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양 Apr 29. 2022

불법체류자가 될 뻔했다

봉쇄령 때문에..


쿠알라룸푸르의 랜드마크 페트로나스 트윈 빌딩

2020년 3월,

전 세계가 팬데믹의 충격에 빠졌고

나와 남편이 6개월째 체류 중이었던

말레이시아도

대대적인 봉쇄령에 돌입했다.


3월 18일부터 30월 31일까지라던

봉쇄령(이동제한령)은

4월 14일까지 1차 연장,

4월 28일까지 2차 연장,

5월 12일까지 3차 연장

이후로도 조건부로 조금씩 규제를

완화시킨 봉쇄령을 이어갔다.


이전 브런치 글에도 썼지만,

첫 2주 땐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겪는 강압적인 외출금지라는

황당한 상황에 우울증에 걸릴 뻔한

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역시 적응의 동물.


살아가려는 본능 때문인지

혼자서는 마냥 두렵던 외출도

즐기기 시작했다.


2-3일에 한 번씩 식료품을 사러 나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마음을 다스렸고,


호텔 방 안에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취미들을 최대한 활용했다.


넷플릭스도 보기 시작했고

유튜브 영상도 만들어 보고

블로그 글도 열심히 썼다.

필사를 하며 마음을 비우기도 하고,

새로운 요리에 도전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방 안에서 24시간은

정말 지루하게도 길었다…)


그나마 4월 말 무렵부터는

식재료 구입 등의 필수적 목적으로

한 집당 1명만 나갈 수 있던 규제가

2명으로 가능해져서

남편과 함께 마트에 갈 수 있었다.


6주 만에 호텔 방이 아닌

밖에서

남편과 손을 잡고 걸으니

이제 정말 지긋지긋한 봉쇄가

끝날지도 모른단 기대도 생겼다.


봉쇄 7주 차였던 5월 4일부터는

다른 규제들도 조금씩 완화되었다.


지역 간 이동은 여전히 불가능했지만

3월 18일 갑작스러운 봉쇄령 때문에

타지에 발이 묶여 버린 사람들은

예외적으로 이동이 가능해졌다.


실내 스포츠나

신체접촉이 있는 스포츠는 금지였지만

신체접촉 없는 조깅 등의 운동은 가능했다.


영화관, 전시회, 종교모임, 콘서트,

축제, 결혼식 등은 여전히 금지였다.


노래방, 클럽 등은 문을 열지 못했지만

식당의 경우

방역수칙에 맞춰 실내 영업이 가능해졌다.


거의 두 달 만에 이루어진 규제 완화가

반가웠지만


여전히 내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걱정거리가 있었으니,


바로 비자 문제였다.


남편은 워킹 비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나는 무비자 상태였다.

한국인은 말레이시아에서 90일간

무비자로 체류가 가능했는데

나는 5월 중 그 체류 기간이 만료되는

상황이었다.  


처음 말레이시아에 올 땐

너무 급박하게 결정된 사안이라

장기체류 비자를 만들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이후 말레이시아에 체류하며

싱가포르 여행, 한국 방문 등으로

다시 말레이시아에 입국할 때

5월까지 체류 기간이 늘어나서

굳이 장기 체류 비자가 필요 없게 됐다.


계획대로라면 남편과 나는

4월 중 다른 국가로의 이동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3월 갑작스러운 봉쇄령으로

남편이 일하던 사무실도 폐쇄되었고

장기 출장 기간이 하염없이

길어지게 된 것이다.




+



문제는

봉쇄가 시작된 이후

말레이시아 이민국도 업무를 중단했다는 거였다.


이렇게 강제적으로

시민들의 발을 묶어 놓는 것도

이해가 잘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

최소한 정부 기관은 차질 없이 업무를

봐야 하는 거 아닌지 화가 났다.


(외국인이 살기 좋은 도시 중

쿠알라룸푸르는 상위권에 속하는 곳인데

이민국,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이미 봉쇄 연장이 이어지는

4월부터 나는 비자 문제 때문에

불안하고 초조했다.


방법은 만료 전에 출국하는 것뿐이었다.


그즈음에는 한국으로 가는

항공편이 다 취소되었고

특별기 편이 있긴 했지만

비행기표 구하는 게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얼마 후

비자가 만료된 외국인들은

봉쇄령이 끝난 뒤 14일이 지나기 전에

출국하면 블랙리스트에 오른다거나

페널티로 벌금을 부과하지 않을 거라는

정부의 이야기가 있었지만,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봉쇄령이 2주마다 계속 연장 발표되는 바람에

이번엔 마지막이겠지, 희망을 걸었던 나도

사실 그즈음에는 말레이시아 정부에서 하는 말을

온전하게 믿긴 어려웠다)


특히 봉쇄령 기간 동안

비자가 만료되어 출국하던 도중

심사관으로부터 당신은 블랙리스트라며

다시는 말레이시아에

들어오지 못할 거라는 질책과 여권에

어떤 체크를 하더라는

사람들의 출국 후기담이 올라왔다.


어떻게든 특별기 편 티켓을 구해야 하나

고민하던 5월 초,

드디어 이민국이 업무를 재개했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예약 사이트에 몰렸고,

나는 예약에 실패했다.


