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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초랑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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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경진 May 23. 2022

“자신의 치졸함과 싸우는 거예요”

산초의 입양을 주저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이 나의 바닥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작업이어서였다.


2013년, 동생이 갑자기 고양이를 데려왔다. 동생은 친구가 길냥이를 구조했으나 키울 상황이 아니라며 데려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우리 가족은 한 번도 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고 심지어 나나 동생이나 그다지 동물을 좋아한 것 같지도 않았지만, 딱한 사정에 이끌려 덜컥 맡아버렸다. 이런 식의 인연은 아니라고도 생각했으나 거절하지 못했다. 실제로 보니 귀엽기도 했고, ‘반려동물을 들인다면 역시 고양이지!’라는 허세도 있었으며, 당시엔 ‘냥줍’이 인기이기도 했다. (휴, 과거의 나 대단했군…)


하지만 호이(턱시도 고양이의 이름이었다)를 데려온 동생은 불규칙하게 일하는 프리랜서였다. 집에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더 많기도 했다. 바빠도 규칙적으로 회사를 다닌 내가 순식간에 주양육자가 되었다. 고양이는 독립적인 존재라 손이 덜 간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신경을 안 써도 된다는 건 아니다. 당시의 나는 사랑이 아닌 책임감으로 호이를 돌봤다.


그러다 6개월쯤 지나 호이를 잃어버렸다. 명절을 앞두고 고양이 호텔에 가던 중, 케이지 문을 열고 나가버린 거다. 처음 케이지에 들어간 게 중성화 수술 때였고, 이날이 두 번째였다. 케이지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이 하나도 없으니 탈출은 공포 때문이었을 거다. 그 즉시 주변을 찾아다녔지만, 예약해둔 고속버스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집을 선택했다. 수색을 포기했다는 것이 정확하겠다. 명절을 보내고 서울로 와서 꾸준히 호이를 찾아다니고 혹시 몰라 집 근처에 사료를 두기도 했지만,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건 그저 나의 죄책감을 없애기 위한 위선에 불과했다. 최근에 본 연극에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잃어버리고 괴로워하던 인물이 이런 대사를 한다. “사람들한텐 아버지 잃어버렸다고 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그때 귀찮아서 아버지 버린 거 같아요.” 내 얘기인가.


죄책감도 죄책감이었지만, 함께 있을 때도 자주 짜증을 냈다. 가뜩이나 오래된 집이 모래와 먼지로 가득한 고양이 화장실 때문에 더욱더 더러워지는 게 싫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 때까지 일로 가득한 사람에게 놀아달라고 달려드는 게 귀찮았다. 밤의 ‘우다다’는 무섭기도 하고 숙면을 방해해서 방문을 닫아버렸다. 날 좀 가만히 놔두라고 소리치고 싶을 때도 많았다. 괜찮은 사람이고 싶고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도 생각했지만, 고양이를 통해 형편없는 사람이라는 게 증명됐다. 나를 이런 사람으로 만드는 게, 그런 나를 보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산초의 입양을 고민할 때 “내 바닥을 다시 보게 될까 봐 무섭다”는 말을 친구한테 했었다. 사실이었다. 또다시 나를 싫어하기는 싫었다. 그때 친구가 말했다. “그동안 너도 성장하지 않았겠어?” 혜향이와의 두 번째 만남(성미산 산책)을 끝내고 빵을 사러 들어간 상황이었는데, 빵집에서 울 뻔했다. (진심) 나보다 나를 더 믿어주는 그 말에 조금은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물론 고민은 그 이후로도 계속됐지만…)


얼마 전, “반려견 훈련은 나의 치졸함과 싸우는 일”이라는 강형욱의 말을 보고 호이와 함께 했던 6개월이 떠올랐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모두 했던 과거를 굳이 글로 쓰는 건 반성하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9년 사이 나는 친구의 바람대로 정말 성장했을까. 얼마나 큰 성장을 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모든 걸 내 의지대로만 하지 않는 사람은 됐다. 준비하고 배우는 사람은 됐다. 집이 망가져도 10번 중 3번만 화내는 사람은 됐다. 1일 2회의 산책을 해내고 터그놀이도 같이 하는 사람은 됐다. 일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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