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며 걷는 길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파우스트』 서평

by 하루끝

드디어 세 번을 도전한 끝에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명저 『파우스트』를 등정했다. 그럼에도 시행(詩行)의 수만 12,111행, 페이지로는 600여 페이지, 비극 1부, 2부로 이뤄진 거대한 서사시를 모두 이해하기란 무리였다. 몇 번의 고비가 있었지만 다니엘 페낙의 독자의 10가지 권리 중 하나인 ‘군데군데 골라서 읽을 권리’를 핑계삼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문장들은 빠르게 훑어 넘겼다.


괴테.jpg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는 실존인물이다. 16세기 살았다는 떠돌이 학자로 미술과 점성술의 진보를 보였고 풍문으론 신학과 의학에도 상당한 지식이 있었다. 그가 전설적인 인물로 변모한 데에는 규범을 벗어난 행동과 과장된 일화들이 한몫했다고 한다. 괴짜에게는 스토리가 붙기 마련이다. 이미 16세기부터 파우스트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괴테의 『파우스트』는 18세기 후반부에 들어서 괴테가 파우스트의 캐릭터만 빌려 창작한 소설이다.


파우스트.jpg 파우스트 1-2, 문학동네


인간은 자신과 동떨어진 이야기에 공감을 하지 않는다. 괴테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우리와 비슷한 파우스트는 악행이 아니라 악의 없는 중대한 ‘과오’의 대가로 불행하다. 파우스트가 불당하게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면 가엾다는 감정이 솟구치고 나와 비슷한 파우스트가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면 두려움이 몰려온다. 극 내내 파우스트는 선의를 행하지만. 메피스토펠레스의 손바닥 안에 있다. 그의 선행은 누군가의 불행이 되고 죽음이 되고 폭력이 된다.


『파우스트』는 악마 메피스토가 주님을 찾아가는 것에서 시작한다. 메피스토는 주님께 파우스트의 타락을 두고 내기를 건다. 그때 주님은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지만 그럼에도 착한 인간은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를 안다”며 조건을 받아드린다. 악은 이익에 매달려있기에 도리어 부정한 자는 한 길을 걷지만 선은 고난 속에 있기에 옳은 인간은 곧은길을 걷지 못한다. “수천 가지의 악 속에서도 단 한 가지라도 있을지 모를 선을 찾아내는 사람이 되라”는 기독교 영성가 그라시안의 말처럼 선은 악이 행해지는 곳이 있기에 악을 쫓아다니며 갈지(之)로 흔들리는 길을 걸고 주저앉음과 일어섬을 반복한다. 우리 사회에서도 선을 행하는 사람은 방황하기 마련이다.


파우스트와 그레트헨을 보여주는 메피스토

『파우스트』 1부와 2부의 시간적 간격은 무려 23년이다. 1부는 1808년 괴테 전집 8권에 끼어 출판되었고 2부는 그가 죽기 8개월전, 1831년에 완성되고 사후 『유고 작품집』 제 1권으로 출간되었다. 시간적으로 긴 간극 때문이었을까. 두 부작의 이미지는 매우 다르다. 1부는 판타지를 빙자한 철학 로맨스였다면 2부는 현실을 빙자한 철학 소년드라마다.

1부에서 파우스트는 선을 행하려고 하지만 악마 메피스토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 악행을 행한다. 사랑하는 그레트헨의 가족을 모두 죽이고 그와 그녀의 자식은 미쳐버린 그레트헨의 손에 죽는다. 모든 것을 이뤄줄 것 같은 메피스토를 곁에 두었음에도 그는 그레트헨이 감옥에서 죽는 것을 구하지 못한다. 행동의 모든 주도권은 교묘하게 메피스토에게 있다. 파우스트는 선을 찾아 흔들릴 뿐이다.

