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란?
*한참 전에 쓴 글을 발견하여 올립니다. 지금의 생각과는 조금 다르네요.
영화 <마농의 샘>은 베르디의 음악 ‘운명의 힘’을 사용했다. 3세대에 걸친 이야기와 다양한 인물상이 나오는 운명적인 이야기다운 음악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영화가 대하소설처럼 느껴졌는데, 출생의 비밀과 근친혼, 인간의 이기심 같은 다양한 소재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영화의 주제는 운명(혹은 그 시대의 시대상)과 그 운명 속에 놓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언제나 이런 이야기를 접할 때 드는 생각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 의미가 있을까?’이다. 알 수 없고 예측할 수도 없었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살아남는 것도 아니고 죽음을 택하는 인물이 나오는 이야기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프랑스 농촌의 풍경을 보는 것도, 아름다운 음악도, 그 시대의 시대상을 보는 것도 좋았으나 나에게는 조금 뻔한 이야기였다. 사실 그래서 이 작품을 어떻게 철학적으로 보아야 할지 모르겠다. 어떠한 주제나 문제를 보여주기 보다는 운명에 놓인 인간을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첫 번째 토론 주제는 ‘우리가 이 이야기와 같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빠뻬는 분명히 악역이다. 순박하다 못해 멍청해 보이기까지 한 위고랭에게 정직하지 못한 방법을 속삭이며, 쟝을 비웃다가 결국 죽게 만드는 인물이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에 그러한 인물에게 연민을 느꼈고,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느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악역에게 느끼는 연민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죄는 미워하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로 설명이 다 될까? 사람이 느끼는 감정 중에 잘못된 감정은 없다지만, 나는 연민을 느끼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내 마음 속에서 빠베를 용서한다고 해도 죽은 쟝이 용서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명백하게 제 3자인 내가 용서를 할 자격이 없음은 분명하다. 그런 내가 일방적 피해자였던 쟝과 가해자인 빠뻬에게 동등한 연민을 가진다면, 그것은 옳은 일인가?
요즘 나오는 영화는 악역도 사연을 가진다. 절대악이란 이제 동화책에서나 나오는 이야기가 되었다. 특히 ‘마농의 샘’에서는 누구나 사소한 악을 저지른다. 일방적인 피해자였던 마농조차도 마을에 있는 사람들의 생명수를 끊어버린 잘못이 정당화될 수는 없을 것이다. 잘못을 잘못으로 되갚는 이 태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은 고대에나 쓰이던 말이고 우리는 현대를 살아가고 있으니까.
전에 인터넷에서 읽은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미디어에서 악은 매력적이고 선은 일편적이고 지루해 보이지만, 현실에서의 악은 지루하고 나약하며 현실에서의 선은 너무나 다양하고 매력적이라는 말이 있다. 미디어에서 우리는 오히려 선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조금 더 어렵더라도 매력적이고 다양한 이상과 선을 묘사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두 번째 주제로 미디어에서 선과 악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조심스럽지만 <블랙 팬서>나 <토르: 라그나로크>,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PC에 대한 이야기도 이러한 연장선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는 영화 개개의 완성도와는 다른 문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프고 비참한 현실의 묘사도 좋으나 앞으로 그렇게 되어야 할 희망에 대한 이야기도 중요하다. 오락영화에 가까운 영화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대중들에게 더 많이 노출되는 상업영화이기 때문에 더 중요성을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대중과 호흡하는 예술이며, 현실을 분해하여 재조립하는 예술이다. 개인적으로는 현실을 낱낱이 고발하는 이야기와 희망적인 이상을 그린 이야기가 함께 존재한다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