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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키위 Feb 16. 2023

오만과 편견

 수렁에 빠진 사람을 못 본 체 할 순 없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나는 나와 인연이 닿은 모든 이들을 챙기려 애썼다. 지인이 우울하다고 하면 새벽이라도 얘기를 들어주었고, 잘 어울리지 못하면 최대한 가까이 지내려 노력했다. 내가 이 사람에게는 중요한 사람은 되지 못했도, 내가 없으면 누가 이 사람을 지지하겠냐고 생각했던 때였다.




 그와 처음 약속을 잡고 만났을 때, 이전의 모습과는 전혀 달라 조금 놀랐다. 기대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먼저 번호를 물어온 것은 그였기 때문이다. 다만 그 기대는 말 그대로 없다시피 한 기대였다. 연애할 생각이 있냐는 질문에 나는 지금은 없다고 답했다. 그는 서울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나와 함께 즐길만한 것들을 찾아다녔다. 길을 못 찾아 헤매는데도 불평 하나 없는 내가 좋게 보였는지, 그는 자꾸만 무언가를 사주려 했다. 여러 제안을 거절했지만 밀크티만큼은 거절할 수 없었다.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는 내내 그는 그의 과거 연애사와 이상형 따위에 대해 얘기했다. 나에게서 연애 생각이 없다는 답변을 들은 뒤 그는 연애 감정과 인간적인 호감을 구분하기 힘들다는 말을 꺼냈다. 그는 묻지도 않은 여러 일들을 긴 시간을 들여 말하다 자신이 오랜 시간 약을 복용하고 있음을 고백했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아프면 병원을 가는 게 맞다고 맞장구치자, 이 말을 듣고 놀라지 않는 사람은 처음 봤다며 신기해했다. 그는 자신의 약과 현 상태에 대해 다시 오랜 얘기들을 꺼냈고, 무용 아닌 무용담이 끝나자 그는 여행을 제안했다. 여행은 부담스럽다고 단호하게 말하려 했으나, 그 대답을 들은 그가 받을 상처가 눈에 훤했다. 나는 나중에 생각해 보자고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걸려온 그의 다음 연락은 연애상담이었다. 그러나 결이 다른 종류의 연애였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애인과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일일이 보고 받고 싶어 했고, 종국에는 그의 애인에게 직접 연락하여 폭언을 쏟아내고야  만 것이다. 이렇게는 못 산다는 애인의 말에, 그는 애인을 위해 헤어지는 것이 좋겠냐고 나에게 물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당연히 헤어지는 게 맞다고 답했다. 여자친구의 부모님에게 삼십 통이 넘는 폭언의 메시지와 전화를 받은 애인을 진심으로 위한다면, 이별이 맞다고 말했다. 그는 내 대답을 듣고 확신이 선 모양이었다. 그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예전에 여행 얘기를 기억하냐고 물었다. 먼저 닥친 일부터 정리하는 게 좋겠다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무렵의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일적인 것들은 능력이 그 기준이었고, 심적인 것들은 여유가 기준이었다. 그리고 나는 여유로웠다. 더는 기분 나쁜 일에 감정을 소모하지 않았고, 사소한 일에 애쓰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예외였다. 나는 그의 말에서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제야 오만을 알았다. 나는 생각보다 성숙하지 못하고, 사람에게 사람이 필요하다면 그게 내가 될 수 있다고 섣불리 생각했다. 그때부터 나는 그의 연락을 피했다. 여행 얘기는 무산되었고, 또 만나자는 그의 제안에는 있지도 않은 애인 핑계를 댔다.


 사람에게 의무감을 느낄 때가 있다. 그 사람이 유약할 때는 더욱 그렇다. 내 언행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이 받을 상처에 대해 미리 걱정하거나, 그 사람의 연락에는 꼭 답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이다. 나는 이것이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도한 예의는 종종 오만으로 발전하곤 한다. 수렁에 빠진 사람에게 밧줄을 던져줄 순 있어도, 같이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며 뛰어드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가끔 그에게서 연락이 올 때가 있다. 그는 내가 더 이상 쓰지 않는 SNS 계정을 통해 연락해 온다. 그 알림을 무시하면서, 한편으로는 경계심이 들기도 한다. 그와의 만남이 내 편견이 되어 섣부른 평가를 내리진 않을지, 또 다른 대상화의 수단이 되는 것은 아닐지. 그가 내 SNS를 모른다는 사실이 다행이라고 느낄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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