삑사리 여행기
이서진이 대학 시절에 거주한 뉴욕을 방문하는 컨셉의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다.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미국에 왔으니 햄버거를 먹자고 절규하는 제작진을 이끌고 이서진이 간 첫 식당은 무려 중식당이다. 우리 동네에도 만리장성이 있는데 왜 굳이 맨하탄에서 중식당이냐고 의아해하던 제작진은, 막상 도착한 이후 아주 맛있게 잘 먹는 모습을 보인다.
사실 우리는 여행지에 가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기대대로 계획을 세워 움직이려 하지만, 결정적으로 기억에 오래 남는 포인트는 의외의 순간에 찾아오곤 한다. 이런 점에서 제작진의 맨하탄 중식당행은 여행 중 맛보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기억에 남을 삑사리 정도가 아닐까 한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런던의 여행지를 추천해달라는 질문을 받으면 주저 없이 말하는 곳이 Viet Food라는 베트남 음식점이다. 16시간 동안 천천히 고아냈다는 소뼈 국물 베이스의 쌀국수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바와 달리 굉장히 짙은 사골국의 향을 낸다. 첫맛에는 약간의 심심함을 느낄 수 있지만 이내 그 깊은 맛에 또 한 숟가락 하게 만드는 요물이다. 진심으로 가까운 미래에 런던을 또 방문할 일이 있다면 주저 없이 첫 끼는 Viet Food의 쌀국수가 될 거다. 마지막 끼니도.
하지만 그 날부터 시작하여 근 2주를 달고 살았던 미미한 몸살 기운이 아니었다면 Viet Food와의 운명적 조우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런던답지 않게 맑고 청명한 며칠을 보낸 후 하필 얇게 입고 다닌 날 강풍과 폭우를 온몸으로 맞았고, 뭐라도 몸보신할 음식이 필요했다. 어쩐지 날씨가 좋더라니. 이런 내 몸 상태를 캐치한 현지의 친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Viet Food로 날 이끌었다. 거부하고 싶었으나 거부할 수 있는 힘도 부족했다. 그렇게 투덜대는 마음으로 가게 된 식당이 Viet Food였다.
세대를 거듭하는 긴 기간 동안 아시안 이주민들이 유럽에서 살아왔으며, 그들이 생계를 꾸리기 위해 뿌리내린 식당이 많은 곳이기 때문에 사실 유럽에서 찐-아시안 맛집을 찾는 건 꽤 쉬운 일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때의 나에게 런던에서 아시아 음식을 먹기 위해 구글맵을 검색하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계획대로 일정이 진행되었다면 이런 맛은 미처 경험하지 못하고 떠났을 것이다. (그리고 Viet Food 없는 런던 여행 기억은 상상하기도 싫다.) 이렇게 가끔씩 여행은 의외의 삑사리를 통해 뇌리에 박히는 행복한 경험을 선사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