만복사에서 여인과 보낸 3일은 바깥 세상의 3년이었듯 말이다.


현실에서 질서를 이루는 것은 사건이다. 순서대로 배열된 사건이 있고, 우리 뇌가 사건의 질서를 이야기처럼 경험하는 것이다. 사건을 순서대로 인식하고 기억하기에 기억의 핵심은 순서다. 사건과 사건 사이의 밀도가 시간을 결정한다.


반면 공간은 해마에서 장소와 경로, 위치를 좌표처럼 저장한다. 내측두엽에 위치한 엔토리날 피질 영역에서는 후각 처리 및 시간처리와 더불어, 그리드 세포(Grid Cell)가 바둑판처럼 공간을 쪼개어 거리를 계산한다. 이 영역은 우리 뇌의 GPS인 셈이다.


좌) 폴의 어머니 제시카, 우) 황제의 딸 이룰란 공주


다시 듄으로 돌아와 보면, 사막에서는 기준점이 없고 같은 풍경이 반복되기에 방향조차 알 수 없다. 뇌는 적절한 자극이 없으면 불안이나 공황에 빠지기도 한다. 이때 현재의 막막함을 이겨내기 위해 시간을 인식하는 뇌가 과도하게 작동하면, 인간은 미래의 약속과 예언에 집착하게 된다. 공간을 소유하지 못하고 떠돌았던 유대 민족과 사막에서 두려움을 이겨내야 했던 이슬람 문명이 현재보다 보이지 않는 미래를 과도하게 시뮬레이션한 이유다.


한편 폴이 미래를 보는 현상을 뇌과학적으로 해석해 보면, 시뮬레이션에 그쳐야 할 미래의 사건을 고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폴은 미래를 얻지만 현재를 잃게 된다. 예를 들면, 폴의 어머니 제시카가 대모의 자리에 이르기 위해 독을 직접 테스트하는 장면이 있다. 사람들은 제시카가 죽을 것으로 보지만, 폴은 이겨낼 것을 알기에 어머니의 고통 앞에 초연하다. 제시카기 베네 게세리트에서 독을 훈련한 과거를 알기에 결과를 예측한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가장 가까운 혈육의 고통에 동요조차 하지 않는 냉혈한으로 보였다. 미래를 안다고 현재의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닌데 폴은 현재의 고통을 건너뛰는 것이다.


폴은 사랑하는 여인 챠니의 죽음을 예상했지만 막지 못한다. 그리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챠니가 보는 앞에서 이룰란 공주와 결혼한다. 제시카의 뱃속에 있는 여동생이 점지해준 미래였다. 전지전능한 황제가 사랑하는 여인을 선택하지 못하다니, 미래를 보고 메시아가 된 대가일까.


어떤 집단이나 반항아는 있다. 챠니는 사막에 사는 프레멘이지만 메시아의 존재를 믿지 않고 자신을 믿는다. 현재의 감정에 충실하기에 폴을 사랑하지만 부딪칠 수밖에 없다. 챠니는 폴이 결투에 이기고 황제가 된 순간 홀로 떠난다. 폴은 그녀에게 사랑하는 남자일 뿐, 메시아도 황제도 아니었던 것이다.



미래 예측의 부작용


원래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은 생존을 위해 발달한 진화적 산물이다. 뇌는 사건을 하나의 서사로 엮는다. 처음에는 포식자로부터 안전하게 달아나기 위해, 나중에는 무리를 이루고 국가를 만들기 위해 우리 뇌의 서사적 능력은 발달했다. 듄에서는 이러한 서사의 기능이 극대화된 것이다.


현대인은 이미 공간을 지배했다. 비행기를 타고 세계를 누빌 수 있고, 사진이나 동영상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 세계를 볼 수 있다. 경험하는 공간이 넓어진만큼 밀도와 감동은 줄어들었지만 말이다. 그러면 시간은 어떨까.


현대인에게 시간은 관리와 통제의 대상이다. 과학의 힘으로 미래를 상당수 예측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만큼 압박받고 불안하다. 처음에는 불안을 덜기 위해서 미래를 예측하기 시작했지만, 미래를 예견할 수는 있어도 완벽히 통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세상이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사건 간에는 관계가 존재하고, 하나의 사건은 다른 사건에 영향을 미친다. 영화 < 투터 퓨처>에서 과거로 돌아가서 한 가지를 바꿀 때마다 연관된 것들이 하나씩 바뀌고 급기야 주인공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처럼, 우리는 미래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역시 그렇다. 현대인은 여전히 시간의 좌표 위에서 방랑하고 있다.


SF영화를 보지 않던 내가 <듄>을 좋아하게 된 건 문명의 전환기라고도 불리는 2020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 미래에 대한 궁금증 때문인지도 모른다. 4차 산업혁명, AI의 급격한 발달, 가상화폐의 등장 등 20 여년 사이 모든 것이 달라졌고 예측 불가능하다.


그러나 삶의 의미는 정확한 예측에서 오지 않는다. 때로는 우연히 일어난 사건,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행복과 불행, 다양한 의미가 생겨난다. 미래를 알고 싶다면, 사건을 해석하고 대응하는 삶은 어떨까. 시간을 지배하고자 했던 사막의 이야기 <듄 2>가 현대인에게 주는 진정한 메시지는 이것이라고 믿어본다.



지난 화에 걱정을 유발하는 어두운 글을 올려서 죄송합니다. 아이와 저는 건강을 위해 노력하며 다시 일상을 이어가고 있어요. 여러분의 새해가 즐겁고 활기차기를 기원하며, 예측보다는 대응하는 삶을 살고 싶어서 <듄 2>와 연결지어 보았습니다. 3월이 되면 새로운 연재로 찾아뵐게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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