그러나 2부에서 파우스트는 그레트헨을 감옥에 두고 나올 때 비참한 모습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는 메피스토와 합을 맞추며 활동한다. 왕국 무도회장에 들어가 귀족들을 농락하고 왕을 감언이설로 속여 화폐개혁을 실시한다. 또 타차원인 어머니들의 세계에서 고대 그리스의 헬레나를 현실로 불러내고 그녀와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는다. 그런가하면 그는 갑자기 영주의 모습으로 변모해 해변 변두리 지역의 땅을 하사받고 간척사업을 시행한다. 그의 마지막은 간척한 땅에서 누릴 백성의 자유와 영원할 명예를 희망하며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는 마지막 감탄을 외치며 생을 마감한다. 파우스트의 죽음은 메피스토와의 계약이 종료가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메피스트는 그의 죽음을 기뻐하며 그의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 가려할 때 천사들이 나타나 파우스트를 천국으로 인도한다. 모든 건 주님의 뜻이라며.


『파우스트』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나는 생각했다. 파우스트가 받은 구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통적인 기독교에서 구원은 주님을 향한 믿음 아래서 이뤄진다. 그러나 파우스트에는 신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파우스트는 신을 찾는 존재가 아니다. 사랑을 탐구하는 존재이다. 『파우스트』 1부에서 2부에서 넘어오면서 큰 변화가 있다면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으로 넘어온다는 것이다. 『파우스트』 1부는 파우스트가 그레트헨과의 개인적인 사랑을 다룬다. 회춘한 파우스트가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서 그레트헨을 선택하고 사랑을 꿈꾸지만 개인적인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레트헨에게 주기 위한 선물을 구하는 사이, 그레트헨는 미쳐서 자식을 죽이고 감옥에 갇힌다. 그에 반면 『파우스트』 2부에서 그는 공적 영역에서 사랑의 실현을 꿈꾼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화폐개혁을 실시하고, 영주가 되어 간척사업을 실행한다. 그는 생의 마지막으로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외치기 전에도 간척한 땅에 살아갈 수백명의 백성들의 미래를 축복한다. 신학자 슐라이에르마허는 구원을 완전한 하나님 의식에로 나아가는 것으로 묘사했으며 인간은 주님께 절대의존하기에 선을 향해 나아간다면 주님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파우스트가 사랑을 이루는 과정에서 수많은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그가 구원받은 이유는 어두운 충동 가운데서 사랑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는 메피스트의 끊임없는 유혹에도 자신이 꿈꾸는 사랑을 위해 흔들리지 않았다.


물론 파우스트의 나타난 구원을 ‘정통신학’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럴 경우 구원이 결과론에 던져지기 때문이다. 결과만 좋으면 과정이 상관없다는 신학은 오류덩어리이기에 주의해야 한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지만 그럼에도 착한 인간은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를 안다”는 것이다. 선한 사람은 혼돈 가운데 있어 넘어지고 쓰러질지라도 다시 일어나 사랑의 길을 걷는 사람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실수할 수도 있다. 넘어질 수도 있다. 또는 선이 악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태반이다. 그러나 선은 원래 그런 것이다.


오늘 날에도 비틀거리며 사랑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다. 가을 태풍에도 강남역 폐쇄회로(CCTV) 철탑에서 고공농성을 펼치는 삼성 해고노동자 김용희씨, 공권력의 탄압에 맞서서 자유를 외치는 수백만명의 홍콩시민들. 이들의 걸음은 한 개인의 일, 한 도시의 일으로 치부할 수 없다. 그들이 직면 악마 메피스토는 언제든 우리를 덮쳐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 대신에 미리 그 길을 걷고 있다. 즉 그들의 길은 우리의 길이다. 같이 걸어야할 길이다. 개인의 사랑을 넘어 벗어나 공적인 사랑을 실현해야 한다. 가을 태풍을 핑계로 집에 숨어 있지는 않은가, 생계가 버겁다고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잠시 흔들려도, 넘어져도 괜찮지만 단 한가지의 사랑을 찾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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