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름을 쓰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할 것이란 말이 그 어느 때보다 와닿는 날이었다. 두 사람에게 필름 카메라는 어떤 의미일까. 공간을 열기 전 ‘필름 카메라’를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그 처음이 궁금했다.
"저는 사실은 필름 카메라를 쓰던 세대거든요. 고등학교까지 필름을 썼던 것 같아요. 소풍 가면 무조건 그 소풍 매점에서 일회용 카메라 팔았거든요. 그때는 팬클럽도 많이 가입하잖아요. 저는 그때 농구 선수 이상민을 되게 좋아했어요. 카메라를 가지고 가서 경기장에 가서 사진을 찍고 했어요. 친구들한테 막 100원에 팔고 그랬단 말이에요. 저는 그 표준 카메라가 늘 항상 있었어요. 아빠가 저희를 찍어주려던 게 있었는데 그냥 자연스럽게 가지고 놀았던 것 같아요."
- 나소희 작가
나 작가는 디지털카메라가 성행하면서 6~7년 정도 디지털카메라를 썼었다고 한다. 하지만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지고, ‘그만 사진을 찍어야 하나’ 하는 고민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다 필름 카메라를 쓰는 지인을 만나게 되면서 다시 필름 카메라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별히 카메라를 구입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어요. 아빠 카메라로 다시 시작하게 됐어요. 장롱에 콕 박혀 있는 걸 꺼내서 사용했는데 너무 재밌는 거예요. 뜻하지 않는 것들의 어떤 결과물이 너무 재밌는 거예요. 만 원에 네 롤을 현상해 주는 유명한 현상소가 있어요. 그래서 네 롤을 맞추려고 일주일 동안 미친 듯이 찍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필름 값이 2000원, 2500원이니까 막 찍었던 것 같아요. 그런 식으로 하다가 어떤 모임에 갔는데 저만 필름 카메라고, 다 디지털카메라인 거예요. ‘내가 너무 튀는 건가’라는 생각을 했는데. 나 같은 사람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며 찾다가 필름 카메라 동호회를 알게 됐고, 거기서 그 사람들이랑 사진을 찍게 됐어요. 같이 찍을 사람이 필요해서 나간 건 사실이거든요."
- 나소희 작가
나 작가와 원 작가와의 인연은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때 당시 직장을 다니고 있던 나 작가는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필름 카메라 출사 동호회를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원 작가와 다른 친구에게 동호회를 만들어 달라고 권했다고 한다. 10만원 어치 고기를 사주고, 구워주며 그렇게 동호회가 결성되었다는 비하인드를 털어놓기도 했다. 그렇게 함께 활동을 이어오다 지금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아주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가 필름을 워낙에 많이 쓰셔서 손자들 사진도 많이 찍어주시고 그랬어요. 저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필름으로 찍고 앨범을 만들던 시기였어요. 제가 고등학교 올라갈 때부터 디지털이 성행한 것 같아요. 제가 이제 필름 카메라를 들게 된 이유는 그냥 카메라가 아까워서 시작했어요. 저희 친척 오빠가 사진과를 나왔거든요. 아빠께서 그 당시에 굉장히 고가의 필름 카메라를 친척 오빠에게 선물로 준 거예요. 근데 오빠가 그때 필름 카메라와 디지털의 딱 중간 세대라서 ‘나 이제 필름 안 쓴다. 디지털 쓸 거다!’ 그래서 그게 무용지물이 된 거예요. 그게 장롱에 박혀 있다가 저한테 오게 된 거죠. 저는 디지털과는 좀 안 맞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제가 사진을 빨리 찍는 사람이 아니라서 오히려 그런 어떤 필름이 주는 느림과 나중에 현상해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잘 맞아서 필름을 꾸준히 쓰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 원지유 작가
그러다 고향 강릉으로 다시 돌아온 원 작가. 서울과 강릉을 오가는 와중에 혼자 찍으면 재미가 없어서 동호회를 들게 됐다고 한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동호회를 만들면서 심도 있게 배워나가며 필름 카메라를 쓰게 됐다고 한다. 그러면서 ‘필름의 꽃은 현상 인화가 아니겠느냐’는 말을 많이 듣게 되었다고 한다. 인화를 해봐야 필름의 끝을 볼 수 있다는 말에, 두 사람은 그 길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제가 끈기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되게 인내의 시간이 있어야 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내 성격에 이건 못할 거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근데 하자고 하니까 또 해야지 싶어서 했는데 재밌었어요. 근데 접으려고 그랬어요. 사진 생활 자체를 접으려고 했어요. 저희 선생님이 사진과도 나오시고, 스튜디오도 운영하고, 강의도 되게 많이 나가는 분이셨어요. 선생님께 계속 크리틱 아닌 크리틱을 받으면서 까임을 당했어요. 선생님도 그냥 한 두세 번 나오면 많이 나오겠다 했던 애들이 꾸준히 하는 거죠. 많이 물고 늘어졌던 것 같아요.”
