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올해 부국제 리뷰를 남기려고 보니, 작년 부국제 리뷰도 마무리 짓지 못했다는 게 마음의 짐처럼 남았다 . 이미 일년이나 지났지만, 그저 기억에 의존하여 러프하게 남기려 한다.(게스트 발권이 온라인 예매로 변경되며, 실물 티켓이 없다보니 정작 내가 그해 어떤 영화를 봤는지 기억을 못할까봐 남기는 흔적이다.)
<알카라스의 여름> 8일(토) 19:00
스페인 농업의 몰락을 3대로 구성된 대가족을 통해 담담히 보여주는 영화로, 감독 카를라 시몬의 전작 <프라다의 그해 여름>처럼 아이들의 눈을 통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스페인에 가면 먹어봐야 한다는 납작복숭아. 영화 속 솔레가족은 이 납작복숭아 과수원을 3대째 운영하고 있다. 일단 대가족이기 때문에 등장인물 파악부터 필요하다. 할아버지 – 아빠, 엄마, (첫째아들) 로제르, (둘째딸) 마리오나, (막내딸) 이리스 – 고모, 고모부, (사촌) 쌍둥이 형제 – 막내고모, (사촌) 여자아기. 등장인물을 이리 소개하는 이유는 작품의 주인공들이 로제르, 마리오나, 이리스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영화 <알카라스의 여름>은 농업의 몰락을 밑바탕으로 놓고, 그로 인한 어른들의 복잡한 사정을 원경에 두고, 이를 바라보는 아이들을 전경에 배치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거시적인 이야기를 미시적인, 특히나 아이들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것은 감독 카를라 시몬의 전작 <프리다의 그해 여름>의 영향일 것이다. 그리고 감독은 자신의 특기를 이 영화에서도 발휘한다.
솔레가족은 3대째 과수원을 운영하고 있지만, 땅에 대한 소유권이 없다. 증조할아버지가 지주의 목숨을 구해준 보답으로 지금껏 땅의 관리와 경작을 맡고 있으나, 현재 땅의 소유주인 지주의 증손자는 땅을 갈아엎어 태양전지 사업을 하고자 한다. 아빠는 수확 때까지는 우리 소유라고 고집을 부려보지만, 이를 보증하는 계약서 한 장 없다.
이로 인해 어른들은 와해하고 분열하는데, 이를 아이들을 통해 보여준다. 아빠와 고모부 사이가 틀어져 쌍둥이들과 놀 수 없게 된 이리스는 아빠의 부름에도 나무 뒤로 숨어버린다. 아빠와 다툰 막내고모가 바르셀로나로 떠나버리자 마리오나는 그간 준비해온 마을축제 무대에 서지 않는다. 몰래 키워온 대마를 아빠가 태워버리자, 늘 아빠에게 인정받고 싶던 로제르마저 수로를 열어 과수원을 물바다로 만들어버린다.
어른들의 복잡한 사정은 차치하고, 이렇듯 아이들 눈에 이 모든 분란의 원인은 아빠다.(사실 그렇기도 하다.) 농업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가 서서히 해체되어 가는 과정은 아이들의 눈을 거쳐 관객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이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사실상 이야기의 화자이자 관찰자인 마리오나가 어른들의 갈등을 조용히 지켜보는 옆모습은 자주 바스트샷으로 등장한다.
그럼에도 풀샷으로 잡힌 대가족의 점심식사 풍경, 아마도 할아버지가 알려줬을 노동요를 마리오나가 흥얼거리고, 이후 이리스가 가족들 앞에서 부르고, 그 노래에 할아버지가 음을 얹는 광경은 놀랍도록 아름답다. 그리고 그 장면에서 카메라는 가족구성원 한명 한명의 얼굴을 세세히 담는다.
그리고 영화는 솔레가족이 지금과 같이 갈등하고 와해하게 된 원인으로 차츰 다가간다. 태양전지로 땅을 덮어버리려는 지주, 헐값에 땅을 파는 농부들, 그 땅을 사들이는 투자회사, 복숭아를 절반 가격에 사가는 대형마트. 결국 농사가 돈이 되지 않는 구조에서 농촌은 유지될 수 없고, 그들의 터전은 사라져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과일의 공정가격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 ‘알카라스의 여름’이었다.
