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예상치 못하게 벅찬 계절의 도시
시카고는 처음부터 마음을 움직이는 여행지가 아니었다.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아주 명확했다. 시카고는 내가 몹시 아끼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완벽한 도시였다. 그 당시 콜럼버스에 살던 친언니와 같은 언니와 휴스턴에서 유학 중이었던 고등학교 친구를 새로운 증서부 도시에서 볼 수 있었다. 처음 밟는 거리를 걷는 설렘보다 익숙한 얼굴을 마주할 기대가 컸다. 단지 그 이유 하나로 주저 없이 항공권을 결제했다. 이때만 해도 기대조차 없던 도시가 한평생 잊지 못할 가을을 안겨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긴 비행 끝에 어둠이 내린 미국 땅에 도착했다. 시카고의 밤공기는 예상보다 훨씬 차가웠다. 콜럼버스에서 날아오는 언니를 기다리며 공항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한 시간을 꼬박 기다리는 동안 몽글몽글한 설렘이 밀려왔다. 마침내 익숙한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다. 언니가 환한 미소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으며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곧장 숙소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짐을 풀고 '칙필레'라는 근처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점에서 늦은 저녁을 해결했다. 짭짤한 닭고기 버거가 주린 배를 든든히 채워주었다. 오랜만에 만난 언니와의 못다 한 대화로 이방인의 도시가 뿜어내던 냉기는 이내 잊혔다. 언니가 예약했던 고즈넉한 분위기의 숙소로 돌아와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렇게 첫날을 무사히 넘겼다.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문밖을 나서자 가을임에도 한겨울처럼 매서운 바람이 몰아쳤다. 바람의 도시라는 별명을 온몸으로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칼바람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서니 사이드 업'이라는 이름의 브런치 카페에서 몸을 녹이기로 했다. 현지인들의 사랑을 받는 식당인 만큼 내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핼러윈데이가 막 지난 시점이라 호박 장식들이 시선을 끌었다.
얼어붙은 두 손을 블랙커피가 부드럽게 녹여주었다. 꽁꽁 언 몸속으로 뜨거운 액체가 흘러드니 인한 노곤함이 가셨다. 곧이어 연어 에그 베네딕트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브런치 맛집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훌륭한 요리였다. 고소한 홀란다이즈 소스와 짭짤한 연어가 입안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톡 터진 수란이 속재료를 감싸며 깊은 풍미를 더했다. 시카고에서의 아주 만족스러운 아침 만찬이었다.
도시를 탐험하고자 밀레니엄 공원으로 향했다. 밀레니엄 공원은 새로운 천 년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장소였다. 도심 한가운데 자리 잡아 수많은 사람의 발길을 끌어당겼다. 중심에는 시카고를 대표하는 조형물인 클라우드 게이트가 우뚝 서 있었다. 스테인리스 스틸을 이음새 없이 붙여 만든 거대한 예술 작품이었다. 매끄러운 은빛 표면은 거울처럼 하늘과 빌딩 숲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독특한 둥근 형태 덕분에 본래 이름보다 '강낭콩'이라는 애칭으로 훨씬 자주 불린다.
거울 같은 조형물 앞에 서서 한참을 넋을 잃었다. 붉은빛으로 타오르는 단풍나무가 은빛 금속을 온통 물들인 까닭이었다. 잎사귀들은 시린 바람을 견디며 강렬한 붉은빛을 뿜어냈다. 잿빛 빌딩 숲 한가운데서 홍옥빛 가을을 마주한 순간 가슴이 뜨거워졌다. 차가운 금속과 새빨간 자연이 빚어낸 풍경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그저 감탄을 연신 내뱉으며 천연색으로 물든 가을날의 시카고를 표현했다. 매년 가을바람이 불어올 때면 어김없이 떠오를 강렬한 기억이 되었다.
짙은 여운을 안고 시카고 미술관에 입장했다. 시카고 미술관은 미국 삼대 미술관 중 하나로 꼽히는 명소다. 미술관에는 고흐와 모네를 비롯한 거장들의 작품이 빼곡히 전시되어 있었다. 붓 터치를 가까이서 바라보며 발걸음을 쉽게 뗄 수 없었다. 캔버스 위로 겹겹이 쌓인 물감의 흔적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화가가 붓을 쥐고 고뇌했던 찰나가 눈앞에 살아 숨 쉬었다. 캔버스에 담긴 깊은 슬픔과 환희가 마음을 두드렸다. 치열한 삶이 예술로 피어난 흔적은 짙은 울림을 주었다.
시선을 가장 오래 붙잡은 작품은 따로 있었다. 에드워드 호퍼가 그린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미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로, 도시인이 품고 있는 짙은 고독을 덤덤한 시선으로 포착해 냈다. 오직 이 그림을 눈에 담고자 미술관을 두 번이나 방문했다. 당시 직장을 다니며 삶에 대한 허무함을 앓고 있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방향을 잃고 텅 비어버린 시기였다. 늦은 밤 식당에 덩그러니 모인 그림 속 인물들이 내 모습과 같았다. 번잡한 도시 이면에 숨겨진 지독한 고독이 캔버스 너머로 전해졌다. 쓸쓸한 그림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서 있었다.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그림에 깊은 애착을 느꼈다. 쓸쓸한 그림 한 점이 무너진 마음을 잠시나마 지탱해 주었다.
예술의 흔적을 뒤로하고 늦은 점심을 해결하러 지오다노스로 향했다. 본고장에서 맛보는 진짜 시카고피자를 주문했다. 과거 고된 노동자들의 주린 배를 채우고자 빵을 깊고 두꺼운 형태로 구워낸 것이 그 시작이었다. 갓 구워져 나온 피자는 엄청난 두께를 자랑했다. 흡사 둥글고 커다란 파이 모양과 같았다. 나이프로 겉면을 가르자 겹겹이 쌓인 치즈가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새콤하고 진한 토마토소스가 치즈의 풍미를 한층 끌어올렸다. 바삭한 도우와 쫄깃한 속재료의 식감이 입안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한입 베어 물 때마다 고소함이 미각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오직 시카고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맛이었다.
다시 밀레니엄 공원으로 돌아가 크라운 분수 앞에 섰다. 거대한 스크린 위로 시카고 시민들의 얼굴이 번갈아 나타났다. 장난스러운 입꼬리를 올린 아이들의 표정에 절로 함박웃음이 터졌다. 이내 자글자글한 주름이 돋보이는 노인의 미소가 화면을 채웠다. 세월의 풍파에 온 힘으로 맞선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여한 없이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초연한 눈빛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말없이 분수대를 바라보며 눈물을 삼켰다. 가을과 겨울에 입술 모양 조형물에서 물줄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게 애석했다. 생동감 넘치는 여름날의 풍경을 상상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사람을 만나러 온 여정에서 뜻밖의 벅찬 계절을 선물로 받는다. 찌를 듯한 칼바람 속에서도 붉은빛으로 타오르던 단풍은 평생 짙은 잔상으로 남는다. 예상치 못한 감동은 처음 마주한 풍경을 찬란한 기억으로 바꾼다. 시리도록 차가웠던 도시는 붉게 타오르는 가을날로 자리를 잡는다.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피어난 빛깔은 유독 선명하다. 매서운 바람은 아름다움을 깎아내리지 못한다. 살갗을 에이는 추위마저 삶을 선홍빛으로 채운다. 인생의 혹독한 시기를 지나는 동안에도 빛나는 찰나는 반드시 존재한다. 시카고의 강렬한 붉은빛을 방패 삼아 다가올 차가운 시간들을 견뎌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