- 나소희 작가
그렇게 두 사람은 1년이란 시간을 인내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작당 모의를 정말 많이 했다고 한다. 식초를 필름에 찍어보기도 하고, 컴컴한 화장실에서 말려서 다시 새벽 4시에 돌돌돌돌 말아서 다시 찍어보기도 했다. 다른 사진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서 현상을 해주는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그때 한창 재밌게 작업을 했다고 한다. 해보고 싶은 건 일단 해보는 두 사람이었다. 그렇게 해서 결과 사진을 딱 만났을 때는 또 어땠을지 궁금했다.
“사실은 사진을 봤을 때 망한 것도 되게 많아요. ‘생각보다 괜찮네’하는 때도 있었고요. 필름이 되게 공부를 했다고 잘 찍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물론 베이스가 있으면 좋은 어떤 기반이 되겠지만. 그냥 되게 우연성을 가장한 어떤 그런 것으로 꾸준히 해야 하는 것 같아요. 이 필름이라는 게.”
-원지유 작가
결과물에 대해서 만족하거나 실망하기보다 ‘그냥 우리가 이걸 했구나’라는 시도 자체에 만족을 하며 작업을 즐기고, 좋아하는 걸 하는 즐거움을 오롯이 느끼는 두 사람이었다.
식물원에서 만난 사람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진짜 이건 정말 과정이 제일 큰 즐거움’이구나 느낀다. 결과는 어떻게 나올지는 정말 예상할 수 없는 분야가 아닐까 싶다. 어떤 기대를 하고 이렇게 찍는 느낌보다는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시도 자체의 즐거움, 과정에서 오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작업이구나 싶다. ‘식물원에서 이러한 즐거움을 함께 경험할 수 있겠구나’. 이 공간이 있어야만 하는 이유였다. 식물원에서 진행하는 클래스의 분위기는 어떨까 궁금했다.
“여행객들은 거의 다 바다 사진을 많이 찍어오거든요. 강릉은 바다라고 생각하시니까. 잘 안 나오면 어떡하지 하고 조바심을 많이 내시는 것 같아요. 왔다가 다시 가셔야 하니까 그러는데. 로컬에 계신 분들은 바다보다는 그냥 자기의 일상을 찍는 분들이 굉장히 많으세요. 그리고 흑백은 어떻게 찍어야 하는지 질문을 많이 하더라고요. ‘흑백으로 뭘 찍어야 돼요?’ ‘흑백으로 찍으면 예쁘게 나오는 게 뭐가 있을까요?’라는 것들을 많이 물으시더라고요.”
- 나소희 작가
클래스를 경험을 한 사람들 중 로컬 분들이 7대 3의 비율로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강릉에 사는 분들의 관심이 꽤 높았다. 연령대도 폭넓다고 한다. 혼자 찾기도 하지만 가족, 친구와 함께 찾는 분들도 많다고 한다.
