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여행 '론다의 기억 1'

루에보 다리와 동굴

by 봄이

♠︎안달루시아 여행 3일째 ,


말라가 이튿날 아침, 우리는 론다행 버스를 타기 위해 서둘러 숙소를 나섰다.

큰길로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버스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잔잔히 내리던 비는 버스 출발과 함께 서서히 잦아들었다.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드러나며 햇살이 스며들었지만, 론다 터미널에 가까워질수록 다시 비구름이 몰려왔다. 창밖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여행이 걱정되면서도 날씨가 참 극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우리가 비를 몰고 다니는 건 아닐까?' 하는 웃픈 생각이 스쳤다.

터미널에서 호텔까지는 걸어서 5분 남짓. 비를 맞으며 돌길을 따라 내려갔다.

딸이 예약한 호텔은 투우장 근처라 이동이 한결 편할 것 같았다. 여행 일정뿐 아니라 동선까지 신경 쓴 딸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체크인을 마치고 비가 잠시 잦아든 틈을 타 투우장 주변을 산책했다.
늦은 시간이어서 투우장은 닫혀 있었고, 빗속에서 관광객 몇 명이 조용히 지나갈 뿐이었다. 투우장을 돌아 누에보 다리로 향하니, 다리 아래 깊은 협곡에서 올라오는 비 냄새와 습기 섞인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누에보 다리 산책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던 길, 우리는 특별한 목적 없이 투우장 맞은편 작은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산하고 조용한 골목을 따라 걷자, 광장(Plaza del Socorro)이 모습을 드러냈다. 낮이면 여행자들로 북적이는 신시가지 중심 광장이지만, 그 시간엔 주변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만이 광장을 부드럽게 채우고 있었다.

광장을 마주한 성당(Parroquia de Nuestra Señora del Socorro)은 20세기 중반에 재건된 교구 성당으로, 두 개의 종탑과 수수한 외관이 특징이다. 종탑은 크거나 높지 않았지만, 그 소박한 모습이 오히려 시선을 끌었다. 옛 교회는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지어졌다.

광장에서 비를 맞으며 걷자, 중앙의 분수에서는 빗물과 분수물이 뒤섞여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주변 가게에서 흘러나온 희미한 불빛은 빗방울에 번져 부드럽게 흔들렸고, 고요한 풍경은 시간의 속도를 잠시 늦춘 듯했다. 어느 순간, 우의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마저 멀게 느껴질 만큼 그 풍경에 깊이 잠겼다.

이런 시간, 이런 방식으로 론다의 중심을 만나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여행이란, 이렇게 뜻밖의 순간 속에서 낯선 매력을 발견하며 느끼는 소소한 감동이 아닐까 싶다.


저녁이 가까워지자 우리는 호텔에서 추천받은 ‘샌프란시스코 레스토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 타파스를 먹으며 몸을 녹이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앉은 중년 부부가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여행 이야기를 나누던 중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말을 듣자, 부인은 특히 반가워하며 한국 드라마 이야기를 이어갔다.

와인을 곁들여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벨기에에서 왔다는 부부는 오토바이로 안달루시아를 여행 중이라며 내일 그라나다로 떠난다고 했다. 서로의 길을 잠시 스쳐 지나듯 이야기를 이어가니, 낯선 여행지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과의 대화가 빗소리와 레스토랑의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남편은 하몽을 시키려다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이베리코 햄, 이베리코 햄”만 반복했다. 꿋꿋하게 주문한 덕분에 테이블에는 사진 속 이베리코 햄이 나왔고, 한 점 베어 문 남편은 “이상하다, 하몽 시킨 거 아닌가? 왜 이렇게 짜?”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 날 아침, 비는 더 거세졌지만 우리는 비가 멈추길 기다릴 수 없어 곧장 구시가로 향했다.

론다는 기원전 켈트족의 정착지에서 시작해 로마와 무어 시대를 거쳐 온 도시다.

이곳을 둘로 가르는 엘 타호 협곡은 오랫동안 구시가와 신시가를 나눠 놓아, 다리는 두 세계를 잇는 숙원이었다. 이전 다리들이 무너질 때마다 사람들은 더 견고한 연결을 꿈꿨고, 1759년부터 약 30년의 시간을 들여 지금의 거대한 아치를 완성했다.

절벽 위로 솟은 다리는 자연과 인간의 의지가 맞붙어 만든 구조물처럼 단단했다.

비에 젖은 바위는 황톳빛을 띠었고, 협곡 아래 과달레빈 강(Guadalevín)은 거칠게 흐르며 계곡을 깊게 파고 있었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 Mirador de Aldehuela 전망대에 섰다.
비구름 아래의 론다는 안개에 잠긴 듯했지만 윤곽은 흐려지지 않았고, 절벽 위 흰 집들은 안갯속에서도 단단한 윤곽을 드러냈다. 붉은 지붕과 젖은 암벽 뒤로 이어진 산맥이 흐릿하게 펼쳐지며 론다의 풍경을 한층 깊게 만들었다.

