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몽과 로마의 밤

코르도바는 그렇게 우리를 붙잡았다

by 봄이

골목 산책이 끝날 즈음, 해는 서서히 기울고 어둠이 골목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작은 조명들이 하나둘 켜지며 길을 물들이는 시간, 우리는 유대인 지구의 작은 레스토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제대로 된 한 끼도 먹지 못했다.

오전에 기차역 카페에서 마셨던 커피와 크루아상 하나가 전부였다.
그만큼 우리는 코르도바에 온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메스키타와 알카사르, 끝없이 이어지던 골목과 그 안의 풍경들이 우리의 허기를 대신 채워주고 있었다.

남편은 즐겨 먹던 하몽을, 나는 타파스와 와인을 주문했다.

잠시 후 주방장은 하몽을 들고 와 맞은편 테이블에서 꽃잎을 떨구듯 한 조각씩 자르기 시작했다. 칼이 고기 결을 따라 스르륵 미끄러질 때마다 얇게 떨어지는 하몽의 향이 오감을 자극했다. 그는 은근히 자신의 칼솜씨를 자랑하는 듯했고, 주고받는 농담 속에서 저녁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안달루시아 여행 초반, 우리는 하몽이 모두 같은 줄 알았다.
하지만 스페인 바에 걸린 하몽들은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산바람 속에서 천천히 말라간 하몽 세라노는 담백했고, 결이 단정해 마치 잔잔한 바람을 닮았다.
이베리코 흑돼지로 만든 하몽 이베리코는 지방이 서서히 녹아 더 깊은 풍미를 남겼고, 도토리를 먹고 자란 이베리코 벨로타에 이르면 향과 질감이 확연히 달라져 한 조각이 입안에서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 맛은 더 이상 한 접시의 음식이 아니라, 여행의 한 장면이 되었다.
그래서 이제 남편은 메뉴판 앞에서 잠시 망설인 뒤, 그날의 기분에 맞는 하몽을 고른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소화를 시킨다는 핑계로 밤길을 걸었다.
사실은 코르도바의 밤을 조금 더 오래 붙잡고 싶었다. 낮에 스쳤던 길이었지만, 골목을 한 번 더 꺾자 낮 동안 보지 못했던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그렇게 걷다 마주한 로마 신전은 웅장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있었다.
세상에, 왜 나는 이걸 놓쳤던 걸까.
늦었지만,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위안이 되었다.

기원전 1세기, 코르도바는 로마 제국의 중요한 도시였다.

이 신전은 그 중심에서 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장소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로마의 흔적은 점차 희미해졌고, 중세에 이르러 신전은 잊힌 채 땅속으로 사라졌다.

돌들은 다른 건물의 재료가 되었고, 신전의 자리는 도시의 일상 속에 묻혀버렸다. 그러다 19세기 후반 발굴을 통해 기둥과 기단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의 신전은 완전한 복원이 아니라, 남아 있는 흔적을 존중하며 과거와 현재를 이어 놓은 결과다. 오래된 돌과 복원된 부분이 섞인 모습은 불완전하지만, 그 덕분에 과거와 현재가 포개진 시간이 더 또렷이 드러났다.

이 불완전함 앞에서, 시간은 하나의 선이 아니라 겹쳐진 순간으로 다가왔다.

여행이란, 이렇게 지금의 내가 과거의 누군가와 같은 장소에 서서 서로 다른 시간을 잠시 겹쳐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로마 신전은 그렇게 조용하지만 깊은 여운을 남겼다. 밤공기 속에서 고대의 기둥들은 또렷한 존재감으로 서 있었다.

그날의 마지막 선물처럼, 메스키타는 어둠 속에서 고요히 빛나며 우리 마음에 오래 남았다. 하루 동안 걸었던 시간과 감각을 나는 온전히 기억 속에 담았다.


다음 날 아침,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아직 코르도바의 공기가 더 필요했다. 그래서 아침식사를 거르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호텔을 나서는데, 메스키타 출입문 한쪽 계단에서 긴 세월을 품은 얼굴의 노인이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의 손놀림에는 익숙함이 배어 있었고, 소리는 부드럽고 감미로웠다. 코르도바는 마지막까지 우리를 이렇게 붙잡았다. 우리는 그의 선율에 넋을 잃고, 커피가 식을 때까지 반대편 벽에 기대어 기타 연주에 빠져 었었다.


연주가 끝나자 우리는 식은 커피를 들고 메스키타의 오렌지 정원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과거 모스크 시절, 기도 전에 몸과 마음을 정화하던 공간이었다. 지금의 연못과 오렌지 나무는 그때의 기능을 그대로 이어받아, 이곳을 지나가는 이들에게 잠깐의 고요를 선물한다.

오렌지 정원 중심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물은 잔잔했고, 그 표면은 하늘을 그대로 담아냈다. 바람 한 점 없는 이른 아침, 연못은 마치 시간을 멈춘 듯 고요했다. 물속에서는 작은 물고기들이 조용히 움직였고, 수면 위로 오렌지 나뭇잎과 하늘빛이 함께 떠 있었다.

그 모습이 ‘기도 전 정화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든 모르든, 그 자체로 마음을 정돈하는 의식처럼 다가왔다.


코르도바를 떠날 채비를 하며 짐을 챙기던 호텔방에서, 나는 또 하나의 메스키타를 발견했다. 중세 기독교 수도원과 성직자들의 거처로 쓰였던 이 호텔은, 안뜰은 물론 곳곳이 시간의 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공간이다. 침대 프레임 문양은 방금 전 나섰던 메스키타의 출입문을 닮아 있었고, 나는 그 닮음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흩어질 뻔한 여행의 기억을 조용히 다시 제자리에 놓아주는 장소 같았다.

이제 우리는 다음 여정지인 그라나다로 떠나야 한다.

아쉬움을 가방에 함께 넣고 코르도바 기차역으로 향하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짧았지만 깊었던 도시, 골목과 빛, 그리고 시간까지 함께 머물던 코르도바에 작별을 건넸다. 아쉬움은 남겼지만, 다음 도시에서 마주할 또 다른 시간의 얼굴을 떠올리며 우리는 그라나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