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서울로, 전쟁의 균형을 되찾다
17부에서 다룬 1.4 후퇴로 대한민국은 또다시 수도를 빼앗기고 전쟁의 가장 어두운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패배의 짙은 그림자 속에서, 새로 부임한 미 8군 사령관 매튜 리지웨이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흩어진 군심(軍心)을 수습하고, 중공군의 전술에 맞선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며 대반격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리지웨이 장군은 이전처럼 영토를 되찾는 상징적인 목표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새로운 전략은 UN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이용하여 중공군의 인명 손실을 극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훗날 '고기 분쇄기(Meat Grinder)'라고 불리게 됩니다. 그는 더 이상 중공군이 선호하는 야간 산악 전투에 말려들지 않았습니다.
대신, 막강한 포병과 항공 지원의 엄호 아래 천천히 전진하며, 중공군을 평야와 낮 시간대로 끌어내어 섬멸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 전술은 "땅 한 뙈기를 위해 병사 한 명을 희생하지 않겠다"는 그의 지휘 철학이 반영된 것이었습니다.
1951년 1월 25일, 리지웨이의 첫 번째 대반격 작전인 '썬더볼트 작전'이 개시되었습니다. 이 작전은 한강 이남 지역에 대한 대규모 무력 정찰로, 중공군의 위치와 전력을 파악하고 격퇴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작전이 시작되자, UN군은 예상보다 약한 적의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길게 늘어진 보급선 문제로 굶주림과 탄약 부족에 시달리던 중공군은 UN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힘을 쓰지 못하고 북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성공적인 작전은 패배감에 젖어있던 UN군 장병들에게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UN군의 반격에 당황한 중공군은 2월 11일, 또 한 번의 대규모 공세(제4차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이때 경기도 양평의 작은 마을 지평리에 주둔하고 있던 미 2사단 23연대와 프랑스 대대는 5개 사단, 약 5만 명에 달하는 중공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습니다.
중공군은 그동안의 승리 공식대로, 압도적인 병력으로 지평리를 하룻밤 만에 점령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23연대의 폴 프리먼(Paul Freeman) 대령은 리지웨이의 명령에 따라 "결사 항전(Stand or Die)"을 결심했습니다.
약 5,600명의 UN군은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쏟아지는 중공군의 파상공세를 3일 밤낮으로 막아냈습니다.
사방에서 피리 소리와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지고 수만 명의 중공군이 몰려왔지만, UN군은 무너지는 진지를 권총과 수류탄, 심지어는 백병전으로 막아냈습니다.
또한, 쉴 새 없이 지원된 항공 보급과 포병 지원은 이들의 저항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 요인이었습니다.
결국 포위망을 뚫고 달려온 미 5기병연대의 구원부대가 도착하자, 막대한 피해를 본 중공군은 퇴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지평리 전투는 중공군이 참전한 이래, 포위한 UN군 부대를 섬멸하는 데 실패한 최초의 사례였습니다.
이 전투는 "중공군은 포위되면 무조건 전멸한다"는 공포와 신화를 깨뜨렸고, UN군 전체에 "이제 중공군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 전쟁의 가장 중요한 심리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지평리에서의 승리 이후, 전세는 완전히 UN군에게 넘어왔습니다.
'리퍼 작전(Operation Ripper)' 등 후속 작전을 통해 UN군은 계속해서 북진했습니다. 중공군은 서울이 포위될 것을 우려하여 큰 저항 없이 도시를 포기하고 북으로 철수했습니다.
마침내 1951년 3월 15일, 국군 1사단과 미 3사단이 서울에 재입성했습니다.
1.4 후퇴로 서울을 빼앗긴 지 70일 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로 되찾은 서울은 더 이상 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두 차례의 점령과 세 차례의 전투를 겪으며 도시는 완전히 폐허로 변했고, 시민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유령 도시와 같았습니다. 9.28 수복 때와 같은 감격의 환도식도 없었습니다.
리지웨이의 지휘 아래 UN군은 불과 두 달 만에 전세를 뒤집고 수도를 탈환하며 전쟁의 균형을 되찾았습니다. 그의 리더십은 절망적인 패주를 희망의 반격으로 바꾼 위대한 성공 사례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로 되찾은 서울은 더 이상 통일을 향한 전진기지가 아니었습니다. 압도적인 중공군의 존재를 확인한 UN군은 38도선 이북으로의 대규모 진격을 포기했습니다.
이제 전쟁은 38도선 부근의 고지 하나를 뺏고 뺏기는, 하루에도 수백 명씩 죽어 나가는 참혹하고 지루한 고지전(高地戰), 즉 소모전의 형태로 바뀌게 됩니다.
승리도 패배도 없이, 오직 피만 흘리는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