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2019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셀린 샴마 감독이 찍은 영화로 2019년 칸영화제에서 각본상과 퀴어 종려상을 수상했다. 2019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지 않을까 했는데 알다시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받아갔다.
영미권에 익숙한 한국인이라 프랑스 영화는 익숙하지 않다. 저 실력으로 유명하지 않을 리가 없어 보이는! 배우들과 감독의 전작들을 찾아봤는데 익숙한 작품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면 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봤느냐? 이유는 간단하다. 유명했고 노미네이트 됐으니까. 속세에 살고 잇는 사람이라 유명하고 재미있다는 평이 들리면 주머니 사정이 되는 한 보러 가는 편이다. 호불호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취향의 영역이고 많이 봐야 식견이 늘지 않겠나.
어쨌든 퀴어 장르를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라 (그런데 많이 보진 못했다. 주머니 사정 탓에......) 굳이 굳이 보러 갔다. 영화는 시선을 상징하는 앵글에 무척 신경을 쓰고 여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에 대해 신경 쓰면서도 성애적인 부분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다만 사소한 이야기를 하자면 플러팅이 좀 구리다. 19세기를 배경으로 한다는 고증일까? 아니, 여자랑 여자가 사랑하는 건 좋다. 둘 다 너무 예쁘다. 둘 사이에 넘쳐나는 긴장감과 성적 어필도 너무 좋은데 거기서 굳이 그런 플러팅을 해야 할까? 불란서인들이란. 사실 이건 위에 적었듯이 개인의 취향의 영역이라고 본다.
하지만 영화 자체가 함의하는 메시지는 좋다. 엔딩 장면까지 지루한 영화라고 생각했지만 엔딩을 보고 바로 다음 영화를 예매해야겠다고 생각을 굳혔을 정도였다. 영화는 사랑과 예술에 대해서 묻고 있다. 해피엔딩이 아니기 때문에, 영화가 선택한 시대적 배경에서 이미 예견된, 무엇보다도 현실적인 엔딩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영화는 예술을 적극적으로 끌어온다.
삶을 스쳐간 예술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삶을 스쳐간 사랑과 같은 의미일까? 적어도 아델 에넬의 엔딩 씬 연기를 본다면 우리는 예술과 인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 이제는 회고하는 것밖에 남지 없는 기억이 주는 아릿한 감성을 느끼면서 말이다. 결혼이나 '영원히 행복히 살았습니다' 같은 걸로 끝나지 않은 기억을 회고하면서 후회나 미련이 아닌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영화에서는 그것을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지만 그것이 가능할 거라고 말한다. 기억 속의 예술은 여전히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 기억 자체가 아름다웠던 것처럼.
누군가가 말했듯이 소설은 인생이 실패한 사람이나 쓰는 거고 책은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이나 읽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종류의 실패와 상실을 겪어본 사람들만이 예술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세상에 실패와 상실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점에서, 모든 사람은 정도만 다를 뿐 예술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모든 예술은 스스로의 삶을 반추하고 회고하고 되짚어보면서 태어난다. 그리고 그렇게 예술로 승화시킨 과거는 그 전처럼 아프지 않다. 후회의 가장 건강한 형태는 예술일 것이다.
기억에는 행복한 기억도 있고 불행한 기억도 있을 것이다. 그 기억을 어떤 때에 회고하냐에 따라 기억을 되살리는 우리의 기분은 달라진다. 불행한 때에 행복을 기억한다면 그리움이 될 것이고 불행한 때에 과거를 기억한다면 후회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미 떠나고 없는 사람을 기억하는 것은 미련이 될 수 있고 자신이 가장 행복한 순간에 떠올리는 불행은 그제야 받아들일 수 있는 인생의 한 자락이 될 것이다. 어떤 기억은 그리움과 행복을 주고 삶을 이겨낼 에너지를 준다. 인생에 '영원히 행복히 살았습니다.'처럼 감정이 정해져서 끝나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했던 기억조차 우리에게 날카로운 비수가 될 수 있으니까.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결말은 이런 현실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굳이 이분법적으로 정하자면 비극이 틀림없다. 다른 인물이었다면 분명 그 이후에 비관해서 머리통에 총 쏘고 끝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딸이 발견하면서 역추적해가다가 어머니의 옛사랑을 발견해나가는 식으로 썼어도 재밌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 둘의 결말이 정말로 비극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찜찜하다. 둘은 이미 끝을 알고 시작했으며 그 둘은 끝을 받아들인다. 어떤 도망의 과정도 밟지 않는다. 오히려 거절하고 도망가길 원한다느 마리안느의 태도에 엘로이즈는 분노한다. 더는 자신의 편을 들지 않으며, 자신을 잠시 가지니 이제 자신에 대해 비난한다고.
이 장면에서 나는 이 영화가 참 건강하다고 생각했다. 후회의 가장 건강한 형태에 대해 말하고 사랑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에 대해 말한다. 사랑이 불가능할 때, 모든 이들이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비관해 죽거나 아가씨처럼 도망갈 수는 없는 것이다. 애당초 둘은 끝을 알고 시작한 거였다. 끝을 알고 시작한 사랑을 서로를 배려하면서 끝내는 것. 서로의 위치와 한계를 알고 끝까지 감싸 안아 주는 것. 그게 이 영화에서의 사랑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에게 뛰어가지 않는 엔딩, 엘로이즈가 엔딩씬에서 마지막에 마리안느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엔딩. 그리고 그것이 둘의 마지막임을 인정하는 독백은 그 둘의 사랑을 완벽히 묘사한다.
둘은 둘의 사랑의 실패에서조차 서로를 감싸 안고 지지한다. 비록 중간에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원망했었지만 다시 사과하고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며 이별을 완성하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끝까지 편이 되어주고 서로를 원망하지 않는 사랑, 이런 사랑은 현실에서 가장 요구되고 가장 필요하지만 너무 이상적이라 불가능한 사랑이다. 실패를 이겨낼 시도를 하지 않았으므로 누군가는 이 사랑을 정신승리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사실 나도 그런 사랑은 갖고 싶지 않다. 어떻게든 행복을 손에 넣고 싶으며 분투하고 성취하고 욕망을 잇는 건 현대인들에게 당연한 자질이다.
그래서 영화는 시대를 과거로 이끈다. 이 영화는 구시대의 가부장제와 성차별을 비판하고 퀴어에게 부당한 세상에 대해 욕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는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는 예술에 대해, 서로를 배려하고 끝까지 서로의 편이 되어주는 사랑에 대해 묘사한다.
+ 사운드의 활용이 극히 적기 때문에 사운드가 등장하는 곳에서 미친 듯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이런 게 예술로 승화한다는 기분과 유사하지 않을까? 음악이 등장하지 않는 씬은 정말 일상적인 소리밖에 없으므로 영화 자체는 전반적으로 조용한 편이다. 사운드가 좋은 영화관에서 보길 바란다.
+ 화면이 굉장히 정적이고 아름답다. 고전적인 아름다움이다. 느리게 움직이는 명화를 넣어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