“가족 네 분이 오신 적이 있었어요. 아빠분이 강릉에서 스튜디오를 하시는 분이셨어요. 일회용 카메라 두 개를 사가셔서 아이들에게 각각 한 대씩 주신 거예요. ‘너희들이 찍고 싶은 걸 찍어봐’. 그런 다음에 식물원에 가서 이런 것들을 할 거라고 설명을 해주셨대요. 그렇게 해서 왔는데 애들이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아빠 여기 또 오고 싶어요, 너무 재밌어요’ 이러면서 즐겁게 했거든요. 마지막에 현상된 필름에서 컷을 고르잖아요. 아이들이 대부분 자기가 잘 나온 걸 픽하거든요. 근데 그 아이들은 다 엄마, 아빠가 나온 걸 고르는 거예요. 그런 과정을 보면서 그 가족이 얼마나 끈끈하고 화목한지, 안정적인지 그게 보이더라고요. 그때가 되게 인상이 깊고 좋았어요.”
- 나소희 작가
이러한 것을 함께 경험하고 싶었던 아버지의 마음,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재밌게 경험한 아이들, 이러한 과정 자체가 주는 감동은 정말 뜻밖의 선물이기도 하다.
“모녀가 오셨었어요. 같이 여행을 오셨다가 신청을 하셨는데, 조금 특이했던 게 남동생분이 사진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우린 안 해봤잖아’ 하면서 경험을 하러 오신 거였어요. 엄마와 같이 사진을 찍고, 그걸 같이 와서 경험해 보고, 사진을 남기고 이러니까. 우리가 하는 일이 이런 방향성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계속했던 것 같아요.”
- 원지유 작가
그날의 기억은 두 사람에게 더 진하게 남아 있다.
“그날 사실 우리 둘 다 울었어요. 저는 서울에 계신 엄마가 생각나서 울고, 이 친구도 이제 다른 곳에 계시는 엄마가 생각나서 울었고. 두 사람의 과정을 보면서 계속 참았던 거예요. ‘우리 엄마도 나랑 이걸 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가 두 사람이 가고 나서 눈이 딱 마주쳤는데 눈이 빨간 거예요.”
- 나소희 작가
식물원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차곡차곡 이야기를 쌓아가며, 두 사람은 식물원에서의 시간에 스며들고 있었다.
그들의 내일
마지막으로 올해는 어떻게 공간을 꾸려 가고 싶고, 어떤 걸 하고 싶은지 물었다.
“전시는 계속 꾸준히 할 것 같아요. 3월에 기획하고 있는 전시가 있는데, 주제가 ‘내 안의 방’이에요. 코로나의 영향도 있어요. 외부로 나가지 못해서 어쨌든 사람들은 자체적으로 자기의 어떤 자숙 시간을 갖게 된 거잖아요. 같이 어울렸던 사람들이랑 어울리지 못하고, 소규모로 어울리거나 아니면 혼자 있으면서 사회적으로 의도치 않게 뭔가 독립적인 어떤 개체가 된 거잖아요. 그래서 그런 시간들이 많아지다 보니까. ‘내 안에 어떤 방들이 존재할까’ 뭐 이런 것들을 한번 생각해보게 됐어요. 그걸 지인분들에게 같이 하자고 제안을 했어요. ‘내 안의 방’은 진짜 내 마음속에 있는 어떤 것들이 될 수도 있고, 정말 직관적으로 내 방이 될 수도 있는 부분이고요. 한번 스스로를 좀 돌아보자, 그리고 내 안에 어떤 것들을 있는지를 풀어가면서 이것조차도 저는 코로나가 있기 때문에 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 나소희 작가
두 사람은 지금까지 그랬듯, 작업도, 식물원도 꾸준히 즐겁게 하고 싶다고 말한다. 협업 제안도 적극 환영한다고 한다. 다른 장르와 다양하게 이것저것 시도해 보고 싶다고 한다. 월세뿐 아니라 기름값, 전기세 등등 자잘한 고정비가 만만치 않은 상황 속에서 공간을 유지해 나가는 고민도 계속되겠지만, 그러한 고민을 안고 꿋꿋하게 나아가며 애를 쓸 두 사람이라는 걸 안다. 두 사람과의 인터뷰는 사진 한 장을 현상하고 인화하는 과정 같았다. 단편적으로만 알았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 촘촘하게 두 사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변함없는 계절처럼,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하는 그 마음이 오래오래 변치 않길 바라고 바란다.
글 고기은 / 사진 고종환
*<감감무소식 프로젝트>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코로나19, 예술로 기록> 사업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