그 와중에 봉쇄령은 완화된 조건 속에서

6월까지 또 연장이 된다고 발표됐다.

때문에 남편의 일정은 더 길어졌다.

어차피 남편과 함께 귀국하는 건

불가능해졌으므로

나는 불법체류자가 되느니

혼자서라도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불안감을 그나마 잠재워준 건

체류 기간이 만료되더라도

봉쇄령 이후

14일 이내 출국을 한다면

문제가 없을 거라는,

불과 내 체류 기간 만료 며칠 전에

발표된 한국 대사관의 공식 공지였다.




+



5월 중순

여전히 많은 제약들이 있었지만

말레이시아는 점점 일상을 찾기 시작했다.


남편도 출근을 시작했다.


귀국 준비와

비행 편을 알아보던 내게

출근했던 남편이 솔깃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남편이 워킹 비자가 있기 때문에

가족인 내가 디펜던트 비자를 신청할 수 있는데,

봉쇄령 전 일상적인 때였다면

비자를 받기 위해서 말레이시아 국외로

출국했다가 재입국해야 하지만

현재는 봉쇄령으로 인해 재입국 과정이

필요하지 않다는 비자 에이전시의 정보였다.


물론 에이전시 비용이 꽤 들긴 하겠지만

해볼 만한 일이었다.


그날이 딱

내 체류기간이

만료되는 날이었다.


그 이야길 듣자마자

곧장 그랩을 불러 타고 한국 대사관으로 가서

필요한 서류를 떼고,

증명사진을 찍은 다음

남편을 통해

에이전시에 서류를 맡겼다.


말레이시아 이민국의 일처리 속도를

생각하면 가능성이 아주 크진 않았고

돈만 날리는 일일 수도 있었다.


(나중에 프랑스에 가서는 프랑스 정부 기관의

일처리 속도에 비해 말레이시아는 양반이라는

걸 알게 됐지만. 공공 업무는 한국이 최고다)


나는 디펜던트 비자 진행을 기다리면서도

만일의 경우를 위해 귀국 준비를 동시에 해야 했다.



+



말레이시아 정부는

체류 기간이 만료된 외국인들에게

봉쇄령 이후 14일까지

체류 자격을 보장하겠다고 했지만

확실한 거주 보증 제도 속에

있다는 안정감 따위는 없었던 시간이었다.


같은 불안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이 기간에

각종 비자를 받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는 동안 규제는 완화시키되

완전히 풀지 않는 봉쇄령이

연장을 거듭했다.


봉쇄령이 연장되어야

내게 주어진 체류 기간이 덩달아

연장되기 때문에,


이제는 봉쇄령이 연장되는 걸

바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서류를 에이전시에 넘긴 지

3주가 훌쩍 넘어서

디펜던트 비자가

발급되었다.


불법체류자에서

어엿한 1년짜리

장기 체류 비자로의

신분 상승을 위해


3주간의 초조함과 불안,

그리고 80만 원이 넘는 돈을

지불해야 했다.




+



나는 그 해 9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내가 돌아올 때쯤

말레이시아는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완화된 이동제한령’

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마스크와 출입 인증을 빼면

코로나 이전과 다름없는

일상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강력한 제한이 있던 초기에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고 들었다.

망한 회사도 많았다.


규제가 완화된 후

창문이 한 뼘 밖에 열리지 않던

호텔에서 탈출하고자

새로운 레지던스와 호텔을

투어했는데,


그때 도와주던 남편의 현지인

직장 동료가 한 호텔을 가리키며

‘부도’가 났다고 했다.


관광객 입국이 금지됐기 때문에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쿠알라룸푸르의 랜드마크인

페트로나스 트윈 빌딩 바로 코앞인

호텔이 이 정도였으니

다른 곳의 상황은 더욱 처참했을 것이다.


봉쇄령 전에는 관광객으로 붐볐던 내가 살던 호텔


그래도 봉쇄령 덕분에

확진자 수가 줄었으니,

어쩌면 강력한 봉쇄령이

옳은 결정이었을 거라

그 당시엔 생각했었다.


하지만 우리도 이미 알다시피

코로나는 그리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몇 주간 말레이시아 국민들은 큰 고통을 받았고

경제적으로도 상상할 수 없는 피해를 감수했다.

(물론 한국도 여러 규제들로 많이 힘든 시기였지만

처음 한 달간 강력한 봉쇄령을 실시한

말레이시아의 타격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이후

또다시 확진자가 폭증하는 걸

한국에 돌아와서 종종 뉴스를 통해 보았다.




+



한국에서도 코로나로 인한

이런저런 정책으로

많은 사람들의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만약 말레이시아의 봉쇄령을 겪어보지 못했고,

봉쇄에도 불구하고 다시 폭증한 확진자를  

알지 못했다면,


나의 성향상,

비록 종종 투덜거리긴 하겠지만

강력한 제재로

연세 많으신 나의 부모님의 건강을

지켜드리는 쪽을 끝까지 지지했을 것이다.


규제 완화 후 이사한 레지던스에선 페트로나스 빌딩이 보였다


그런데 말레이시아에서 

돌아온 뒤

나는 누구의 과 의견도

정답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해선

영원히 그 답을 알 수 없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봉쇄된 도시에서 남편과 호텔 방에 갇혀 버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