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KER, 비관

비관적인 세상, 비관적인 개인

by 토독





조커를 꽤 전에 봤다. 처음엔 호아킨 피닉스가 감독인가 싶었다. 하도 대대적으로 광고해서.......

요즘은 영화보다 책을 더 많이 읽는데 조커를 굳이 본 이유는

1. 내가 다크나이트를 사랑하기 때문이고

2. 영화 보러 갈 일이 생겨서였다.

보고 난 감상은 이렇다. 이거, 엄청 비관적인 영화네.


이 아래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는 공감을 전제했을까?


나는 조커가 공감을 바라는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 극의 마지막에서 이 모든 것이 조커의 상상일 수도 있다는 장면 때문이다. 그 이후로 조커가 걸어가면서 피의 발자국을 찍어가는 장면은 또 어떻던가. 그 장면은 현실적이었나? 그렇지 않다.

즉, 이 영화의 서사는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다.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는 서사임에도 그렇다. 아무리 이해한들 마지막에 와서 뒤집히는 것이다. 조커의 대사와 같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영화가 주고자 하는 것은 공감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무엇을 전달하고자 할까?


어떤 예술작품이 만들어질 때, 그것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한두 가지로 요약할 수 없다. 각각의 장면은 각각의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아무 의미가 없었는데 관람자에 의해 생길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작품의 주제라고 할 만한 것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조커의 주제는 무엇일까?


#부조리한 삶.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굴레

나는 두 개의 엔딩 장면, 우리가 이해하며 따라가고 있던 엔딩 장면과, 그 이후에 갑작스럽게 들어온 엔딩 장면을 중점으로 조커의 주제의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후자를 살펴보자. 조커는 자신과 이야기하고 있던 상담사, 내지는 프로파일러를 죽이고 하얀 복도를 걸어간다. 그의 손에는 수갑이 있으나 그 장소가 병원인지 감옥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조커는 오른쪽으로 꺾어지며 사라졌다가 어떤 사람에게 쫓기면서 왼쪽으로 도망친다. 이번에는 반대로 어떤 사람이 조커에게 쫓기면서 다시 오른쪽으로 도망친다.


고담은 조커를 만들어냈다. 만들어낸 것이 아니어도 조커가 조커가 되도록 충분한 시간을 부여한 것은 고담의 혼란 그 자체이다. 그리고 이는 본인들이 고담을 구원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하류층을 혐오했던 상류층들의 잘못일 것이다. 그리고 참다 못한 아서는 조커로 변해 그들에게 복수했다. 그들을 쫓아 달리면서 총을 쏘았다.

쫓고 쫓기던, 서로에게 악영향을 주는 방향이 바뀌고 반전하면서 순환한다. 이 관점을 더 확장시켜보자.

아서를 조커로 탄생시킨 고담의 책임자는 (사실 도시에 책임자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굳이 따지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토마스 웨인이다. 토마스 웨인은 조커를 만들었고, 조커는 토마스 웨인을 죽였다. 그래서 조커는 배트맨을 만들었고, 배트맨은 조커를 없앨 것이다. 우리가 아는 다크나이트대로.


결국 삶은 순환한다. 경멸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악이 나오고, 악에 대한 복수심에서 정의가 탄생한다. 조커가 없었다면 배트맨도 없었다. 하지만 배트맨의 부모가, 그로 대표되는 도시의 상류층이 조커의 탄생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결국 이 부조리한 삶의 굴레에선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결국은 제 살 깎아먹기.

물감에서 피로

아까 말했던 두 개의 엔딩 중에, 앞선 하나의 것을 살펴보자. 조커는 폭도들에게 난폭하게나마 구출되어지고, 경찰차 위로 모셔진다. 그리고 눈을 뜬 조커의 앞에는 불에 타는 고담, 자신의 탈을 쓴 폭도들. 자신을 인정하는 눈빛이 있다. 그는 천천히 올라서서, 이번에는 물감이 아닌 자신의 피로 광대의 미소를 그린다.

아서는 조커로 완전히 변모하고 나서 웃는 모습을 보인다. 그건 아서가 슬프거나 괴로울 때, 혹은 아무렇지도 않을 때(로 생각되지만 사실 종종 찾아오는 우울이 아니었을까?) 터뜨리는 웃음의 발작과는 다르다. 오히려 아서의 웃음보다 조커의 웃음이 더 분명하고, 비웃음일 지언정 감정의 표현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조커의 웃음은 자신의 피로 그려진다. 그렇다, 그건 결국 제 살 깎아먹기였다. 그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가 처음에 바란 것은 무엇이었나? 그는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머레이 프랭클린과, 자신의 고충을 알아주는 사람들을 바라지 않았던가?

마지막에 와서 그에게 돌아온 것은, 그가 처음 바라던 것과 어느 부분이라도 닮아 있는가? 그렇지 않다. 폭도들은 자신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저 스트레스와 분노를 풀고 있을 뿐이다. 그 누구도 아서에게는 관심이 없으며 아서의 고충을 이해해주지도 않는다.


그나마 공감이 가능한 부분이 있다면 이 부분이다. 왜냐하면 아서의 고충, 홀어머니를 모시는 고충은 아서를 배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전의 바람은 당연히 방향을 바꿔, 자신을 파괴하고 다른 욕구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꼴이 난 것이다. 자신을 인정해주었으면 하는 사람을 죽이고, 자신의 피로 웃음을 그릴 수밖에 없다.

그 때 지은 웃음은 진짜 웃음인가? 거기서 어떠한 통쾌함도 느낄 수 없다. 지극히 비관적인 자기 파괴 행동일 뿐이다.


#연출의 문제.

문제는 이 모든 걸 굉장히 매력적인, 있어보이는 연출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일방적인 피해자성은 덤이다. 아서를 시점으로 진행하면서 모든 서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이 굴다가, 마지막의 마지막에 와서야 뒤집으니 이미 아서의 시점에 익숙해진 관객들은 마지막이 의미하는 바를 단순히 받아들인다.

물론 이런 연출, 플롯의 구조와는 전혀 다르게 공감을 일으키는 연출도 좋은 점이 있다. 정신질환의 느낌을 고스란히 안겨주는 느낌이다. 물론, 사람마다 전혀 다르겠지만.

이 영화는 아서와 관객 사이의 거리를 잘 조절했어야 한다. 아서의 시점으로 진행되다가도 몇몇 부분에서 쎄함을 느끼게 해서, 아서의 눈이 아닌 다른 눈으로 보게 했어야 한다. 그래야 부조리한 삶, 이해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주제를 더 부각시켰을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지독하게 비관적이다. 돌고 도는 세상의 부조리, 알 수 없는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결국 주인공의 행동마저 자기 파괴적이고 거짓되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결국 조커는 세상의 부조리에 자신을 놓아버렸다.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다. 세상은 원래 이렇게 알 수 없고, 부조리하며, 혼란스럽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기에 희생된다. 그것이 삶의 이치니까.

조금 선하게 바라봐주면 여기에서, 그러니 다른 사람들에게 잘하자거나 그러니 사회 계층 간의 불화가 심각해져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악하게 바라봐주면, 마, 한국에서 뜨끈한 국밥 한 술 떴어야지. 전화영어라도 했어야지 짜식아. 발음만은 좋더만. 노오력이 부족하다.


어쨌든, 나는 조커를 보고 멋진 복수라고 생각할 수 없었으며, 카타르시스라고 느낄 수도 없었다. 오히려 반대의 생각이 들었다.


아, 나는 정말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저렇게 부조리에 휩싸여 내 인생을 송두리째 버리는 짓은 죽어도 하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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