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다섯 시의 정글

여덟 살 남자들의 세계

by 베로

아무 말도 못 하고 손가락만 꼼지락 대고 있다.


오래간만에 나온 놀이터인데, 일주일 전부터 무선조종 카를 꺼내어 놀겠다며 다짐했는데, 어처구니없이 나오자마자 같은 반 친구에게 빼앗겨버렸다.


그 당돌하고 거칠어 보이는 친구는, 그 카가 마치 자기 것인 마냥 한 손에 움켜쥔 채 달려드는 아이들에게 누구는 빌려줘도 되고, 누구는 안된다며 훈수를 두고 있다. 정작 그 카의 주인인 첫째는 뒤로 물러나 그 아이가 하는 말을 마냥 듣고만 있다. 서로 먼저 해보고 싶다며 몰려드는 아이들 틈에 끼지도 못한 채.


그 모습이 답답하고 화가 났다. 첫째에게 살며시 다가가 말했다.


'지용아, 그 카는 네 것이니깐, 네가 정할 수 있어. 무조건 친구에게 빌려준다고 좋은 게 아니야. 네가 좀 더 놀고 빌려주고 싶으면, 이따가 빌려준다고 말할 수 있어. 그건 네가 정하는 거야.'


첫째가 말했다.

'알았어, 엄마. 저리 가 있어.'


친구들의 시선 속에서, 여덟 살 남자의 체면을 지키려는 듯 첫째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내게 대답했다.


그 소리에 멋쩍어진 나는, 다시 엄마들이 있어야만 하는 듯한 곳인 오 미터 거리의 벤치에 되돌아가 앉았다.


하지만 이후에도 첫째는 일분도 자신의 카를 조종해보지 못하고 그 아이에게 빼앗기기 일 쑤 였다. 나도 하고 싶다며 다가오는 다른 친구들에게 그 아이가' 넌 늦어서 안된다.'라고 말하였다. 첫째는 여전히 아무 말도 못 한 채 옆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감히 어른인 내가, 그 미지의 여덟 살 남자아이들의 세계에 눈치 없이 끼어들지 않겠다 다짐했건만, 결국 참지 못하고 아이들 무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말하였다.


"친구야, 이건 지용이 것이니깐, 우선 지용이가 가지고 있고, 지용이의 생각을 들어보면 좋겠어. 지용이가 다른 친구들과 함께 돌아가면서 해보고 싶다면, 그렇게 할 수 있어. 그건 지용이가 정할 수 있을 것 같아."


당황한 듯 그 친구는 알겠다며 첫째의 손에 쥐어 주지만, 결국 금세 그 카는 다시 그 아이의 손에 들어갔다. 그리고선 잠시 후 흥미가 떨어진 듯, 대뜸 첫째의 손에 카를 쥐어준 채 그 아이는 놀이터로 떠났다.


둘째와 자전거를 타겠다며 애써 외면해보려 했던 상황이었으나, 오 미터 거리에서도 그 아이들의 목소리와 말투, 헐떡이는 숨결 하나하나까지 다 들려왔다. 첫째의 당황스러운 표정, 썩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 엄마의 눈치를 살피는 눈빛, 그리고 차마 자신의 카는 만지지 못한 채 꼼지락 대는 손가락까지도.


속상했다, 화가 났다.


그렇게 기다렸던 시간인데, 내 것이라고 말도 못 한 채, 맘껏 갖고 놀지도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빼앗겨 버렸다. 어처구니없이 놀이터에 나온 지 오분도 안되어 김이 새버린 이 상황, 그리고 그 당돌한 아이에게 당당히 맞서지 못한 내 아이가 못마땅했다.


저렇게 무르기만 해서 어떡하나 싶었다. 저러다 자칫 짓궂고 못된 아이라도 만나서 당하기만 하면 어떡하나, 엄마인 나는 이미 몇 년 후의 일까지 지어보고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첫째가 함께 놀이터에 가자는 그 아이의 제안을 거절하고 다시 벤치로 돌아왔다.


차마 같이 놀고 싶은 마음을 말하지 못하고 다시 되돌아온 줄 알았던 나는, 못마땅해하는 마음을 억누르며 말하였다.


"지용아, 너도 놀고 싶으면, 먼저 같이 놀자고 말해도 돼."


그러자 첫째가 대답했다.


"난 놀이터에서 놀고 싶지 않아. 난 킥보드 타고 싶어."


그러더니 자전거를 타던 동생과 함께 킥보드를 타고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동생이 넘어질세라, 강아지와 맞닥뜨리진 않을까 주변을 살피며 옆을 함께 해주었다. 그렇게 둘이 킥킥대며 나를 뒤로 한채 달려갔다. 노을 진 하늘에서 흩어지는 햇볕들이 두 아이를 따스히 어루만져 주었다.






순간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속상하고 화가 나고 심각한 건 나뿐이었다.

그리고 만약 잘못한 아이가 있다면, 못마땅한 아이가 있다면, 그건 첫째가 아니었다.


오늘이 아니어도 하고 싶을 때 꺼내어 놀 수 있는 카였다. 동네 놀이터에서 만난 같은 반 친구가 반가웠고, 충분히 빌려주고,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친구가 해보고 싶다는데, 양보하며 사이좋게 노는 것은 바로 엄마인 내가 항상 전한 말이었다.


첫째의 뜻도 묻지 않은 채 거칠게 킥보드와 카를 빼앗은 그 아이가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자신의 것도 아닌 것을 들고 주인인 양 힘을 부린 그 아이가 잘못이었을 것이다.






직장어린이집을 다닌 탓에, 동네 친구가 없었다. 늦게 하원 하는 바람에 놀이터에서 아이들 무리와 함께 노는 시간이 흔하지 않았었다. 비슷비슷한 환경의, 비교적 자신의 마음과 잘 맞는 어린이집 친구들과 4년을 지내왔다.


어쩌면 첫째는 이제야 처음 야생의 세계에 발을 디딛는 듯했다.


친절하게 말하지 않아도 먼저 손에 쥐는 사람이 주인이 될 수도 있고, 내가 하고 싶고, 더 많이 갖고 싶고, 더 잘하고 싶으면, 어깨를 부딪히고 넘어뜨리기도 하고 소리칠 수도 있는 곳.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아이들은 저절로 무리에서 제외되기 일 쑤이며, 멋모르고 착하기만 한 아이들은 먹잇감으로 제격인 곳. 먼저 잡고 소리치지 않으면 일분의 기회도 얻기 어려운 그 말로만 듣던 정글과 같은 세계.


친구를 이기는 것보다 친구를 위로하는 것이 익숙했던, 내가 더 많이 갖는 것보다 나눔의 기쁨을 더 좋아했던, 친구들이 행복하고 웃는 것이 좋았던 첫째에게, 오후 다섯 시의 놀이터란 세계는 야생의 정글과도 같았다.


그래서 어쩔 줄 모른 채 덩그러니 서 있는 첫째를 보고 있을 땐, 다시 집으로 돌아갈까, 다시는 이 시간에 나오지 말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무려 수많은 아이들과 또래 부모들을 상담하였던 상담사도, 내 자식 앞에서 드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을 고쳐먹었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더 많이 자주 놀이터에 나와야겠다고 다짐했다.


여느 아이보다도 풍부한 감수성과 공감력, 배려심을 지닌 아름다운 아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것이 절대 유약하고 부족한 점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잃지 않으면서 이 야생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너만의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네게도 기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잘못한 건 내 아이도 그 아이도 아무도 아니었을 수도 있다.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그 세계에서, 억울하고 화가 난 사람은 엄마인 나뿐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