<너와 나> 9일(일) 16:00
비전 중 한편을 봐야하기에 선택한 영화로, 배우 조현철이 연출한 영화다. 그러나 그다지 인상적이지는 않았고, 다소 실망스러운 작품이었다.
한국 땅에서 나고 자란 우리에게는 일종의 공동기억이 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연상되는 사건들. 기억 어딘가에 묻혀 있다가도 몇 가지 정보만으로 떠오르는 기억들. 잊으려 해도 잊혀 지지 않는 잔상들. 그것은 개인의 기억이라기보다 공동의 기억이며, 각자의 기억 속에 다른 형식으로 저장되어 있다가 같은 기억으로 떠오른다.
그래서 극 안에서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영화 ‘벌새’에서 은희의 언니가 성수대교를 건넜을까 불안해하고,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칠봉이가 나정이와 만나기 위해 이미 삼풍백화점에 도착한 게 아닐까 걱정한다. 우리는 등장인물들이 있는 저 시절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기억’하기 때문이다.
영화 ‘너와 나’에서도 지금 내 눈앞에 살아 숨 쉬고 있는 듯한 여고생들이 있는 저 시절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수학여행, 안산, 몇 가지 정보만으로 우리는 그 시절을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영화는 그 정보를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인다. 오히려 주인공 새미와 하은 주위를 맴돌고 있는 죽음의 메타포를 지속적으로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기억하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리하여 관객들은 영화 속 그들의 (어쩌면) 가장 아름다웠을 시간과 우리의 공동기억 속 시간을 병치하게 된다. 마치 과거 시제 둘을 동시에 놓고 영화를 보게 되는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영화 안의 시제도 점점 흐트러진다.
영화의 전체적인 스토리 상 새미가 수학여행 가기 하루 전날 일어난 일이 맞건만, 이것이 이미 수학여행을 다녀온 새미가 꾸는 꿈인지, 수학여행 후에 하은이 과거를 회상하는 꿈인지, 그것도 아니면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된 평행우주를 이들이 돌고 있는 건지도 모호하다. 그래서 이런 모호함 때문에 이들이 어디선가 분명 다시 만날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영화는 주인공 새미와 하은에게 있어 어쩌면 아름답고 그리하여 특별한 시간을 보여주기 위해 장르적으로는 GL을 가져온다. 장르팬들에게 퀴어와 GL(girl’s love) 혹은 BL(boy’s love)은 섞일 듯 섞이지 않는 장르인데, 아무래도 GL이나 BL은 현실보다는 좀 더 가공된, 예쁘고 잘생긴 애들이 서로 사랑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런 의미에서 ‘너와 나’는 GL의 공식을 착실히 따라가는 작품이라 할 만하다. 탈색된 듯 뽀샤시한 화면, 쿨한 인기녀지만 사연 많은 하은, 소심한 찡찡이지만 귀여운 새미, 거기다 묘령의 대학생 오빠, 하은의 베프 다애까지 새미에겐 (혼자만의) 라이벌도 있다. 그래서 영화 초반 등장하는 훔바바가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장르적 공식에서 벗어나 영화적 재미를 주는 부분은, 여고생들 사이에서 있을 법한 감정, 말투, 관계 등을 구현해 낸 새미와 하은 두 캐릭터다. 내 단짝이 나랑 제일 친했으면 좋겠고, 눈앞에 있지도 않는 존재들을 신경 쓰느라 정작 단짝에게는 짜증만 내게 되는 그런 경험은, 굳이 좋아하는 상대가 아니더라도 친구에게도 한번쯤은 느껴봤으리라. 그런 청소년 시절 부끄러운 기억을 끄집어내 오히려 극중 캐릭터에게 현실감을 부여하고, 관객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게 이 영화의 매력이다.
귀여운 캐릭터들과 장르적 틀 안에 무거운 소재와 주제를 결합한 ‘너와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