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변신은 무죄
고은아, 할머니 좀 봐라!
임실 호국원에서 아버지를 뵙고 돌아온 뒤, 나는 미뤄두었던 숙제를 시작했습니다. 바로 엄마의 머리를 염색해 드리는 일입니다.
우리 엄마는 유독 흰머리가 일찍 올라오셨습니다. 아마 내가 중학생 때부터였을 겁니다. 가끔 염색약을 섞어 머리에 발라달라는 엄마의 부탁에, 철없던 나는 고집스러운 대답을 내뱉곤 했습니다.
“엄마, 얼굴은 늙었는데 머리만 새까만 게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냥 둬~”
지금 생각하면 참 못된 딸이었지요. 내 당돌한 말에 엄마는 “그래, 너도 꼭 너 같은 딸 낳아서 늙어봐라!”라며 응수하셨지만, 그래도 나는 투덜대며 엄마 머리를 까맣게 물들여주곤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내가 내 머리를 염색하며 그때 엄마의 말을 가슴으로 되새깁니다.
지난 설날, 3년 만에 마주한 안방의 엄마는 하얀 머리가 머리카락인지 피부인지 구분조차 안 갈 정도로 쇠약해져 계셨습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숱 없는 머리를 매만지는데 울컥 뜨거운 것이 올라왔습니다.
처음엔 “다 늙어 무슨 염색이냐”며 손사래를 치시던 엄마. 하지만 막상 염색을 마치고 머리를 감겨드린 후 거울을 비춰주자 반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피시더니 대뜸 말씀하십니다.
“얘, 사진 좀 찍어봐라. 우리 고은이한테 보내주게!”
알고 보니 이번 설날, 가장 아끼는 막내 손녀 고은이가 할머니의 하얀 머리를 보고 눈물을 글썽이며 “할머니 늙지 마세요, 머리가 너무 하얘요”라고 했답니다. 그 어린것의 마음이 내내 마음에 걸리셨던 모양입니다.
나는 정성껏 사진을 찍어 가족 단톡방에 올렸습니다.
순식간에 “우리 엄마 10년은 젊어 보이네!”, “신 권사님 최고!”라며 자식들의 찬사가 쏟아졌습니다. 쉴 새 없이 울리는 알림 소리에 엄마의 입가는 귀에 걸렸고, 고은이의 답장을 기다리는 표정은 마치 소풍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경쾌해 보였습니다.
흰머리를 가리는 것은 세월을 속이는 일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을 안심시키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야 배웁니다. 10년은 젊어진 우리 집 ‘정령’ 엄마. 거울 속 자신과 연신 눈을 맞추며 미소 짓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덩달아 콧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