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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돼지터리언국 총리 Jan 06. 2019

<아죽생 서평>나는 한니발보다 스탈링이 더 좋다

#단상 #에세이 #서평


<한니발보다 스탈링이 더 좋은 것에 대한 단상>

    '성소는 속세에 있을 때 더 빛이 난다'

    요즘 무척 재밌게 읽고 있는 책이 있다.

    워낙 유명한 책이라 이름만 대도 다들 알만한 책이다.

    바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어크로스)라는 책이다.

    저자인 김영민 교수는 '추석은 무엇인가 되물어라'라는 칼럼으로 우리에게 더 친숙(?)하지만, 사실 나 같은 피래미 기자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펜을 잡은 지도 오래되고, 글 내공도 깊은 분이다.

    이 책은 매우 생소한 소재들로 가득해 보이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하나다.

    바로 세상에 대한 '선(先) 냉소와 후(後) 사랑'이다.

    김영민 교수는 이 책에서 홍상수, 한니발, 무신론자 등등 체제에 맞서는 혹은 반하는 인물과 소재를 나열해 가며 세상에 날 선 비판의 화살을 꽂는다. 그런 뒤에는 '그럼에도'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교훈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던진다.

    책을 펴드는 순간 블랙홀에 빨려들어 간 것처럼 깊숙이 빠져들게 되는 그의 필력은 아주 묘한 느낌을 준다

    전문 글쟁이보다는 교수라는 직업에 더 무게 중심이 있기 때문에 문체가 만연체 같기도 하지만, 적절하게 꽂아 넣는 위트와 유머는 책을 완주하는 데 힘을 주는 에너지드링크 같은 역할을 하며 마지막까지 독자를 응원한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속칭 '깬다'스러운 유머에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지고, 이런 어른이 옆에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내용적으로도 세상에 대한 깊은 사유와 박식함에 감탄을 멈출 수가 없다.

    가감할 것 없이 책 내용 대부분에 동의가 되고, 무릎을 탁탁 치며 읽게 될 정도로 훌륭하다. 그러나 비판적인 독서를 하는 건강한 독자로서 나는 쉴 새 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책을 본 것은 아니다.

    오늘은 그래서 찾고, 찾고 또 찾아서 책에서 내가 동의하지 않았던 부분에 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책에서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을 고르라면, 가장 처음 읽었던 챕터인 '영화에서' 부분이다.

    그중에서도 앤서니 홉킨스가 발군의 연기를 보여준 한니발 렉터에 대한 이야기가 나는 마음에 쏙 들었다.

    저자는 선함에서 악함을 마주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한니발의 악함에서 선함을 발견하면서 그에게 매료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한니발에 대해 이런 평을 남겼다.

    '기존 세계를 단순히 불평하거나 일탈행위를 일삼는 수준을 넘어, 기존 세계의 질서와 구별되는 새로운 질서를 구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은 독립적인 세계로 불릴 자격을 얻는다'

    이 표현은 사회 규범을 어기며 반사회적 동물이 된 악인에게는 역대 내가 본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이런 평가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일단 기본적으로 희대의 연쇄 살인마에게 매료되지도 않을뿐더러 그가 홀로 외떨어져 새로운 질서를 구축한 것에도 그다지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책에도 잘 나와 있지만, 우리는 그간 학자에게서 무지와 편견, 긴 역사에 부박함, 예술지상주의에서 세속의 극치, 성직자의 주머니에서 더러운 돈, 혁명가에게서 보수성, 군자에게서 파렴치함, 권좌에서 도둑놈, 성소에서 추악함을 너무도 많이 목도해 왔다.

    그래서 이런 세상에 반기를 들고 일어서는 영웅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니발처럼 저 멀리 떨어진 바위섬 위의 중세 성처럼 세상과 동떨어진 자신만의 질서를 세워 세상을 경멸하는 것이 답은 아니다.

