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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요주 Apr 04. 2021

20191103 리버풀 구디슨 파크 직관 후기

[토트넘-에버튼전] 손흥민 골보다 더 보기 힘든 것을 봤으니 그걸로 됐어

영국 여행을 계획하면서 가장 먼저 일정을 잡은 것이 프리미어리그 경기 관전이었다. 어릴 때부터 축구를 좋아했던 나로서는 매 주말마다 TV에서 보던 것을 맨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막상 영국 여행이 정해지고 표를 구하려고 스텁허브에 들어가 보니 유명한 팀들의 경기는 가격이 상상 이상이었다. 아직 입사 전이었던 나는 원래 언더독을 좋아한다는 핑계를 금새 만들어냈고, 대형구단인 리버풀 대신 에버튼 경기를 예매하였다. 물론 상대는 토트넘이었다. 손흥민은 포기하는거 아니다.


그 날은 아침부터 눈부시게 맑은 날씨였다. 영국에 온 이후로 이 정도로 하늘이 쾌청한 날이 있었나 싶었다. 찌부둥했던 런던에서의 일주일을 보내고 리버풀에 와서야 처음으로 이 섬의 아름다운 하늘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축구경기 보기에 이보다 좋을 수는 없었다. 기분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일요일이라 오후에 있을 경기를 앞두고 리버풀 대성당에 먼저 가보기로 했다. 교회를 다니지만 성당은 늘 동경의 대상이었고(멋있기도 하고, 뿌리는 같지 않나), 성공회의 나라에선 어떻게 미사를 드리는 지도 궁금했다. 성당에서 드린 예배는 그 전 주에 참석한 힐송 예배와는 다르게 차분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동시에 큰 공간에서 오는 위압감과 벅참을 느낄 수 있었다. 성당에서 드린 예배는 다음 포스팅에..!

리버풀 대성당에서 내려다 본 시내. 카메라 렌즈 새로 닦은 느낌이었다.

미사를 드리며 영혼을 채운 뒤 주린 배도 채웠다. 먹을게 많지 않은 척박한 곳이라지만 그건 영국의 오리지널한 음식이 많지 않다는 뜻인걸까? (최소한) 다른 나라에서 들여온 음식은 맛있는 곳이 많았다. 영국 전역에 여기저기 체인점이 많았던 어니스트버거에서 혀와 내장지방이 흡족한 한 끼를 해결했다. 이제보니 그 죄책감을 이기기 위해 음료로는 제로콜라를 먹은 모양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폭탄도 이런 폭탄이라면 온몸으로 끌어 안아야지

에버튼의 홈구장인 구디슨 파크는 리버풀역에서 버스를 타고 조금 이동해야 했다. '빌리 엘리어트'에서 보던 오밀조밀한 주거단지를 지나니 벽돌집 사이로 빼꼼히 구디슨 파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1892년에 개장하여 당시 영국의 왕이었던 조지 5세가 말을 타고 들어와서 관전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현대적인 외관이었다. 주변의 붉은 벽돌 가운데 진한 파란색 외벽이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동네 한 가운데 구장이 떡하니 있다. 축세권이다.

스텁허브를 통해 예매한 중고 티켓이 진짜 통할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지만 무사히 티켓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구장 내부도 특별히 나무랄 데가 없었다. 조금 미리 들어가 피치를 구경했다. 가만보니 피치 한 쪽 끝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도 보안요원에게 허락을 구하고 코너 플래그 끝에 서봤다. 한국에서도 못 밟아본 경기장 잔디를 리버풀에서 밟아보았다. 항구도시라 리버풀 사람들은 런던에 비해 더 억세고 무뚝뚝하다고 하더니 그렇지만도 않았다. 피치를 나가며 떨리는 마음을 어렵게 다잡고 보안요원에게 고맙다는 표시를 하였다.

이제 사람들이 속속 들어오기 시작해 자리를 찾아가서 앉았다. 자리에 앉고나니 그 때까지 간과하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여긴 리버풀에 있는 에버튼 홈구장이고, 나는 홈팬 구역에 앉아 있으니, 나는 에버튼을 응원해야 했다. 내 국적이 어디인지, 내가 손흥민을 응원하러 왔는지 그 목적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에버튼을 응원하지 않으면 온전히 이 축구장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실존적인 문제였다. 이제 보니 여긴 항구도시인 리버풀이 맞았다. 경기가 시작한 뒤 잘 풀리지 않자 주변에서 걸걸한 욕이 피치를 향해 날아갔다. 영국식 영어 리스닝은 생각보다 어려웠지만, 대충 들어도 부산 분들 욕하는 것은 댈 것도 아니었다. 손흥민이랑 비슷하게 생긴 나를 흘긋 보며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오늘만큼은 에버튼 팬이 되어보기로 했다.  

손흥민을 이렇게 찍은 것도 굉장한 용기의 발로였다.

에버튼의 파란 심장을 이식받기로 하니 생각보다 순탄하게 경기를 볼 수 있었다. 파란 옷이 공을 잡으면 박수를, 흰 옷이 공을 잡을 땐 조용히 하고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렇게 한국에서 TV로 경기를 보는 것보다 조용하게 경기를 관람하고 있는 와중에 드디어 사단이 터졌다. 손흥민이 사고를 쳤다. 에버튼 팬들의 사랑을 가장 크게 받는 선수에게 부상을 입히고 퇴장을 당하고 말았다. 차라리 골을 넣지... 온 구장이 난리도 아니었다. 이럴 때 가만히 있으면 티가 나기 때문에 함께 야유를 했다. 미안했지만 남은 여행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 숙소에 무사히 돌아가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손흥민 골보다 보기 어렵다는 손흥민 퇴장. 숙소에 무사히 돌아가는 게 꿈이고 목표가 된 순간이었다.

끝나기 1분 전까지 계속 1-0으로 지고 있던 상황이라 매우 초조했다. 따뜻한 리버풀 사람들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한 문장에 욕 하나씩은 섞어 말하곤 했다. 그러다 결국 에버튼은 극적인 동점골을 넣고 1-1로 경기는 아름답게 마무리 되었다. 경기장을 빠져나오면서 주변에 있던 홈팬들과 웃으며 인사할 수 있었다. 속은 쓰리지만 웃으며 얘기하는 그 때의 경험은 훗날 회사생활을 하는 나에게 큰 자양분이 되어준 느낌이다. 어쩐지 종일 좋은 일만 일어난다 싶더니, 하루도 편히 지나가는 날은 없는 여행임이 틀림없음을 다시 한 번 보여준 하루였다.

마지막까지 구장의 파란 외관은 이쁘긴 했다. 조금 지쳐서 초점이 나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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