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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돼지터리언국 총리 Jan 12. 2019

껍데기는 가라, 알맹이만 남고

#단상 #에세이

<껍데기는 가라>

    '본질은 형식을 압도한다'
    내가 기자질을 하면서 신조로 삼는 말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런 신조는 내가 글을 예쁘게 못 쓰는 것에 대한 방어기제로서 앞세운 것일지도 모른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기사를 쓰다 보면 정말로 본질은 형식을 압도하게 된다.
    나는 요즘에야 외교·국제부 기자를 하고 있지만, 본디 뼛속까지 사건기자다.
    사건기자는 기사를 발 80%에 손 20%로 쓴다.
    그러니까 발로 뛰면서 80%를 채우고 그렇게 얻은 소스를 가지고 짧고, 굵고, 묵직한 스트레이트 기사를 쓰는 것이다.
    이번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4차 방중 취재를 예로 들어 보면 이번 방중의 최고 핵심은 소문만 무성한 김정은 방중을 실제로 어떻게 확인해 쓰느냐에 달렸었다.
    내가 흥분해 모 신문사의 기사를 깠던 것도 이런 상도의와 기본적인 보도 윤리를 어겼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건너온다는 사실은 그날 오후께 대부분 기자가 알았다. 하지만 너무 이른 시기인 데다 대고, 시진핑 주석의 답방도 없이 4번째 방중을 한다는 것이 이성적으로 쉽게 와 닿지 않기 때문에 다들 기사를 내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번 이벤트의 가장 핵심은 김정은이 언제 북중 국경을 넘느냐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렇다. 바로 이 한 줄.

     '김정은 10시15분 북중국경 넘어'

    를 쓰기 위해 모든 기자가 취재 경쟁을 벌이는 것이다.
    기사로는 한 줄이지만 이 팩트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취재망을 동원해야 하고,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나 모든 취재활동이 감시받고, 통제되는 중국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저 한 줄을 위해서 사건기자들은 평소에 취재원과 관계를 돈독히 하고, 진정 어린 인간적 관계를 맺고,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것이다.
    이번에는 운이 좋게 내가 저 기사를 주웠지만, 이를 위해서 내가 확인한 채널만 5곳이 넘는다.
    여기에 다 밝힐 수는 없지만, '한중일 채널 +α'가 들어갔다.
    그리고 김정은의 특별열차가 국경을 넘는 순간 즉시 짧은 속보 한 줄을 보낼 때 오는 그 쾌감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저 기사에는 그 어떤 수식어가 필요가 없다.
    그저 미중 무역갈등이 최고조에 달하고, 북미정상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남북 정상 회담이 지난해 말 무산된 상황에서 김정은이 중국에 온다는 사실만으로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기사뿐만이 아니다.
    사람을 대할 때도 '본질이 형식을 압도한다'는 이 케케묵은 잠언은 통한다.
    아무리 내가 에티켓을 지키고, 예의를 다하더라도 진심이 없으면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마음은 상대방이 먼저 느끼게 된다.
    잠깐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글도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좋아하는 글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글들이다.
    물론 타고나기를 엄청 글을 잘 쓰는 분들이 있지만, 그 글은 읽을 때 기분은 좋지만, 마치 미나리꽝에서 사용하는 소쿠리와 같다.
    소쿠리에 가득 담은 물이 빠져나가고 나면 공허한 물의 흔적만 남을 뿐 알맹이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하는 페친들의 글을 좋아한다.
    요즘 세상을 보면 형식이 본질을 압도하는 사례들을 가끔 본다.
    특히나 우리 같이 속사정을 취재하는 기자들은 그런 일들을 자주 목도하는 데 그러면 화딱지가 나면서도 '언젠가 벌을 받겠지'하는 마음이 든다.
    그렇지 않다면 신이 없다고 믿고 싶을 정도로 못된 사람들이 정말로 있다.
    사건기자를 하면서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고, 그 바닥을 떠난 지금도 가끔 도움을 요청하는 분들이 있다.
    예전처럼 발 벗고 도움을 드리지는 못하지만, 그때의 연을 조금이라도 끌어다가 도움을 드리려고 최대한 노력한다.
    오늘은 껍데기들에게 피해를 본 분들께 위로를 드리기보다는 껍데기 같은 존재들에게 일갈을 날리고 싶다.
    '밥은 먹고 다니니? 그렇게 살지는 말자'
#단상 #껍데기는가라 #본질은형식을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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