절벽과 협곡이 맞물려 만든 거대한 지형이 도시 전체를 들어 올리는 듯 펼쳐진 모습에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이 도시가 왜 수백 년 동안 여행자들을 매혹시켜 왔는지, 이 풍경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전망대 바로 뒤에는 작은 미술관(Joaquín Peinado)이 있다.

론다 출신 화가 호아킨 페이나도는 파리에서 활동하며 피카소와도 교류했는데, 그의 작품은 밝은 색채와 기하학적 구성이 특징이다. 전시실 한쪽에는 피카소 판화 작품 몇 점도 걸려 있어, 두 화가가 시간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미술관을 나와 골목으로 들어서자, 낮은 펜스 위에 공작새 두 마리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비에 젖은 깃털은 짙은 청록색을 띠고, 꼬리깃에 맺힌 물방울은 작은 유리구슬처럼 반짝였다. 우리는 잠시 멈춰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후 구시가의 좁은 골목을 느릿느릿 걸었다. 빗방울이 돌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골목 안 작은 성당이 고요히 모습을 드러냈다. 성당 앞 오렌지 나무에는 반쯤 익은 열매가 빗물에 젖어 은은하게 반짝이며 골목 풍경에 생기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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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을 따라 걷다 무어왕의 집(Casa del Rey Moro)에 도착했다. 출입구에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눈앞에 작지만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진다. 폐허처럼 보이는 왕의 집은 폐쇄되었고, 관광객에게 정원과 산책로, 동굴만 개방하고 있었다.


무어왕의 집 외벽

우리는 곧바로 동굴로 이어진 산책길을 따라 내려갔다. 빗방울이 창을 통해 들어오는 어둡고 축축한 동굴 속으로 들어서자, 굽이진 돌계단이 아득하게 이어져 한 걸음 한 걸음이 긴장감을 동반했다. 어둠 속 계단 사이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고요한 울림을 만들었다.


동굴은 수백 년 전 무어 통치자의 명령으로 협곡 절벽 안을 깊숙이 파내어 만든 인공 지하 공간이다. 계단과 작은 방, 물을 끌어 올리기 위한 장치와 수로가 층층이 이어져 당시 사람들의 기술과 지혜가 남아 있었다.


조도가 낮아 남편의 시야가 흐려질 때마다 나는 계단의 높이와 방향을 알려주며 손을 잡고 내려갔다. 좁게 나선형으로 휘감은 계단은 둘의 호흡이 맞지 않으면 한 걸음도 쉽게 내딛기 힘든 공간이었다. 손을 맞잡고 내려가는 동안, 어둠은 오히려 우리의 걸음을 단단히 이어주었다.

동굴을 벗어나자, 비 내리는 론다의 계곡 아래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빗줄기가 깎아지른 암벽을 따라 은빛 실처럼 흘렀고, 절벽 사이로 부딪치는 물소리가 동굴 안까지 울렸다. 동굴 밖에서 올려다본 협곡은 마치 하늘을 찢고 세워진 거대한 책장 같았고, 비에 젖은 바위와 초록빛 식물들이 생생하게 빛났다. 촉촉한 흙과 돌 내음, 물기 어린 바람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멀리 안개 속 론다 마을이 흐릿하게 보였다.


돌아오는 길 역시 작은 모험이었다.

남편은 미끄러운 계단을 오를 때마다 잠시 숨을 고르며 천천히 걸었고, 우리는 어둠을 지나 출구를 향해 나아갔다. 마침내 동굴을 빠져나와 전망대에 섰을 때, 눈앞 풍경은 지금까지의 어둠과 긴장을 단숨에 씻어 준 듯했다.


구불구불 흐르는 과달레빈 강과 깊게 패인 협곡, 빗물에 닦인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촉촉한 잎사귀와 꽃잎은 잔잔히 빛났고, 협곡 너머 신시가지는 축축한 지붕과 석조 건물들이 차분한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게 힘겹게 올라온 끝에 마주한 론다의 풍경은 지금까지의 여행 중 가장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던 물소리, 협곡과 빛, 비에 젖은 도시 풍경이 한데 어우러진 그 순간, 남편에게는 가장 험난했던 경험이자 우리에게는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을 이야기로 자리 잡았다.


집으로 돌아와 이번 안달루시아 여행을 되돌아보면, 세비야의 화려한 광장과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 코르도바의 고풍스러운 골목들도 모두 인상 깊었지만, 마음속에 가장 선명하게 남은 장면은 여전히 론다의 협곡과 동굴이었다. 여행의 풍경과 사람들, 작은 모험과 예상치 못한 순간들이 겹쳐진 기억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여행이 주는 뜻밖의 감동을 느꼈다.


⇲ 무어왕의 집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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