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 없이 쏟아진 하얀 기적

시카고, 가을을 하얗게 덮은 첫눈 속을 걷다

by 키위

다음 날 허기를 달래기 위해 일찍이 밖으로 나섰다. 평소 미국 식당의 거대한 음식 양은 늘 큰 고역이었다. 절반도 먹지 못하고 숟가락을 내려놓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퍼플 피그'라는 귀여운 이름의 브런치 식당은 달랐다. 여행 내내 노래를 부르던 블루베리 팬케이크를 주문했다. 적당한 크기와 기분 좋은 단맛이 입맛을 돋우었다. 블루베리 팬케이크는 시카고에서 접시 바닥이 보일 때까지 긁어먹은 유일한 음식이었다. 다시 이곳을 찾는다면 주저 없이 같은 메뉴를 고를 것이다.




가을은 찬란한 색채로 마음을 들뜨게 한다. 짙붉은 단풍을 바라보는 일은 즐겁다. 그러나 일 년 중 가장 낭만적이고 사랑하는 계절은 단연코 겨울이다. 매년 첫눈 소식이 들려올 때면 방울방울 맺힌 겨울의 추억들을 하나둘 꺼내어 본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뽀드득 걷는 소리가 좋다. 쏟아지는 함박눈을 바라보며 핫초코를 마시던 기억도 매우 아낀다.


식당 창밖을 무심코 바라보다 두 눈을 의심했다. 11월의 하늘에서 하얀 눈송이가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섰을 때 세상은 온통 새하얀 빛으로 덮여 있었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예고 없이 쏟아첫눈이었다. 시카고는 가장 사랑하는 두 계절을 한 번에 내어주었다. 기대조차 없던 도시가 생애에서 가장 의미 있는 여행지로 자리 잡는 순간이었다.


길거리에 소복이 쌓인 눈을 밟으며 어린아이처럼 펄쩍펄쩍 뛰었다. 뺨을 때리는 눈송아리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뜻밖의 눈보라는 어제까지 붉게 타오르던 단풍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칠해졌다. 차가운 겨울 공기를 힘껏 들이마시며 눈부신 설경을 만끽했다. 그렇게 시카고는 마음속 깊이 영원히 바래지 않을 환상적인 풍경을 새겨 넣었다.



눈으로 덮인 거리를 뚫고 약속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휴스턴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고등학교 친구와 재회했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았지만 어제 헤어진 사이처럼 편했다. 먼저 추위를 피하려 근처 찻집으로 들어갔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사이에 두고 밀린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 당시 십 년이라는 세월이 쌓아 올린 견고한 우정은 찬 바람을 막아주는 외투와 같았다. 타국에서 절친한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그 자체로 평온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다 보니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친구가 예약해 둔 더 시그니처 룸으로 향했다. 이곳은 존 핸콕 센터 높은 곳에 자리 잡아 전망이 아주 훌륭했다. 첫날밤 이곳에서 언니와 함께 짙은 어둠을 수놓은 화려한 야경을 감상했다. 이날은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새하얀 설경을 응시했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도시는 하얀 이불을 덮은 듯 고요했다. 같은 공간에서 전혀 다른 두 개의 세계를 경험했다. 이른 겨울 풍경 한가운데서 오랜 친구와 또 다른 추억을 나누어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시내 구경에 나섰다. 길거리에는 벌써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장식들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이틀 먼저 도착한 현지인 행세를 하며 친구를 이끌었다. 가장 먼저 클라우드 게이트로 향했다. 거대한 은빛 조형물 위로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전날 붉은 단풍을 맹렬히 반사하던 표면은 어느새 차가운 겨울을 품고 있었다. 날씨에 따라 색다른 빛깔을 뿜어내는 조형물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우리는 눈 덮인 강낭콩 앞에서 쉴 새 없이 사진을 남겼다.


강낭콩을 뒤로하고 시카고 미술관을 다시 찾았다. 전날 한 번 둘러본 곳이지만 친구를 위해 기꺼이 다시 입장했다. 처음 방문했을 때 미처 보지 못했던 디테일을 천천히 살폈다. 좋아하는 작품을 두 번이나 감상하는 일은 생각보다 더욱 즐거웠다. 친구 역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색채의 결들을 들여다보았다. 같은 장소라도 누구와 함께 걷느냐에 따라 감상의 농도가 달랐다. 예술이 주는 울림을 공유하며 셋째 날의 오후를 채워 나갔다.




가을을 기대하고 떠난 길에서 갑작스레 당도한 겨울을 껴안는다. 예상과 빗나간 날씨는 오히려 짙은 잔상으로 남는다. 예측할 수 없는 날씨처럼 삶의 여정도 수많은 변수로 가득하다. 때로는 엉뚱한 계절이 불쑥 찾아와 인생의 색채를 송두리째 뒤바꾼다. 변수를 움켜쥐려는 헛된 노력을 내려놓고 쏟아지는 눈송이를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한다.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때 비로소 내면의 여유가 피어오른다.


오랜 친구와 함께 걷는 길은 어떤 바람에서도 굳건하다. 꽁꽁 언 손을 마주 잡고 웃음을 터뜨리는 찰나가 삶의 의미를 다시금 일깨운다. 차가운 눈보라에 맞서 싸우는 발걸음을 내일의 이정표로 삼는다. 시카고가 흩뿌린 하얀 기적을 시린 가슴을 데우는 다정한 온기로 간직한다. 시카고 여행을 통해 앞으로 겪을 시련들마저 두 팔 벌려 환영할 용기를 품어 본다.


화, 금,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