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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Aug 06. 2024

89. 여름날의 밀양 외갓집

― 남천강에 빠진 여름날의 추억

부산에서 나고 자란 내 외갓집은 경남 밀양이다. 내 기억 속 맨 처음 물놀이를 했던 곳은 외갓집 근처 남천강이었다. 외갓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였다. 10여 분 거리의 영남루도 외가에 가면 꼭 들르는 곳이었다. 여름방학이면 당시 막내 외삼촌이 이종사촌 오빠 둘과 나, 남동생을 먼저 외가로 데려다줬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내면 엄마가 우리를 데리러 왔다.   

   

할머니는 넓은 마당에 닭을 놓아먹였다. 사촌오빠들과 남동생은 닭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나만 어미 닭의 뾰족한 부리와 꼬꼬댁 소리가 무서워 마당을 오갈 땐 할머니 허벅지에 꼭 붙어 다녔다. 낮에는 할머니가 챙겨주는 과일과 옥수수 먹는 재미가 좋았는데 밤이 문제였다. 달 밝은 여름밤, 불을 끄면 창호지 바른 미닫이문에 나뭇가지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마치 귀신이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할머니 옆에 바짝 붙어 누워 눈을 꼭 감았다. 그래도 잠은 오지 않았다. 잠자리에서까지 장난치던 오빠들과 남동생에 이어 할머니까지 잠이 들면 무섭기도 하고 엄마 생각이 간절해서 눈물이 났다. 그래도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귀신이 들어올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다. 

     

매일 늦게 잠이 들다 보니 아침에 눈 뜨기가 힘들었다. 오빠들과 남동생은 아침상이 차려진 마당의 평상으로 건너간 뒤였다. 꼴찌로 일어난 나는 마루에 앉아 할머니를 기다렸다. 할머니가 데리러 와야만 병아리들 지키는 어미 닭을 피해 평상으로 갈 수 있었다. 닭고기도, 돼지고기도 못 먹는 내겐 할머니의 달걀프라이가 제일 맛있는 반찬이었다.    

  

하루는 대낮에 차 구경을 하러 대문 밖으로 나갔다. 외갓집 바로 앞에 2차로가 나 있고 버스정류장이 있었다. 그때는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을 때였다. 개구쟁이 남동생이 버스정류장 앞에 줄을 선 어떤 아가씨 뒤에 서서 “색시야!” 하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라 남동생을 끌고 집으로 들어왔다. 그 당시 제일 인기 있던 TV연속극 ‘여로’의 영향이었다. 태현실 배우의 남편으로 좀 모자라는 역할의 장욱제 배우가 나오는 연속극이었다. 그가 하는 일이란 “색시야!” 하며 아내 뒤를 따라다니는 거였다. 남동생이 대여섯 살쯤이었으니 아가씨도 기분 나빠하기보단 어이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때는 남동생이 너무 창피했다. 50년이 지난 지금 그 개구쟁이는 세상 점잖은 아저씨가 됐다.    

 

세월이 흘러 우리 삼 남매가 모두 서울에 자리 잡았을 때 부모님과 함께 밀양을 찾은 적이 있다. 그 사이 외할머니는 밀양 집을 정리하고 서울 외삼촌 댁에서 지내다 돌아가셨다. 외가가 있던 자리엔 24시간 사우나와 식당 등이 입점한 큰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영남루를 둘러보고 남천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것만으로는 아쉬움이 가시지 않았다. 다시 외가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건물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서 보니 정우성 주연의 영화 ‘똥개’를 촬영한 곳이었다. 여기저기 붙은 스틸컷을 들여다보며 혹시나 옛 흔적이 있나 살폈지만 너무 긴 세월이 지난 뒤였다. 다들 고향 잃은 얼굴로 각자의 추억을 더듬으며 밥을 먹었다. 지나간 시절은 아쉽고, 돌아가신 할머니는 엄마처럼 그리웠다.    

  

젊은 날의 할머니가 시집간 둘째 딸(엄마)에게 보낸 그 많은 편지가 떠올랐다. 나와 꼭 60년 차이 나는 할머니는 오른쪽 위에서 아래로 편지를 썼다. 마치 붓글씨를 쓰듯 볼펜을 수직으로 잡고 죽 이어서 쓴 편지는 해독(?)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모부가 경찰이어서 전근이 잦았기에 할머니는 항상 우리 집으로 편지를 보냈다. 편지가 온 날이면 나와 엄마, 아버지는 머리를 맞대고 편지를 한 자, 한 자 소리 내 읽었다. 편지에는 타향으로 시집간 딸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을 가득 담고 있었다. 정작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땐 그 편지에 담긴 애틋한 마음을 온전히 알지 못했다. 아마 한창 자식 키우느라 바빴던 엄마도 그랬을 것이다.  

   

우리 삼 남매가 먼저 서울에 정착하고 몇 년 후 부모님도 서울로 이사를 했다. 그땐 삼 남매 모두 한창 바쁘게 일하거나 아이를 기를 때여서 부모님 이삿짐 정리를 도우러 부산에 내려갈 여유가 없었다. 그 와중에 할머니가 치매가 오기 전까지 10년 넘게 보낸 편지와 어린 시절 사진 등 많은 추억을 잃어버렸다. 당시엔 부모님도 낯선 서울살이에 적응하느라 할머니 편지를 잃어버린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60대에 서울로 이사한 엄마가 칠순을 앞둔 즈음 그 사실을 알게 됐다. 난 할머니 편지를 지키지 못한 엄마에게 날 선 말을 쏟아냈다. 그 장면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 아프다. 딸들은 일상처럼 엄마를 배신한다. 엄마의 편지를 잃어버리거나 날 선 말로 엄마 가슴을 할퀴거나. 하늘나라에선 엄마가 그런 기억들은 훌훌 날려버리길 기도한다.    

 

글을 쓰다 보니 남천강에서 막내 외삼촌에게 수영을 배우다 꼬르륵 빠졌던 순간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의 일이다. 지금 내게 남은 기억은 무서움보다는 바위를 잡고 있던 손을 놓치면서 강 아래로 서서히 가라앉는 장면의 아름다움이다. 어렸을 땐 넓은 강이었는데 다시 찾은 그곳은 좁고 얕은 강변이었다. 세월은 사람만 변하게 하는 게 아니라 지형지물도 바꿔놓는다. 지난 시절은 언제나 아쉽고 그래서 아름답게 기억되는가 보다. 이제 이곳을 떠난 엄마가 할머니와 만났으리라는 믿음 덕에 잠을 자고 밥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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