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운 시선 #01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 원스
살다 보니 미간에 내 천자가 새겨진다고 한다. 지천명의 가까운 어른은 인생을 그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먼저 달려나가 움켜쥐지 않으면 미련해지는 것이 삶이란다. 그것을 채 살아보지도 않은 아이들에게 조금 더 앞서나가는 방법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풍토가 된지도 오래. 그런 아이들이 모두 일등선을 통과하는 게 아니라는 건 통계학적으로 알 수 있다. 개중 일부는 그런 어른이 되지 못하고 튕겨져 나가 그저 그런 삶을 적당히 만족하고 과히 열등하며 살아간다. 그런 점에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 원스”는 나를 울리기에 충분한 영화였다. 희한하게도 운다는 것에는 여러 감정이 자연히 붙는데, 이 영화는 슬픔도 기쁨도 아닌 오롯이 나에게 울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대신 영화를 털고 밖으로 나갈 때, 열렬한 응원과 박수가 전부였다. 내 등 뒤로 쏟아지는 함성을 두고 나는 모두에게 밝게 인사하고 싶어졌다 마치 트루먼 쇼의 트루먼이 쇼장 밖으로 나오면 이런 기분일까. 왜인지 세상을 다 품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다정함으로 삶을 조금 더 노랗게 바라볼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샘솟았다.
최근 몇 개월간 나는 나의 중심을 찾는 여정을 길게 갖고 있었다. 세상은 나에게 비전과 가치를 묻는데, 내가 이렇다 할 비전과 가치를 갖고 있는가라는 고민이 이 여정의 출발이었다. 앞으로 돈을 어떻게 벌 것인가와, 얼마나 벌 것인가, 직업적 성공을 사회적 지위로 정의할 수 있는가? 비전과 가치를 물으면 꼬리표처럼 붙는 질문들이다. 나는 그런 질문들은 시시각각 달라질 수 있고 합리화될 수 있는 실재하지 않는 것에 가깝다고 느껴졌다. 그렇다면 실재하는 건 무엇인가.
우스울 정도로 소소한 것. 결국 분자와 같은 미세한 것만이 실재한다. 그를 향해 접시를 돌려놓고 상냥하게 인사하고 순서를 바꿔주는 비용적이지 않지만 다정하고 세심한 일. 상대를 향한 신경이 조금이라도 세워져있지 않다면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우주의 부유 같은 일. 나의 중심이지만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작지만 분명한 마찰의 마음.
영화를 보며 내가 평생 줄곧 생각해오며 중심으로 잡고 있는 그것이 아주 허무맹랑한 일은 아니었구나. 에블린의 포옹에 감동하며 우는 관객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일말의 다정에 대한 부재와 부채가 있구나. 그 자체로 나의 비전과 가치를 확인받은 기분이었다.
멀티버스 속 나를 부러워하는 마음에서 모든 이를 품기까지의 과정속에서 잿빛 고민들이 스쳐가기도 했다. 사는 것이 덧없다고 느껴지며 세상 다 산 어른처럼 굴었던 몇 해 전의 나의 얼굴은 조이처럼 텅 비어있었다. 여전히 인간관계는 평행히 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고 설파하는 나이지만, 그 평행 속의 공간을 메우는 따듯함이 인간에게는 자기장처럼 필요하다. 존재만으로 영향권 안에 들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부터, 나는 서서히 따스해졌다. 그리고 세상이 안전해졌다.
다정함이 세상을 구한다, 어떤 이는 참 속없는 소리 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나는 별말 없이 그에게 따듯한 쿠키를 내어주면서 빙그레 웃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냥 참 고맙습니다. 무한한 우주의 또 다른 알파도 나와 같은 다정함을 쥐고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