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 음악이 흐르는 골목길에서

by 봄이

< 안달루시아 7일 세비아 3일쩨, 오후 - 다시 골목으로>


궁전 투어를 마치고 성문을 나서자, 오후의 햇살이 세비야 대성당 광장을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 웅장한 고딕 양식의 벽과 첨탑은 유난히 반짝였고, 성당 첨탑의 긴 그림자가 광장을 가로질러 드리워지며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광장 한쪽에서는 마차꾼이 관광객과 흥정을 나누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고, 그 사이로 사람들의 발걸음과 웃음소리가 겹쳐 흘렀다.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춰 무염시태(Inmaculada Concepción) 기념비 계단에 앉아 오전 내내 지친 다리에 휴식을 주었다. 비둘기들은 먹이를 찾아 뒤뚱거리며 사람들 사이를 오갔고, 오렌지 나무 위의 열매들은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사람과 도시, 자연이 어우러진 풍경을 차분히 바라보며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

그렇게 앉아 있다 보니 서서히 허기가 밀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광장 근처 레스토랑의 야외 테라스에 앉아 늦은 점심으로 타파스와 와인을 느긋하게 즐겼고, 접시가 비워질 즈음에는 다시 천천히 길을 나섰다.

광장의 활기를 벗어나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자, 오래된 문틀과 빛바랜 벽, 작은 상점들이 지나온 세월의 흔적을 조용히 드러내고 있었다. 길 한편에 무심히 놓인 낡은 자전거 한 대와 그 위에 얹힌 마른 꽃 한 다발만으로도, 골목의 풍경은 이미 완성된 듯 보였다.

그 길을 따라 걷다 작은 광장을 지나 옆 골목으로 나가려던 순간, 여성 옷가게 앞에서 남편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불렀다.
순간 ‘설마 옷을 사주려는 건가?’ 싶어 나는 곧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아니야. 여기서는 아니야.”

내 반응이 우스운지 그는 웃더니, 어닝에 적힌 가게 이름을 읽어보라 했다.
플로르 지 리스(Flor de Lis).

그 순간 그의 최애곡이자 즐겨 듣던 브라질 보사노바 'Flor de Lis' 여성 보컬 버전이 떠올랐다.

익숙한 노래 제목을 이렇게 뜻밖의 장소에서 마주하니 반가웠던 모양이다.

그는 문 앞까지 다가가 가게 안을 한동안 들여다보며, 마치 음악을 듣듯 잠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그를 이끌고 카페가 늘어선 골목 모퉁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골목 끝에서 검은 망토와 장식 리본을 두른 남성들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경쾌한 기타와 만돌린 소리가 골목을 가득 채우자,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장단에 맞춰 박수를 치며 자연스럽게 리듬에 몸을 실었다. 그 순간, 골목 전체가 음악과 생기로 천천히 차올랐다.


그들 바로 뒤에서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듯한 아기가 발을 동동 구르며 박수를 치자, 우리도 덩달아 손뼉을 치고 어깨를 들썩였다. 작은 몸이 음악에 맞춰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설명할 수 없는 기쁨과 흥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그들은 투나(Tuna)라 불리는 음악 집단이었다. 중세 스페인 대학생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으로, 지금도 이렇게 거리와 축제에서 노래하며 사람들 사이를 떠돈다고 했다. 그 사실을 몰랐던 그 순간에도, 우리는 이미 그들의 리듬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었다.


투나들이 자리를 옮기자 우리도 다시 골목길 투어에 나섰다. 걷다 보니 우연히 플라멩코 댄스 센터가 눈에 들어와 반가운 마음에 문 앞에 섰지만, 마침 문을 닫고 있다며 내일 다시 와 달라는 말을 들었다. 다음 날 단기 교습을 문의했으나 교습 일정과 우리의 출발 날이 맞지 않아 결국 배우지 못했고, 문 앞에 잠시 서서 안쪽을 들여다보던 그 짧은 순간만이 세비야다운 아쉬움으로 남았다.


숙소로 돌아가던 길에는 작은 디저트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진열대에는 여러 디저트가 놓여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오렌지 향이 가득한 오렌지 타르트가 단번에 시선을 끌었다. 한 입 베어 무니 향긋한 오렌지 향과 달콤한 풍미가 입안 가득 퍼졌고, 여행 중 만난 디저트 중 단연 으뜸이었다.


우리는 디저트를 사 들고 골목을 걸으며 밤공기 속 달콤한 여운과 가로등 빛을 함께 음미했다. 밤이 찾아오자 세비야의 골목은 낮과는 다른 색으로 물들었고, 가로등 불빛은 길바닥에 부드러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낮 동안 붐비던 광장을 한층 고요하게 만들고 있었다.

숙소 근처 골목 의자에 앉아 밤낮으로 기타를 치던 노인의 선율이 밤공기 속에서 조용히 퍼져 나와, 골목 사이로 우리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남편의 최애곡, 투나들의 노래, 골목 사이로 스며드는 기타 소리, 낮에 그가 흥얼거리던 'Flor de Lis'까지. 서로 다른 음악들이 겹치며 하나의 리듬이 되어, 나와 도시를 천천히 감싸 안았다. 우리는 그 흐름에 발걸음을 맞추듯 걸으며 세비야의 골목 속으로 조금 더 깊이 스며들어 갔다.


여행이란 어쩌면, 이렇게 우연히 겹쳐진 소리와 감각, 기억들이 하나의 리듬으로 남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세비야의 골목을 걷듯, 우리의 하루 또한 흘러가는 음악 속을 지나며 조용히 빛난다.


<플로르 지 리스(Flor de Lis)YouTube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