    나는 그보다 작게는 FBI의 관료주의와 크게는 세상의 모순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클래리스 스탈링의 위대함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대학 내내 내가 천착했던 분야는 종교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름마저 종교적 색채가 강하게 묻어나는 믿을 신(信), 마을 동(洞)이란 글자가 합쳐진 믿음 꼴이란 뜻의 '신동리'란 동네서 자랐다. 

    우리 가족뿐 아니라 동네 사람들 대부분은 마을 꼭대기에 있는 교회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살았다.

    거기에다가 사회과학 동아리에 가입했지만 관련 서적을 다른 친구들처럼 잘 이해하는 머리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강점이 있는 종교에 더 빠졌었던 것 같다.

    당시 내가 가장 집중했던 주제는 '나는 왜 기독교도가 됐는가?'였다.

    모두가 느낌으로는 알고 있지만, 명확하게 설명을 못 하는 종교적 현상이 있다.

    바로 절에 갔을 때 우리가 느끼는 안락함이다.

    특히 기독교 신자인 나에게는 이 느낌이 묘하게 다가왔는데, 산을 한참 타고 다니던 시절에는 등산로 중간 중간에 보이는 절이 있으면 꼭 들어가서 심신의 평안을 얻어 나오곤 했다.

    그 풍경 소리만 짱그랑 짱그랑 들려오는 조용한 산사에서 느끼는 안락함은 마치 원래부터 내가 거기에 있던 것처럼 어머니의 품마냥 포근했다.

    솔직히 말하면 한반도에서 아니 범위를 조금 더 넓혀 동양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종교에 관해서는 맞춤옷처럼 불교가 기독교보다는 훨씬 잘 맞는다.

    뭐 신토불이라면 신토불이일 수 있고, 오랜 세월 거쳐 내려온 공기 같은 문화적 배경이 동양사람들은 불교에 더 맞춰져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교리 역시 진리를 찾아 끊임없는 수행을 강조하는 불교는 동양적 하드 코어한 마조히즘에 딱 들어 맞는다.

    반면 기독교는 일단 문화부터가 서양식이라 하나부터 열 가지 다 새로 배워야 한다.

    교회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성찬식부터 해서 중보기도, 성경에 등장하는 용어, 하다못해 성가까지도 노란 피부의 동양인과는 잘 안 맞는다.

    이런 사고의 물꼬를 몰고 몰고 내려와 내 지력의 한계에 매달렸을 때 '아니 그런데 왜 한국에는 그렇게 많은 기독교인이 있지?', '불교보다 기독교가 어필되는 측면이 뭐지?'라는 질문에 다다랐다.

    몸에 맞지 않는 치수가 반사이즈 정도 큰 기성복을 입은 것 같은 불편함을 감수하고도 내가 기독교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것은 바로 '성소는 속세에 있을 때 더 빛이 난다'라는 단순한 진리 때문이었다.

    산사의 고매함도 좋지만, 성직자의 비리와 성도 간 아귀다툼 속에서도 세상과 뒤섞여 등댓불처럼 불빛을 방황하는 영혼에게 쏘아주는 그 치열함이 좋았던 것이다.

    한니발처럼 개똥같은 이 세상을 등진 채 모든 사회 규범과 원칙을 깡그리 무시하고, 중세시대 성 안에 자기만의 세계를 세우는 것도 매력적이지만, '쉣 더 뻑'같은 FBI 조직에서 모난 돌처럼 도드라져 정을 맞아가며 잘못된 점을 강변하는 스탈링이 더 멋져 보인다는 소리다.

    흙탕물로 범벅된 아수라장에서 저만치 떨어져 지적 허영을 즐기거나 사회에 반하는 질서를 세우기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혼돈의 카오스 같은 아수라장에서 조금이라도 똥덩이를 가라앉히려고 애쓰는 치열함보다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속세를 등지고 이상향으로 떠난 산사보다는 같이 개똥밭에 굴러주는 예배당을 찾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성소는 세상에 있을 때 더 빛이 나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치명적인 매력의 한니발보다 스모그 낀 세상에서 고군분투하는 스탈링이 더 좋다.

#단상 #아죽생 #한니발 #스탈링 #아침에는죽음을생각하는것이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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