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김애란의 신작
훗날 누군가 내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의 부재를 알아차리는 사람."
그 말을 꺼내는 순간,
나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내가 이 말을 믿고 있는 걸까? 머릿속에 레비나스의 말이 떠올랐다. '타자는 나에게 윤리적 책임을 부여하는 존재'라 했던가. 내가 믿었던 사랑이 그 책임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나의 외로움을 덜기 위한 자기 위안에 불과했을까.
소설 속 주인공들은 늘 이런 질문을 던진다.
공감이란 나를 위한 것일까, 아니면 타자를 위한 것일까? 내가 누군가의 고통을 공감한다고 해서 그 고통이 나의 것이 될 수 있을까? 고통은 세상에서 가장 고유한 감정이다. 기형도 시인의 [엄마 걱정]처럼, "내 서러운 입술이 마른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시인은,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한다. 고통과 상실, 그리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무력감은 언제나 각자의 몫이다.
그러나 공감은 결국 타자를 이해하려는 손짓이다. 그게 설령 작은 거짓말일지라도, 우리는 그 거짓말 속에서 타자를 이해하려 애쓴다. 나와 너는 결코 교차하지 않는 평행선이다. 그 선 위에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해하려 노력한다. 그 과정이 진실로 가는 길일지도 모른다. 혹은, 또 다른 거짓말을 위한 시작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