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마지막 날, 봄비가 부드럽게 내리는 아침, 나는 문득 스톤헨지가 떠올랐다. 조심스럽게 모모에게 말했다. “우리, 스톤헨지 한번 다녀올까?”
그는 학생 시절부터 손님이 오면 연례행사처럼 그곳에 들렀고, 나도 그와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엔 그곳의 침묵이 더 깊게 다가왔다. 돌들 앞에 서면 느껴지는 시간의 무게, 한 번 본다고 다 알 수 없는 이야기들..., 다시 한 번,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졌다.
잔디 위엔 아직 이슬이 맺혀 있었고, 비에 젖은 나뭇가지와 잠에서 덜 깬 마을은 고요했다. 우리는 그 조용한 아침 속에서 계절이 조금씩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길을 나섰다.
고속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달리는 동안, 차창 너머로 웨일스의 구불구불한 초록 들판이 점점 멀어지고 넓고 부드러운 잉글랜드 남부의 대평원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 너른 들판 사이, 눈부시게 퍼진 노란 유채꽃밭이 찬란한 물결처럼 일렁였다.
바람이 스치면 유채꽃이 천천히 파도를 그리며 흔들렸고,
그 풍경은 우리 마음에도 따뜻한 잔물결을 남겼다.
세상이 잠시 조용해지고, 그 조용함이 곧 평온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 너머로 점점 다가오는 스톤헨지는 황금빛 유채밭의 부드러움과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부드러운 곡선의 평원 위에 선 거대한 돌무더기들, 그 절제된 거칠음은 오히려 강한 울림을 남겼다.
다시 마주한 솔즈베리 평원(Salisbury Plain). 그 중심에서 여전히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스톤헨지 조용히 다가서자 익숙한 풍경임에도 마음속에 또 다른 감정이 피어올랐다.
이미 본 적 있는 돌들이었지만, 이번엔 조금 더 다르게, 조금 더 깊이 다가왔다. 그 사이 내가 달라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돌들이 매번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는 걸까?
수천 년 전 사람들이 이 거대한 돌들을 세운 이유와 방식,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믿음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하지만 그 순간의 나는, 그 미스터리를 굳이 풀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저 그곳에 잠시 머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전시관과 오디오 가이드는 그 시대로의 문을 열어주었고, 재현된 선사시대의 오두막에 들어서니 과거의 삶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무엇보다 경이로웠던 건 하지(Summer Solstice)때 태양이 떠오르는 방향에 정확이 맞춰진 스톤헨지의 구조였다.
,그 사실은 처음 들었을 때보다 더 깊은 감탄을 자아냈다.
들판 위로 불어오는 바람은 거칠었지만, 그 바람조차 이 유적의 오래된 일부처럼 느껴졌다. 붐비지 않는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돌들과 조용히 시선을 나누었고, 말을 멈춘 채 그 풍경 속에 나를 맡겼다. “또 와도… 참 잘 왔다.”
스톤헨지를 뒤로하고 우리는 가까이에 있는 솔즈베리 대성당(Salisbury Cathedral)으로 향했다. 고딕 양식의 섬세한 외관과 고요한 내부 공간은 이 땅의 또 다른 시간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1220년에 착공되어 38년 만에 완공된 이 대성당은 세월의 흔적을 품은 채 여전히 위엄 있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123미터에 달하는 첨탑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고, 성당 안에는 세계에서 가장 잘 보존된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원본이 조용히 빛을 머금고 있었다.
1215년에 작성된 이 문서는 영국의 절대왕권에 제동을 걸고 ‘법 위에 군림하는 자는 없다’는 원칙을 처음으로 명문화한 역사적 선언이다. 짧은 문장이지만, 그 안에는 수백 년 뒤 민주주의와 인권 사상의 뿌리가 담겨 있다. 당시에는 귀족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만, 이 헌장은 이후 수세기에 걸쳐 법치주의, 인권,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었고, 영국은 물론 미국 헌법, 세계 인권 선언에도 영향을 끼쳤다.
⇲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스톤헨지가 시간의 깊이를 말해주는 곳이라면, 솔즈베리는 그 시간을 건축으로 쌓아 올린 느낌이었다. 고요한 벤치에 앉아 창문 너머 빛을 바라보던 그 순간, 우리는 또 한 번 시간 속을 거닐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 들판 위로 붉은 노을이 차분히 깔려앉았다. 하루가 저물며 남긴 잔잔한 색채들 위로, 지나온 풍경들이 조용히 겹쳐졌다.
이번 여정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었다. 다시 만났기에 더 깊어졌고, 알고 있기에 더 경이로웠다. 수천 년의 시간을 품은 돌들, 그 앞에 선 나의 시선, 그리고 함께 그 시간을 걸은 사람들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역사’가 될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거치며 깊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번 여행은 익숙함 속에서 다시 느낀 감동이었다. 그리고 그 감동이 우리를 조금 더 단단하게 감싸는 경험이었다. 아마도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기에 스톤헨지와 솔즈베리는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