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고향에서
전라도 해남에서 아홉 살 인생을 살았다. 내 모든 감성은 그러니깐 삶을 바라보는 눈은, 앞바다에는 완도 섬이 보이고 겨울이면 김을 하고 굴 양식과 '파랑기'와 '갈동기'를 잡아 간장게장을 담그고 눈이 내리면 설탕에 눈을 타서 먹고 누렁이 뛰노는 풍경, 비료포대에 지푸라기 잔뜩 넣어 '잔동'에 올라 미끄러지는 일이었다. 봄이면 가시고기를 잡고 여린 잎들 뽑아먹고 장마가 시작되면 호박꽃 이겨 개구리 낚시하고 물이 불어난 또랑엔 푸르스름 가득한 참붕어가 농민가를 부르며 넘실대고 있었다. 쌍방울과 백양빤스 앞에 오줌지린 노오란색이 짙어지면, 그대로 냇가로 나가 놀았다. 지천에 수박, 참외가 널렸고 허기지면 무를 뽑아 '적토'를 털어 이제 막 난 싱싱한 '토낏빨'로 깨물었다. 그 무렵 우리가 뽑아먹는 무의 양이 걱정이 됐는지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중학생 형들 머리칼에는 유독 새치들이 많았는데, 그건 바카스와 무를 같이 먹어서 그런 거라고 무섭게 삐라처럼 나돌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바카스만 보면 무가 떠오른다. 깍두기 먹는 날이면 바카스는 손도 안 댄다.
먼 뒷산에는 '조새바위' 라고 해서 마을이 크게 잘못하면 저 큰 바위가 굴러내려 와 마을을 벌할 것이라 하는 흔들바위가 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개구리 소년들은 내가 살던 와룡에도 있었다. 마을 대대로 전해진 전설을 파헤치기 위해 우리는 그 산을 오르기로 했다. 한참 그 산으로 가다가 우리 중 한 명이 그랬다. 아랫마을 그물고기잡이 아들 '광남'이었다. 아직 우리처럼 토끼이빨이 한쪽이 없고 축농증 있어 늘 콧물을 반쯤 마시는 아이였다. 그때도 콧물을 훔치며 그랬다.
"야, 근디 우리는 와룡이고 저기는 신용리 지나고 동해리도 넘어야 갈 수 있는디..바위가 여까지 굴러 오것냐?"
아홉 살이라 하기에 또 광남이의 풍기는 이미지이며 우리들 사이의 역할로 보면 그런 소리하면 안 되는 거였다. 우리는 산자락까지 갔다. 왜냐하면 우리의 전설이 그렇게 쉽게 무너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가 힘들게 산을 넘고 있었다. 이 세상 모든 아이들이 그렇겠지만 배고프거나 해가지면 돌아가야 했다. 엄마는 언제나 몽둥이와 잔소리로 바짝 굶기고 맛난 밥을 차려주었다. 20년이 지나 우연히 들었다. 우리들 중에 키도 크고 싸움도 잘했던 동옥이에게 " 아야, 광남이 외국에서 유명한 과학자가 되어 있데." 나는 녀석이 맡아 열심히 해주던 역할이 떠올라 믿지 못했지만 그랬다. 그나저나 동옥이는 말이 많아졌다. 말수가 적었고 말보다 주먹이 앞섰던 녀석인데, 남대문에서 옷장사를 한단다. 녀석의 수다가 '골라골라 직업병'에서 왔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알았다. 그래도 내겐 동옥이는 우상이었는데..
그런 내게 일요일은 유독 '침이 고인다.' 원주로 가는 한 시간 반 남짓 시간은 아직도 해남에서 살고 있는 나를 만나는 것만 같다. 40년 넘게 살던 고향을 떠나 오는 날 아버지는 애처럼 펑펑 우셨다고 한다. 아랫마을 광남이네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는 아주 먼 팔촌이었고 이름도 비슷했다. 물론 유일하게 그물고기잡이 하는 분들이었다. 서로에게 몫 좋은 자릴 주고받는 그런 친구였다. 우리 아버지는 '김미봉'이었고 아저씨는 '김수봉'이었다. 아버지는 7남매 중에 막내셨다. 큰아버지는 김치봉, 작은 큰아버지는 김옥봉, 막내 큰아버지는 김원봉이었다. 그 틈에 고모들 세 분이 계셨으니, 아버지는 물려받은 게 없어 가난했다. 물론 아버지가 16살 되던 해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기도 했다. 6.25가 터져 1949년 생 아이를 놓고 다들 산으로 도망쳤다. 인민군들이 갈긴 총에 용케 살아남았지만 눈물이 귀에 들어가 평생 귀머거리로 사셔야 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김치봉' 우리 큰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 미봉이 보고 싶다"라고 우셨다고 한다. 서울에서 해남은 참 멀다. 아빠는 큰아버지를 부둥켜 안고 "왐마, 성님.. 나 왔으라 미봉이.. 이렇게 가불면 어쩐다요.. 아따 성님.." 나는 아버지의 그 울음이 고향을 두고 떠나온 그 울음, 그날 비로소 직접 보게 됐다. 다 큰 어른이 저렇게 우는 거 보니 아빠나 엄마도 부모 없이 자라고 있는 고아라는 걸 새삼 느꼈다.
아빠의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큰집 마당에서 누군가 아버지 이름을 불렀다. "어이, 미봉어!" 논두렁처럼 깊게 파인 얼굴에 주름이 아버지보다는 형님 같은 분이었다. "왐마, 수봉이 아니냐잉" "아따 개이세끼 서울 가불더만 안젼히 서울사람 다되 불었고 마잉" "이잉 아따 서울 가면 다 그라제~" 딱 우리들 같았다. 멋적인 미소 지으며 정 없이 오고 가는 상투적인 언어가 없었다. 아빠도 그때 입에 침이 고였는지 연신 스흡스흡거리며 수봉이 아저씨와 윗마을 용길이, 빗가리마을 덕준이, 이장아제 병팔이 아저씨들과 말 그대로 "왐마와 아따"를 쏟아내며 자길 찾으신 모습이었다. 사투리는 이상하다. 잃어버린 자길 찾은 듯 그렇게 말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때 아버지는 아직 자라고 있는 아이에 불과했다.
유난히 햇살이 짙다. 남의 집 계단 앞에서 키스하다 걸린 것처럼 울긋불긋한 산들이 지난다. 내가 기다린 적도 없는데 휴일이면 나는 이렇게 나를 치유하고 나를 만나고 곁에 있는 수많은 것들을 다시 마음에 담아낸다. 그런데 왜 일요일에는 시간도 짧은데 하고 싶은 일이 많을까. 잠도 자고 맛집 탐방도 친구도 여행도.. 내 마음이 넓어진 것은 아닐까? 내게 내일 월요일은 없는 것처럼 일요일은 언제나 침이 고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